온 나라가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었으나 단 한 사람, 서경만은 그렇지 못했다.
국토의 경계가 줄어든 지는 오래였다.
여각에 의해 야금야금 먹혀들어 간 끝자락이 어느새 수도의 몇 곱절을 넘기고 있었다.
야만족 토벌을 위해 출정했던 군사들은 칼과 방패를 가진 것이 무색하게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고, 경계에 사는 백성들을 피신시키는 것에만 급급했다. 어느 출신인지도 모를 뜨내기 집단이라고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무섭도록 수를 불린 그들이 언제고 자신들의 터전을 덮치고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공포는 백성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했다.
왕의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이 바로 서경이었다.
무예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전략을 세우는 것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라고 고하며, 오랜 친우 문지헌을 토벌대를 이끌 장군으로 천거했다. 비록 조부와 그의 선대도 혁혁한 공을 세운 무관의 집안은 아니나, 뜻을 펼칠 무대가 없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지헌은 급하게 차출된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겨우겨우 나이를 채운 어린 군졸들이 눈에 띄었다. 제 자식을 사지로 보내는 부모들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곡소리를 해 댔다.
〈다녀오겠네.〉
서경은 담담한 문지헌의 인사에 몸 성히 돌아오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돌아와선 안 되니까. 혹여 돌아오더라도 목숨이 붙은 채로는 안 되니까.
그저 오래도록 보았었다. 마지막일 그의 얼굴을, 머릿속 깊이 각인되도록 오래.
한데…….
서경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혼란스러운 심중을 달랬다. 많은 사람의 환호를 받으며 당당히 성문을 통과하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머리를 흔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할지 막막했다. 답답한 속은 연거푸 술을 들이붓는 것으로는 나아지지 않았다.
“도련님.”
“무슨 일이냐.”
분명 밤새 찾지 말라 당부하였는데. 자신을 부르는 덕이의 목소리에 서경이 짜증스럽게 답하자 원하지 않던 답이 돌아왔다.
“그것이…… 문지헌 나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잔다 일러라.”
“제가 그리 말씀을 올렸…… 아이쿠, 나리!”
마루에 발을 구르는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이내 장지문이 열렸다.
서경은 문을 짚고 서 있는 이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주었다.
무려 다섯 해 만에 보는 문지헌은 태가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더 자라기라도 하였는가. 본디 커다랬던 풍채가 이제는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를 떠나보내고 홀로 수차례 떠올린 것과의 간극이 너무도 커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경아.”
아, 음성만은 달라지지 않았구나.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이것이 그리움에 사무쳤던 마음인지, 죄책감인지 도통 구분할 수 없었다.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인 서경은 마른침을 삼키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어서 오게.”
“별일 없었나? 자네 얼굴을 도통 볼 수가 없어 와 보니 역시 집에 있었군.”
“알지 않는가, 소란한 것을 싫어하는 성정을.”
덕이가 새로 내어 온 술상에 마주 앉아 평범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은 서경의 상상 속엔 없었기에 문지헌이 출전하기 전으로 돌아간 건 아닌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래. 그러니 서운해하거나 원망은 않기로 하지. 내 자네를 잘 아니까.”
문지헌의 말에 지레 놀라 그의 술잔을 채워 주던 손이 잔 밖으로 벗어났다.
“……미안하네.”
“뭘, 털어 내면 그만인 것을.”
서경은 술이 튄 도포를 가볍게 털어 내며 미소하는 문지헌의 눈을 피했다.
〈내 자네를 잘 아니까.〉
속이 훤히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날 잘 안다고. 그래, 내가 비겁한 겁쟁이라는 것도 아는가? 이기심에 자네를 사지로 떠민 것은?
그리 묻고 싶었다.
“벗어서 이리 주게. 내 덕이에게 잘 닦고 말려 오라고 하겠네.”
잠깐이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문지헌은 도포 대신 상처 많은 손으로 서경의 손을 덥석 쥐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빨간 흉이 여럿이었다.
“경아.”
당황하여 손을 빼내려는 서경의 몸짓에도 아랑곳 않고 문지헌은 오히려 세게 힘을 주어 잡았다.
“네 덕에 공을 세울 수 있었어. 한미했던 우리 문씨 가문이 확실한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었네.”
“…….”
“그러니 더는 마음 쓰지 말아.”
잡힌 손이 열이 오르는 듯 화끈거렸다. 다른 손으로 잡힌 것을 쳐 내며 몸을 물렸다. 다소 과한 반응에도 문지헌은 아무렇지 않다는 양, 손을 거둬들이며 말을 이었다.
“그저 내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기뻐해 주게.”
“…….”
“자네를 이렇게 다시 보아 나는 몹시 좋으니.”
한 치의 거짓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고요한 눈. 서경은 그 시선에 가슴 한구석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아파 왔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눈이 과연 어떻게 변할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래?”
“……나도 좋네.”
서경의 답에 문지헌은 이만하면 되었다는 투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평소 표현이 없기로 유명한 서경이 좋다고 말한 것이면 참으로 그런 거라 믿어도 되겠지.”
넘칠 듯 찰랑이는 술을 들이켠 문지헌이 품속을 뒤적였다. 그러곤 금세 술상 위에 꺼낸 것은 고운 비단에 금사로 무늬가 수놓아진 주머니였다. 마치 작은 능금을 보는 듯 탐스럽게도 붉었다.
“이게 무엇인가?”
“꺼내서 직접 보게.”
주머니의 매듭을 풀자 안에는 나무로 깎은 작은 조각 두 알이 들어 있었다. 서경이 그것을 꺼내자 달큼한 향이 훅 풍겨 왔다. 주머니의 모양새처럼 푹 익은 능금 같기도 한 향에 저도 모르게 코를 대어 맡았다.
“향이 좋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지헌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내려왔다. 하도 물끄러미 제 눈을 바라보는 그가 부담스러워 서경은 슬며시 조각을 내려놓았다.
“경이 네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군.”
“……한데, 왜 두 알인가?”
서경의 물음에 씨익 웃은 문지헌이 상 위에 있는 조각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자세히 보게.”
팔각으로 되어 각 면마다 글자가 새겨진 이것은 주령구였다.
서경이 익숙한 글자를 따라 읽었다.
“……연거푸 마시기.”
“자네가 제일 힘들어 하는 것이지. 내가 없는 사이에 술 좀 늘었나?”
“얼굴 간지럼 태워도 참기.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이런 건 왜 남아 있는 거야.”
본디 열네 면으로 만들어진 주령구가 여덟 면으로 줄어들며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 따위는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건드는 것을 싫어하는 서경이었기에 차라리 술을 마시거나 시를 읊는 것이 만 배는 나은 처사였다.
“여각민들도 주령구 놀이를 하더군.”
갑작스레 나온 여각의 이야기에 풀어졌던 서경의 표정이 다시금 굳었다. 지레 찔린 탓이었다.
문지헌이 손을 뻗어 저도 모르게 세게 움켜쥔 서경의 손을 살살 쓸었다.
“한데 그들은 이처럼 두 개를 쓰더라고. 다른 점을 알아보겠는가?”
서경의 눈앞에 들이민 하나의 주령구에는 다른 벌칙 없이 숫자만 적혀 있었다.
“숫자뿐인데…….”
문지헌이 큼지막한 손아귀에 두 개의 주령구를 쥐고 흔들자 참나무로 만들어진 조각이 부딪히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몇 번의 손짓 후 쏟아진 주령구의 윗면이 각각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와 ‘두 이(二)’가 나왔다.
“하필 경이 네가 싫어하는 게 나왔는데……. 내 미리 사과하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일으킨 문지헌이 서경을 덮쳐 왔다. 집채만 한 몸이 기울어지자 놀란 서경이 뒤로 나자빠지듯 물러났다.
경원관 생도들과 주령구 놀이를 할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 사내가 사내에게 덤벼드는 일 따위는 결단코 없었고, 기녀를 사이에 끼어 그 벌칙을 대신하곤 했다.
물론 서경은 어떤 것이 걸려도 술을 마셔 버려, 주령구 놀이를 하는 날이면 항상 문지헌의 부축을 받아야만 돌아갈 수 있었다.
“문지헌!”
“피했으니 한잔 마셔야 하네.”
몸이 몹시도 가까웠다. 누구 하나라도 자세를 조금만 달리한다면 어디든 바로 닿을 듯이.
서경은 달음박질치는 것처럼 뛰어 대는 제 가슴이 문지헌에게 들릴까 초조해졌다. 겨우 이런 걸로 이제 와서 들킬 순 없었다.
“……비키시게!”
팔로 문지헌의 가슴팍을 밀며 몸을 빼낸 뒤 바로 술잔을 입에 대어 두 잔을 비워 냈다. 입가로 흐른 술을 소매로 닦으며 문지헌에게 소리쳤다.
“여각 놈들에게 참으로 몹쓸 것을 배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문지헌의 앞섶이 온통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경이 네가 그렇게 마시니 늘 취하는 거 아냐.”
“이, 이게 지금……. 덕이야, 명이 아범. 밖에 있는가! 여기, 의원을……!”
문지헌에게 다가가 옷고름을 풀어내니 무명천이 본래 붉은색이었던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어깻죽지부터 가슴을 크게 가로지른 상처인 듯, 살갗이라고는 목만 남겨 두고 칭칭 동여맨 상태가 끔찍했다.
“손에 묻을라. 난 괜찮으니 비키게.”
나직하게 말하는 문지헌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이런 상태라면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거늘.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상처를 입게 만든 원수 같은 나를 찾아와.
“도련님! 아이고, 지헌 나리! 이게 무슨 일이야. 덕이야, 의원님을 불러와라!”
이것이 내가 진정 바란 것인가.
서경은 문지헌의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오는 땀방울을 닦아 주지도 못한 채 손을 덜덜 떨었다.
* * *
“네가 드디어 쓸모를 보이는구나.”
서경의 집으로 비단과 질 좋은 말 두 필을 비롯해 금은보화가 도착했다. 이것은 부상이었고 중요한 것은 승직이었다. 서경은 이번 일의 공로로 장령을 달았다.
공교로운 일이었다.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한 일은 아니었기에, 서경은 서씨 가문의 장자로 지낸 지 스무 해를 훌쩍 넘기고서야 받은 첫 칭찬임에도 가슴이 무거웠다.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지헌의 천거는 공을 세우려 한 일이 아니었고, 되레 제 눈앞에서 그를 치워 버리기 위한 불온한 마음에서 나온 까닭이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 아버지.”
“경이였다면 장령 정도는 진즉에 달았을 테다.”
“…….”
“천거를 해서가 아닌 제힘으로 말이지.”
아버지인 서득제와 서경이 단둘이 있을 때마다 듣는 말이었다. 회초리를 내리거나, 뺨을 올려붙일 때, 속고의 하나 없이 광에 갇힐 때도 늘 들어온 족쇄 같은 말.
경이였다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비범했다던 서경을 따라잡기에 자신은 그리도 부족한 것인지 늘 고민하고 고민했다.
고귀하신 서씨 가문 5대 독자의 이름을 받고 호적을 갈음했다 한들, 제 몸을 이루는 반쪽짜리 핏줄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매일같이 깨닫는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도망하고 싶었으나, 혼자 이곳에서 벗어나 봐야 무소용이었다.
서득제의 아들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어미의 목숨은 보장받을 수 없었다. 서경이 어떻게든 버텨 내야 하는 연유였고, 비겁하게 들릴지 몰라도 문지헌을 천거한 연유였다.
겨우 버텨 내고 있는 이 자리를 지키기에, 친우를 향한 마음은 불필요하고도 위험천만했으므로.
서경은 문지헌을 마음에 둔 이후로 서득제가 어미의 목을 쥐고 있는 꿈을 수도 없이 꾸었다.
‘어서 서씨 가문을 빛내어 어미를 만나러 오지 않고 비역질을 하고 있는 게냐?’
‘사내를 연모해? 그런 모자란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나리께서 이 어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눈을 까뒤집을 것처럼 희번덕거리는 어미를 피해 고개를 돌리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멍투성이의 자신이 있었다.
‘누구라도 붙잡아야 살 것 같은 네 마음은 나만 안다.’
‘아무도 모르게 하면 괜찮을 것이야.’
대신 들키면 안 된다.
그렇게 속삭이는 어린 서경을 마주해야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어미도 서득제도 문지헌도 모르게 나만이 끌어안고 가야 할 짐 같은 마음이었다.
“심려 끼치는 일 없도록 할 것입니다.”
“응당 그래야 하는 일이다. 왜인지는 잊지 않았겠지.”
“……예.”
“나가 보아라.”
“소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서득제의 방을 나와 뻑뻑한 고개를 들어 올리니, 점점 열기를 더하는 하순의 하늘이 청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담장을 넘어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으나 서경의 속은 평안하지 못했다. 오히려 문지헌이 돌아오기 전이 나았을 정도로.
서경은 아침까지 문지헌이 누워 있던 별채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서 보료에 손을 올리자 그의 온기가 여전히 느껴지는 듯했다.
〈이 몸을 하시고 움직이셨단 말입니까……. 아무리 장군이라고 하더라도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을 피했을 뿐, 깊은 상처이니 조심하십시오.〉
의원의 말에 안도하는 자신을 보며, 그가 죽기를 바란 것이 맞기는 했던 건지 저조차 의심스러웠다.
문지헌을 의원에게 맡기고 방으로 돌아와서도 한참을 떨었다. 손에 묻은 피는 진즉에 지워졌어도 잔상이 남아 괴로웠다. 일렁이는 호롱불이 그의 앞을 적셨던 핏물 같아서, 고작 손톱만 하게 뜬 달빛을 불빛 삼아 방 한구석에 웅크린 채로 밤을 지새웠다. 그가 두고 간 주령구를 한없이 굴려 대며.
잔잔하게 방을 채운 능금의 향에 가슴이 저릿했다.
〈경아.〉
〈그저 살아 돌아온 것에 기뻐해 주게.〉
〈자네를 살아서 다시 보아 나는 몹시 좋으니.〉
그 말을 뱉는 문지헌은 어떠했던가.
오로지 서경만을 담아내는 새까만 눈동자는 그토록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이채를 잃지 않았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는 늘 부드럽게 닿아 왔던 시선이, 돌아온 뒤에는 묘하게 달라진 점이 서경의 입을 바싹바싹 마르게 했다.
죽었다고 여기며, 깊은 곳에 숨긴 채 마음껏 키워 둔 제 더러운 연정이 곧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서경은 품에 깊숙이 넣어 둔 주령구 주머니를 꺼냈다. 바닥에 굴리니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지난밤과 다를 게 없었다. 향이 코끝에 닿기 시작했다. 눈을 감자, 잡혔던 손의 열기와 낮게 귀를 울렸던 목소리가 절로 떠올랐다.
그리고.
〈……하.〉
고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더운 숨을 몰아쉬는 모습까지.
순식간에 아랫배가 뭉친 듯 답답해졌다. 갑작스러우면서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를 마음에 품은 뒤로 불쑥불쑥 찾아오는 충동이었으니까.
잠깐의 고민 끝에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 부풀기 시작한 성기를 붙잡고 힘을 주어 쓸어내리니 금세 우뚝하니 섰다. 문지헌의 손이 제 손 위를 겹쳐 잡았던 것을 떠올리며 마치 그가 제 것을 만져 주는 상상 속에 잠겨 흔들었다.
“흐읏…….”
제 몸 위로 쏟아지던 문지헌의 몸, 위험할 정도로 가까웠던 거리가 머릿속에서 더러운 상상을 이끌어 냈다. 이전에는 함께 수음하는 정도에서 그쳤던 것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몸을 맞붙이고 있었다.
서경의 다른 손 하나가 바지를 끌어 내리고 밀부 근처를 배회했다. 뒤를 만지기 위해 자연히 양다리가 들어 올려지고 반쯤 누운 자세가 됐다.
“하아…… 하…….”
머릿속의 문지헌이 성기 끝으로 밀부를 꾸욱 누르며 진입을 시도하는 것과 동시에 서경이 가운뎃손가락을 요령 없이 밀어 넣었다.
“윽……!”
좁다란 구멍에 간신히 쑤셔 넣은 손가락을 놀리자 생경한 감각에 흥분이 올랐다. 앞을 흔들고 있어서인지, 머릿속에서 문지헌이 제 구멍에 좆을 넣으며 인상을 쓰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몹시 자극적임에는 틀림없었다.
〈경아.〉
“아아, 으, 읏…….”
견딜 수 없는 쾌감에 구멍에 처박은 손가락을 넣었다 빼며 문지헌의 허리 짓과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성기를 쥔 손에 손등 뼈가 도드라지도록 강하게 쥐고 표피가 벗겨질 때까지 흔들었다.
“으응…… 지헌, 흣……!”
신음이 점점 커지는 것을 저조차도 자제하지 못할 때, 손바닥에 뜨거운 액이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사정의 쾌감에 손가락을 물고 있던 구멍이 옴쭉거리며 좁아 들었다.
“하아…… 하…….”
양손을 들어 올리니 손바닥이 온통 제 더러운 정과 알 수 없는 액으로 범벅이었다. 짙은 자괴감과 더불어 공포심이 몰려왔다. 신음을 참을 수 없었던 순간이 처음인 까닭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자제할 수 없다면 어쩔 것인가.
주령구 놀이를 하다 장난스레 덮쳐 오는 문지헌을 밀어내지 못한다면?
아버지가, 서득제가 이 모든 걸 알아 버린다면…….
어미는?
서경은 제 뺨을 갈기고 싶어졌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이 상황에서 멀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서경은 얼마 전 지방 감찰관을 선발할 예정이라던 대사헌의 말이 떠올랐다. 방으로 뛰어 들어가, 관복을 갖춰 입고 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 * *
“서 장령은 어렵겠네.”
거두절미하고 대뜸 거절하는 말에 서경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기에 다시 한번 차근히 되물었다.
“어째섭니까, 대사헌 어른. 저는 감찰일 적에도 흥령 외에 가까운 지방 감찰을 해 왔었습니다. 또한 일 처리 역시 누구보다 공명정대했다는 것은 어른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그 때문이 아닐세.”
“그러면요!”
서경은 답답함에 무례하게도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대사헌 홍인범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전하께서 명하신 일이지만, 스스로가 타당한 승직이었다고 보는가? 내 누구보다 사헌부에서 자네를 아끼네만 과한 처사이지 않았나 생각하네. 이럴수록 자중하고 경거망동하지 말아야지!”
“지방 감찰관입니다, 어른. 먼 곳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그걸 제가 가겠다는 말입니다.”
“자네라면 금방 이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내 오해했나 보구먼. 어찌 하나만 생각하고 두 수 앞을 내다볼 줄은 몰라. 가뜩이나 고속 승직한 자네이네. 지금이야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쁨에 넘어갈지 몰라도 시기와 질투에 눈먼 자들이 나오기 마련이지 않겠나.”
“…….”
“자네가 지방 감찰에서 만에 하나 실수를 했다고 생각해 보게. 뭔가 놓치기라도 한다면 어쩔 셈인가. 지방 세력을 등에 업으려 눈감아 준 것이라는 오해를 사기 충분하지 않겠나? 이는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네. 적이 생기는 건 순식간이야.”
홍인범의 말이 맞았다.
오로지 지금 당장 문지헌의 곁에서 멀어지기 위해, 앞일을 내다보지 못했다. 오랫동안 지켜 온 것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임을 생각지 못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서경은 고개 숙여 홍인범에게 인사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사헌 어른.”
몹시도 모순적이었다. 서득제의 협박 같은 말과 홍인범의 걱정하는 말이 겹치는 것이. 마치 저에게 돌파구 따위는 없다고 하는 듯해, 서경은 절로 무력해졌다.
지방 감찰관으로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좌절되자 서경은 급한 대로 다른 방법을 택했다.
몇 날 며칠을 집무실에서 두문불출하며 새로 받은 업무에 파고들었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누구보다 공정해야 하는 사헌부의 관리이건만, 연심에 눈이 멀어 나라의 재산을 가져다 바친 이나 마음을 얻으려 무분별하게 공권력을 휘두른 이를 보면 도저히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저 역시 그러하지 않았는가.
모두 미련하고 우매하기 그지없었다.
* * *
그토록 피해 다녔으면서, 오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금위장군이 오르내리면 귀가 열렸다. 또 그처럼 기골이 장대한 이가 지나갈 때면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서 장령, 왜 그러시오?”
“아니, 별일 아니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건 모두 거짓부렁이임이 틀림없었다. 오래도록 키워 낸 마음인지라, 눈에서 멀어지는 것 따위는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
하여, 혼몽해질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면 어떠할까 하였으나 꿈인 양 환시와 환청이 생겨 버려 미칠 노릇이었다.
“자네 참으로 수척해 보이는 거 아는가? 업무가 과중한 것은 알겠으나 몸부터 돌봐야지. 벌써 퇴청하지 않은 지도 달포가 되었는데 말이야.”
“…….”
“대사헌께서 집무실에서 서 장령을 내쫓으라고 난리시네. 공연히 내가 혼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오늘은 들어가시게.”
어쩌면 지방 감찰관으로 선발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반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정도라면 홍인범도 이해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렇듯 다른 이를 통해 말을 전하는 것을 보니 이 짓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네.”
“꼭이네.”
“알았대도.”
“아, 아. 서 장령, 혹시 그 얘기 들었는가? 여각의 진지 너머에 있던 청은국 말이네.”
서경과 같은 사헌부 장령인 한명규는 사헌부의 관리치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족속인지라 평소의 서경이라면 멀리했을 테지만, 근래에는 문지헌의 환각을 떨쳐 내려 부러 붙어 있었더니 매일 물어 오는 이런저런 정보를 원치 않게 듣게 될 때가 많았다.
“원래는 우리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지 않은가. 금위장군이 여각을 토벌하고 나니 그 경계가 애매해졌다고 하더군.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나기도 했고 그들이 청은의 땅도 갉아먹었던 터라, 모호해진 국경을 협상하러 책사를 보낸다고 하네.”
“국경이라……. 애매할 테지. 하지만 여각을 토벌한 것은 우리이고, 청은국이 그 덕을 보았으니 여각이 있던 곳은 응당 우리의 것이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청은국이 가만히 앉아서 그 꼴을 보겠어? 우리보다 큰 나라이니 상대적인 약소국이 협상하러 가야지.”
나라나 사람이나 약자는 괴로운 법이었다. 협상이 아니라 뭔가를 더 뺏기지 않기 위해 기를 써야 하고, 속절없이 휘둘리는데도 목숨을 부지하기에만 급급한.
서경은 나라마저 제 처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 자리에 사헌부 인원 한 명이 같이 갈 예정이라네.”
“감찰 인원이 필요한 모양이지.”
“그래서 내가 자네가 가면 어떻겠는지 대사헌께 청했다네.”
“……나를?”
“계속 죽을상을 하고 있지 않아. 나라의 일이니 봇짐 나들이를 가는 것은 아닐 테지만, 기분 전환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걸세. 원래는 내가 갈 예정이었지만, 자네에게 양보하지!”
“어…….”
“그럼 가는 것으로 알겠네! 출발은 모레야.”
한명규는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처럼 빠르게 말을 마치더니 앞서가던 다른 곳의 관리를 부르며 자리를 떴다.
“…….”
그렇게 도망하고 싶을 때는 기회가 없더니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거리를 둘 기회를 준다 하니 냉큼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청은국에서는 지나가다가 금위장군 얘기가 들릴 리도 없고, 우리와는 체구도 다른 나라이니 문지헌을 떠올릴 무엇도 없을 테다. 나라의 책사 자격으로 간다고 하면 서득제도 싫어하지는 않을 것으로, 이만한 기회는 없었다.
서경은 자리를 정리하고 퇴청하였다. 급박하게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통에 금세 술시가 다 되었다. 해가 저무는 시간임에도 절절 끓었던 한낮의 온기가 땅에서 올라와 숨이 턱턱 막혔다.
하나, 곧 트일 것이다.
더위에 의한 것이든, 다른 것에 의한 것이든.
대문을 지나 곧장 서득제에게 향했다. 주의시킨 대로 일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흡족하였는지 별다른 얘기는 없었다. 내친김에 청은국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땐 돌아올 때까지 어미를 모신 곳으로 약을 보내겠다는 약조도 했다.
깊이 머리를 숙이며 사랑채를 나온 서경은 마당에 서 있는 문지헌을 맞닥뜨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완전히 돌아온 혈색에 마음이 놓였다.
“얼굴 보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어쩐 일인가.”
“일이 있어야 보는 사이였나, 우리가?”
“피곤하네.”
“그러지 말고 한잔해 주게.”
서경은 방으로 따라 들어서는 문지헌을 등지고 관복을 갈아입었다.
“다른 이들도 많지 않나.”
“귀찮게 굴어. 도통 조용히 마실 수 없게 영웅담을 늘어놓으라 성화지 않아. 비록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지만, 눈앞에서 죽어 간 우리 군사들도 셀 수 없이 많은데 말이야.”
“…….”
“참상을 직접 보지 않은 자들이라 떠들 수 있는 거지.”
나직한 문지헌의 목소리에 목이 멨다.
저 역시 그들과 다를 바 하나 없다는 생각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마치 그곳으로 보낸 자신을 책망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제 발이 저린 까닭이었다.
“……주령구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약조하면 마셔 주겠네.”
“약조하지.”
어차피 마지막이다. 자신은 청은국으로 넘어가 마음을 정리할 테고 기약 없는 여정을 지나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는 얼마든 소란스럽지 않은 마음으로 대작해 줄 수 있을 테니.
네게 품은 연정을 들켜, 내 삶이 통째로 뒤집어질까 전전긍긍하는 짓은 이제 그만둘 것이다.
* * *
별다른 말 없이 나눈 술잔이 주량을 넘겼다. 문지헌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서경은 잔뜩 풀린 얼굴로 어느새 쥐었는지 모를 주령구를 손안에서 달그락거리며 문지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조용히 마주하고 있으니, 고요히 감긴 눈꺼풀 안의 눈동자를 처음 마주한 날이 떠올랐다.
관례를 치르고 상투를 틀었으니 겉으로는 점잔을 빼던 생도들이지만, 모여서 술이라도 한잔하면 주절주절 입을 나불대는 건 기생들 못지않았다.
쓸모도 없는 저잣거리 풍문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으나 가끔 쏠쏠한 정보도 있었기에 억지로라도 앉아 있는 편이었다. 경원관 관리의 자식에게는 시험 정보를, 형조 판서를 지낸 아비를 둔 자식에게는 서경이 목표로 한 사헌부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기대한 정보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사이사이에 기생을 끼고 주령구 놀이만 해 대는 통에 서경은 고개를 숙이면 술을 쏟아 낼 정도로 과음을 했다. 정신을 차릴 겸 소피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열린 문 사이로 반갑지 않은 제 얘기가 들린 건 우연이었다. 아니, 필연이었을지도.
〈서경이 서자라는 말이 사실인가?〉
〈얼자일지도 모르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는데?〉
〈점.〉
〈점?〉
〈내가 어릴 때 서경을 본 적이 있어. 반질반질하던 낯은 똑같은데 요 기생 년 같은 점은 없었단 말일세.〉
입가에 야릇한 점이 찍힌 기생을 희롱하며 떠들어 대는 이야기에 서경은 몸이 딱딱하게 굳어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술기운이 날아간 자리엔 불안함이 가득 들어찼다.
〈얼자라고 생각하는 건 어째선가?〉
〈그 집에서 일하는 여노비 하나가 얼굴에 점이 있네. 바로 여기.〉
〈서경도 거기에 있지 않나.〉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 놓고 입조심을 시켰다고 했다. 한데 생각지도 못하게 말이 새어 나간 것보다 먼저 어미인 여정을 본 이가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쿵쾅대며 숨이 턱 막혔다. 이 사실을 서득제가 알게 된다면 호되게 맞고 광에 갇히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말조심하게.〉
어떻게든 이 대화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던 순간이었다.
〈서경이 얼자였다면 경원관에 들어올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평소에 익히 들을 수 없었던 낮은 울림의 주인은 문지헌의 것이었다. 안정감 있는 그의 목소리가 요동치는 서경의 마음을 묘하게 진정시켜 주었다.
〈그건 그런데…….〉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떨어지는 건 자네 목 하나만이 아닐 걸세.〉
〈문지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판서 어른께서 자네 입이 이리 방정맞은 것을 아시는지 모르겠다만.〉
〈방정이라니……!〉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
〈아들의 형을 집행하게 되실지도 모르니 말이네.〉
조용하지만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더는 아무도 말을 이어 붙이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는 서경의 앞으로 문이 열리며 커다란 인영이 드리워졌다.
〈아…….〉
〈데려다주겠네.〉
〈괜찮…….〉
〈눈이 붉어. 많이 취한 듯하니 돌아가는 게 좋겠는데.〉
문지헌은 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버티고 서서 서경을 내려다보았다. 서경이 처음 마주하는 문지헌의 눈은 도련님이 빠져 죽었다던 우물인 양 깊고도 깊었다.
거기에 자신도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리란 걸, 그때는 몰랐다.
서경을 위해 던진 말은 아니었을 테다. 아비가 형조 판서였던 생도가 걱정돼서 한 말이었을 수도, 하도 정신 사납게 떠들어 대서 입을 다물게 하려는 말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서경을 안심하게 해 주었다는 점은 틀림없었다.
나른하게 오른 취기에 기분 좋은 옛일을 떠올리니 입가에 웃음이 절로 그려졌다.
“하하…….”
조금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인해 습기를 머금은 달큼한 향이 공기 중에 퍼지자, 서경은 몽롱한 기운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가득히 차오르는 능금 향이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 헛웃음이 났다.
향을 맡으며 마음을 달래고 아래를 달랬으니,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문지헌이 있는 것은 위험했다. 그와 한번 닿고 나니 욕심이 계속해서 자라난 까닭이었다.
차라리 졸도를 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탈탈 털어 넣었다. 전에는 잘만 끊어지던 정신이 참으로 질기기도 했다.
자꾸만 문지헌에게 시선이 갔다. 단침이 고여 여러 차례 삼켜 보아도 또다시 한가득이었다.
닿고 싶었다.
살짝, 살짝은 괜찮지 않을까. 닿았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만.
자꾸만 눈이 가고 손을 움찔거리기를 수어 번, 결국 서경은 내리 감겨 있는 그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이 천천히 다가갔다. 닿지 못하고 근처만 한참 배회하다가 거둬들이려 할 때쯤, 덜컥 손목이 잡혔다.
“아…….”
조용히 감겨 있던 문지헌의 눈꺼풀이 벌어지며 짙고 깊은 눈동자에 서경이 맺혔다.
“만지려면 제대로 만지게.”
“아니, 난 만지려던 것이……. 비, 빗물이 튀었네. 열린 창 아래서 그러고 있으니…….”
“빗물?”
“……그래, 빗물. 깼으니 이 손 놓고 직접 닦게.”
서경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지헌은 손목을 은근하게 당겼다.
“경이 네가 닦아 줘야지. 난 어디에 튀었는지 안 보이니 말이야.”
부여잡은 손길은 조금도 세지 않았으나 서경은 벗어날 수 없었다.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옳았다. 천천히 옮겨 간 손은 기어이 그의 눈가에 닿았다.
“……그럼 내가 도와야지.”
“고맙네.”
날이 선 듯 끝이 날렵한 눈매를 조심스레 더듬는 내내 문지헌에게 잡힌 손목이 뜨거웠다. 속눈썹에 손가락이 닿아 잠시 감겼을 때를 빼고는 또렷이 뜬 눈이 서경을 지켜보았다.
“뺨이랑 입엔 안 튀었나?”
“안…….”
“젖은 것 같은데.”
“…….”
“자네 얼굴 아니라고 대충 하지 말고.”
애초에 비가 튀었다는 것은 변명이었으나 실지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인지. 문지헌도 꽤 취한 듯했다. 아무렴 어떤가. 앞으로 다시없을 순간임은 틀림없었다.
서경은 피부의 결을 느끼며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물기를 훔쳐 내듯, 그의 뺨을 엄지로 눌러 문질러 내고 찬찬히 내려와 입가에서 멈췄다.
이 입으로 ‘경아.’ 하며 소리를 낼 때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알았다.
홀린 듯 입술 중앙으로 옮겨 간 손가락이 몇 번이고 틈새를 만지작거렸다. 서경이 자신이 욕구에 전, 볼썽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을지 염려되어 고개를 숙이려는 때였다.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며 붉은 혀가 밀려 나왔다.
“아.”
두 손가락 사이를 가르고 길게 핥아 낸 혀가 입술에 놓인 손가락을 들어 올리곤 간질이듯 움직였다.
“지헌, 읏……!”
“가만히 있게.”
문지헌이 잡은 손목을 더욱 끌어당기자 서경의 길고 얇은 손가락이 입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츠읍, 츱. 질척하고 야릇한 소리가 방 안을 떠돌았다. 끝을 세운 혀가 서경의 손가락을 꼼꼼히 적시고 흥건해지면 오므라든 입술이 타액을 쭉 빨아냈다.
“당과를 손으로 집어 먹기라도 하였는가.”
농락당하고 있는 손과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 호흡까지 모두 멈춰 버렸다. 오로지 가슴만이 심하게 뛰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왜 이러는……. 제발 그만, 그만……하게.”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서경은 다른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문지헌이 대체 제게 왜 이러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주취로 인해 오른 열이 정신을 잡아먹은 탓인지, 졸도한 뒤에 꾸는 꿈속인지.
“경아.”
“…….”
“서경.”
“이제 돌아가게. 비도 그친 것 같고, 밤이 깊었…….”
“또 나를 자네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겐가?”
문지헌의 말에 서경은 주취가 모두 달아나는 듯했다. 여전히 잡혀 있는 손목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도망가지 마. 내게 한마디만 하게.”
“…….”
“도와 달라고 해.”
자네가 나를 무슨 수로 도와줄 수 있겠나. 서득제에게서 우리 모자를 구해 내기라도 할 텐가? 아니면, 내 더러운 마음에 동조라도 해 줄 것이야?
서경은 입 안에서 맴돌고 있는 말을 마른침과 함께 넘겨 버렸다.
“……이만 돌아가 줘, 지헌.”
* * *
문지헌은 갈림길에 위치한 마방에 도달해서야 달리던 말을 멈춰 세웠다.
“남은 방 있소?”
“위험하게 이 시간에 돌아다니고 그러시우? 방은 있다만 지은 밥은 다 떨어져서 식사는 못 드리는데, 괜찮으시겠수?”
“상관없소.”
“그럼 저 끝 방을 쓰시우. 소세 물은 문 앞에 둘 테니 쓰시구랴.”
잠이 오거나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으나, 오랜 시간을 달린 말 때문이라도 쉬어야만 했다.
서경이 향한 곳이 어딘지는 명확했으나 초조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행방을 알고 난 뒤 서둘러 뒤를 따랐지만 이미 격차는 꽤 벌어졌을 터였다.
문지헌은 편히 눕지도 않고 벽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이젠 눈을 감기만 해도 서경이 떠올랐다.
서경의 마음을 알게 된 건 일곱 해 전이었다. 경원관의 동기로 함께 학문을 닦으며 지낸 지는 5년이었고.
말수가 적고 유달리 희었던 서경은 사내놈들 사이에서 도저히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존재였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는 창백한 피부 탓에 서늘해 보이는 인상을 더욱 차갑게 느껴지게 해 선뜻 다가가는 이들이 없었다.
집안에 대한 소문도 한몫했다. 서씨 가문의 독자인 서경은 이미 오래전에 홍역을 앓아 명을 달리했다는데, 무덤을 헤치고 나오기라도 한 겐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얼굴에 없던 점이 생겼다는 둥, 그 해에 죽은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 혼을 모조리 삼키고 살아난 거라는 둥. 사내들답지 않게 서경이 없는 자리에서 떠들어 대는 꼴이 우스웠다.
문지헌은 딱히 서경에게 관심 같은 건 없었다. 기울어져 가는 가세에 겨우겨우 들어온 경원관이기에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여유 따위 없었으므로. 그저 개국 공신 가문이라는 낡디낡은 영예에 흠집 내지 않으려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학업에 정진하기에 바빴다.
고작 몇 마디 나누었을 뿐, 이렇다 할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서경과의 관계가 뒤집힌 것은 바깥일마저 삼가야 할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저잣거리에서는 삼복더위를 물리치는 잔치가 한창이었다. 궐에서 귀한 얼음 창고를 개방한 덕에 생도들도 모두 몰려 가 경원관은 텅텅 비어 있었다.
훈련용 지푸라기 인형이나 죽대는 당시 문지헌의 집에서는 구할 수 있는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관에선 훈련을 위한 것이라면 뭐든 한계 없이 제공되었으므로 문지헌은 모두가 집에 돌아간 어스름한 시간까지 남아 있다 가곤 했다.
그날도 해시가 가까워질 때까지 홀로 칼을 휘두르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훈련관을 나섰을 때였다. 서고 쪽에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기름 먹인 심지야 밤새 타오르지는 않을 테지만 귀중한 서책이 많은 곳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옮겼다.
더위가 장해 풀벌레마저 울지 않는 고요한 시각에 귀를 간질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희미해 창이 삐걱거리는 것 같았던 그 소리는 사람 목소리였다.
〈흐으…….〉
서경은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건지, 아무리 경원관에 남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불까지 밝혀 놓고 잔뜩 풀어져 있었다. 늘 허여멀겋던 낯이 발긋하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반듯한 미간이 살짝살짝 구겨지고 금방이라도 터트릴 듯 눈물을 가득 담은 붉은 눈가는 언젠가 서경을 가지고 떠들어 대던 놈들에게 일갈해 주었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물 위에 먹을 풀듯 어지러이 흐트러진 생도복과 당겨 안은 무릎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허벅지의 살갗이 화선지의 그림인 양 고왔다.
〈아, 하아…… 읏!〉
앞만 만져 대며 바르작거리던 서경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낮은 서탁 위로 몸을 기댔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생도복을 걷어 내자 제가 숨어 있는 곳에서 서경의 알궁둥이가 훤히 보였다. 저와는 달리 보송해 보이는 아래는 낯부끄러울 정도로 체모가 하나도 없었지만 그게 또 그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서경은 입 안으로 몇 번이고 넣어 축축하게 만든 손가락을 꽉 다물린 곳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터져 나온 소리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응, 지헌, 지헌아……!〉
사내가 수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이리도 회가 동할 일인지. 제 이름을 부르며 뒤를 쑤시는 서경이 더럽기는커녕 오히려 묵직하게 반응이 왔다.
여인만큼이나 고운 자태 때문인가, 평소 일자로 다물려 있기만 했던 입술이 저를 담아서인가. 그 어떤 것도 확실치 않았으나 제 무언가를 자극한 것은 틀림없었다.
서경이 파정의 여운에 고운 몸을 바들바들 떠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터질 듯 부푼 아래를 달래기 위해 세 번이나 수음해야 했다. 서경의 녹아 없어질 것처럼 달뜬 얼굴과 좁디좁은 밀부를 자신이 쑤시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래를 세우는 것이 몇 번이어도 어렵지 않았다.
그 이후로 서경이 하는 모든 행동에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절대 말도 붙이지 않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제 이름을 부르며 헐떡일 것을 생각하니 서경의 무감한 표정도 수줍게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서경이 하는 작은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된 건 금방이었다. 우습게도 서경의 말과 손짓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건 제가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여기며 그리 지냈다. 비역질은 손가락질받는 행위였으니, 친우로 지내며 시선 마주하고 가끔 스치는 손에 나 또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온기로 실어 보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비록 서경은 모를지라도.
한데, 서경이 천거를 했다. 간 이는 있으나 몇 해째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넘치는 곳으로.
나를 연모하는 것이 아니냐, 붙잡고 따져 묻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서경의 눈은 충분히 제 심정을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끝을 모르는 여각과의 대치 속에서 오로지 서경이 밀어낸 연유만을 곱씹으며 버텼다.
창에 꿰이고 칼에 베이는 것을 수도 없이 마주하니 비역질로 받을 손가락질 따위는 두렵지 않게 되었다.
* * *
“청은국으로 가시는 게요?”
“그렇소.”
“조금 돌아가는 길이겠지만 이 윗길 말고 저쪽으로 돌아가시우. 거기도 마방은 있으니까.”
문지헌은 대충 요기를 끝내고 한쪽에 묶여 있던 말을 끌어왔다. 높다란 산머리 뒤로 어스름하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고맙지만 길은 나도 알고 있소. 어느 정도 쉬었으니 윗길에 있는 마지막 마방까지는 괜찮을 것이오.”
지금까지처럼 달리지는 못하겠지만 진로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여각을 토벌하기 위해 이 근방을 한창 돌아다닐 때 요긴하게 쓴 길이기도 했기에 익숙한 곳이었다. 어디를 지나야 빨리 도달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데 돌아갈 연유는 없었다.
“말을 생각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우. 위험해서 그러는 게지. 지금 윗길로 가 봤자 마방도 없을 거란 말이우.”
“그게 무슨 소리요?”
“아, 얼마 전에 여각 놈들을 죄 몰아내지 않았수? 살 만하다 싶었는데 웬 시정잡배 같은 것들이 여각의 후손이라는 둥, 신여각이라는 둥 몰려다니고 있수. 막혔던 곳이 뚫리면서 봇짐장수들이 청은국을 오가기 시작했는데, 경계가 애매한 곳에 있다가 봇짐을 턴다 합디다. 털어다가 이쪽저쪽에 팔아먹는다고 그랬수. 주머니 사정 안 봐준다고도 들었고. 돈만 된다면 사람도 팔아먹는다고 했으니, 하는 짓이 여각보다 더하지.”
청은국으로 향하는 길은 이곳에서 갈라졌다. 만약 서경의 일행이 이곳에 머물렀다면.
“혹 얼마 전 곱상하게 생긴 사내가 여기에 묵지 않았소? 눈가에 점이 두 개라 알아보기 쉬웠을 것인데. 일행도 둘은 있었을 거요.”
주모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안면이 익은 사람이었고, 여각이 자취를 감추게 된 이후로는 문지헌이 처음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놈들을 싹 밀어 버렸다지만 아직까진 아무나 이곳에 오지는 않수. 그쪽도 오랜만에 보는 타지인이니 윗길에 대해 모를 거 같아서 말해 주는 거유.”
이곳에 들르지 않았다면 서경은 옛날부터 책사들이 이용했던 길로 향했을 공산이 컸다. 바로 아래엔 제대로 된 마방이 있었으니 그곳에서 묵고 윗길의 마방으로 넘어갔을 테다. 아닐 수도 있었지만, 아니었으면 좋을 테지만.
“고맙소.”
문지헌은 말에 올라 윗길로 고삐를 틀었다.
* * *
“이 늙은이는 뒈졌소, 임 형.”
“그러니 내가 힘 조절 잘하라고 하지 않았냐, 대수야.”
“툭 쳤소, 툭.”
“근데 골이 빠개지는 소리가 났다고?”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잃었던 서경은 왁자한 소리에 눈을 떴다. 뒷골이 얼얼해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몇 번 깜빡인 끝에 눈에 맺힌 건 봇짐장수들이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던 이들이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지.
청은국으로 가기 위해 두 명의 일행과 함께 말을 달렸고, 예전 책사들이 가던 길이라기에 김태정도 아는 듯해서 봇짐장수들과 함께 윗길을 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끊긴 정신이었다.
“됐다. 썩기 전에 내다 버려라, 냄새나기 전에. 옷은 잘 챙겨 두고.”
김태정은 이미 명을 달리한 듯 늘어져 있었다. 일격에 죽었는지 다 감기지 못한 흐리멍덩한 눈과 마주쳐 서경은 흠칫했다. 비단 도포가 벗겨지고 속고의만 남겨진 김태정은 바닥에 질질 끌려가 마차에 실렸다. 저것 역시 짐수레인 줄로만 알았는데 해친 사람들을 싣는 용도였던 모양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내들은 서경과 일행의 짐을 펼쳐 놓고 쓸 만한 것들을 추려 내는 중이었다.
“읍……!”
멀지 않은 거리에 일행인 호위가 보였다. 포박당한 채 입에 천까지 물려 있는 그는 수차례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성한 곳이 없었다. 제법 큰 체구에 옆구리에 찬 긴 칼이 믿음직스러웠다고 생각했으나 순식간에 여러 명이 덮치는 것에는 이길 재간이 없었을 터였다.
“얘기 좀 해 봤나? 이 신여각의 무리에 함께하겠냐고?”
“끝까지 싫다고 합디다. 더운밥 먹고 등 따시게 자란 놈이라 겁 좀 주면 냉큼 알겠다고 할 줄 알았더니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보아하니 값을 꽤 쳐 줄 것 같은데, 저놈은 청은국에 팔아.”
“성한 상태로 팔아 볼까요?”
“나중에 배때기에 칼 맞고 싶으냐? 좀 덜 받더라도 하던 대로 해.”
“예.”
주먹밥을 양손에 들고 먹던 대수가 남아 있던 것을 주둥이에 다 처넣고 허리춤에 있던 단도를 꺼냈다. 잘 벼려진 날을 손끝으로 훑으며 호위에게 다가가자 다른 사내들이 달라붙어 묶여 있는 다리를 붙들었다.
“읍! 으으…… 읍!”
동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시퍼런 칼날이 호위의 발뒤꿈치를 베어 냈다. 후드득 피가 쏟아지고 호위가 고통에 울부짖었다. 뜨거운 공기에 역한 피비린내가 섞여 금세 마구간을 흠뻑 채웠다.
서경은 구석에 널브러진 채 사내들의 만행을 지켜보았다. 공포로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꿈지럭거려 봤지만 단단하게 묶인 탓에 쓸린 살갗이 따가울 뿐, 매듭은 헐거워지지 않았다.
“깼네?”
짚 더미 위에 앉아서 이리저리 지시하던 사내, 임씨가 마지막으로 서경에게 눈길을 주었다. 입꼬리 한쪽에 길게 찢긴 흉을 가진 그가 자리에서 벗어나 서경에게로 다가왔다.
“으……!”
몸을 뒤틀며 뒤로 물러나려는 서경 앞에 쪼그리고 앉은 임씨가 재미있다는 낯으로 웃자 상처가 벌어져 누런 이가 드러났다.
“이건 비싸 보이네.”
“확실히 있는 집 놈 같지 않소?”
“낯짝 좀 봐라. 홍월의 관리 놈들이 좋아하게 생기지 않았냐.”
“그 비역질하는 놈들 말이오? 양물 달린 놈들끼리, 더러워 죽겠소.”
“맛도 못 본 놈이 뭘 알어.”
“그러는 형님은 보셨소?”
임씨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서경을 찬찬히 뜯어봤다. 핥아 올리듯 느릿하게 옮겨 간 시선이 붉어진 눈매와 요염하게 위치한 점을 쓸고 목에 닿았다. 서경은 소름이 온몸에 내달리는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봤지.”
“맛 좋수?”
“가끔 먹으면 별미다.”
“그 별미 나도 한번 맛봐야지.”
기대한다는 양 손바닥을 맞대고 비벼 대는 저 손이 금방이라도 앞섶을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천을 물고 있는 서경의 입술이 덜덜덜 떨렸다.
“관리 놈한테 비싼 값에 팔아야 하니까 상하게 하면 안 돼. 각화를 써라.”
“그게 사내놈한테 통한단 말이오?”
“뒤가 젖지는 않지. 하지만 앞으로 질질 싸게 될 것이다. 기름 같은 건 필요도 없을 만치 흥건하게 말이다.”
바로 저렇게.
사내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대수의 시선이 옮겨 가는 곳으로 서경의 불안한 눈도 따라갔다. 그곳엔 서경의 일행보다 먼저 잡혀 온 사람이 죽은 듯 늘어져 있었다. 공포로 인해 바지 앞을 잔뜩 적신 채로.
“참으로 저 정도를 싼단 말이오?”
“안쪽을 잘만 쑤시면 더한 것도 볼 수 있지.”
사내는 집게와 엄지로 원을 만들어 반대편 손가락을 찔러 넣는 시늉을 했다. 끝이 닿을 정도로 쑤욱 넣은 뒤 반 바퀴 돌리는 손짓에 사내와 대수가 낄낄거렸다.
“역시 임 형, 먹어 본 사람답소.”
“해가 저물면 출발해야 하니 서둘러라.”
대수가 솥뚜껑 같은 손을 뻗어 서경을 어깨에 들쳐 멨다. 바둥거리며 다리로 가슴팍을 차 보려 해도 단단히 붙들려 있어 소용없었다. 마구간을 나와 흙바닥을 지나는 듯하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읍……!”
“잠시만 계시오. 금세 기분 좋게 해 줄 테니.”
서경은 호되게 부딪혀 온몸이 욱신거리는 아픔을 참으며 방구석으로 기었다. 나무로 짠 작은 장을 뒤적이는 대수의 뒷모습을 보며 날카로운 것이 없는지 눈을 굴려 보았으나 그의 허리춤에 묶여 있는 단도뿐이었다. 그것 또한 저놈이 묶인 팔을 풀어 주어야만 쓸 수 있을 테니 무소용이었다.
“어떠시오. 향이 참으로 좋지 않소?”
그들이 말했던 각화라는 것을 태웠는지 화로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퍼지는 하얀 연기의 줄기가 손에 만져질 듯 선명했다.
서경은 향을 맡지 않으려 보료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 모습을 본 대수가 요란하게 웃어 댔다. 자신은 향을 피하려 코와 입을 비단 천으로 가린 채였다.
“양반 나리, 아까 임 형의 말을 듣지 못했소? 시간이 없다고 했잖소.”
대수가 다가와 서경의 상투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고개가 뒤로 꺾이고 입을 막고 있던 천이 벗겨지자 각화의 연기가 순식간에 코와 입으로 파고들었다.
“헉…….”
점막에 끈덕지게 달라붙는 향이 역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디달았다. 입 안엔 순식간에 침이 고이고 원치 않았으나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뜨거운 물이 담긴 목간 속에 있는 것처럼 온몸에 열이 오르고 내뱉는 숨이 축축해졌다.
“이거이거, 눈이 벌써 맛이 갔네. 처음이면 반응이 이렇게 빨리 올 리가 없는데. 설마 양반 나리, 경험 있는 거 아니오?”
서경의 도포를 젖히고 바지의 매듭을 풀어내는 대수의 웃음소리에 비웃음이 역력했다.
“……흐으. 하…….”
“고매하신 양반께서 어디서 여각의 꽃을 보셨으려나? 이건 본디 여각의 우두머리가 마음에 찬 여인한테 주었던 꽃인데 말이오. 그 향을 맡으며 색사를 하면 상대가 각인이 되어 버리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만 발정하게 하는 지독한 꽃이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오로지 한 년만 쑤시는 게 가당키나 하느냔 말이오.”
울컥. 끓어오르는 자극을 참지 못한 서경이 보료 위에 한차례 정을 뿜었다. 수치심을 느낄 새도 없이 두 번째 사정감이 찾아왔다. 너무도 빠르게 치닫는 절정이 힘겨워 이를 악물고 참아 봤지만 향을 들이마실수록 몸은 녹진하게 풀려 갔다. 믿을 수 없이 빠른 두 번째 사정이 버거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우리 임 형이 찾아냈지. 뿌리까지 뽑아낸 각화를 잘 말려 불에 태우면 향이 몇 곱절은 세진다는 것을. 오로지 한 사람이고 자시건 간에, 누구든지 박아 달라 애원하게 만드는 약이 된다는 것을 말이오.”
“이거 놔. 으, 놓으란, 말이다…….”
서경이 다리를 붙잡는 대수의 손을 미약한 힘으로나마 떨쳐 내려 몸부림쳤다. 몸이 돌려지자 부푼 성기가 보료에 닿아 자극을 받은 탓에 묽은 액을 소변인 양 흘려 댔다. 손으로 서경의 정을 닦아 낸 대수가 바지를 벗고 꺼낸 제 물건에 치덕치덕 덧발랐다.
“양반 나리가 앞으로 누굴 받아 내던 이 대수를 잊지 못할까 걱정입니다그려.”
“……놔! 지헌, 지헌아…….”
“지헌? 계집 이름 같지는 않은데, 나리네 서방 이름이오? 비역질을 해 본 경험이 있으면 말하지 그러셨소!”
양손에 허리가 붙들려 위로 들리자 뒤로 묶인 팔 때문에 서경의 어깨와 뺨이 바닥에 짓눌렸다. 힘을 주지 못하는 탓에 자꾸만 휘청이며 내려앉으니 까슬한 바닥에 얼굴이 온통 긁혀 생채기가 났다.
〈도망가지 마. 내게 한마디만 하게.〉
〈도와 달라고 해.〉
이렇게 망가지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팔려 가게 되어 영영 못 보게 될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제발 도와 달라고 했을까.
어떻게든 어미를 구해 내고 서득제로부터 벗어나, 서경이라는 이름 따위 버리고 무명으로 밭이나 갈며 살게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내가 역겹지 않으면, 해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놈의 주령구 놀이나 하면서 밤새 술잔을 기울이자고.
서경은 눈물을 쏟아 내며 앞으로 닥칠 일을 견뎌 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어미가 살아 있으니 혀 깨물고 죽을 수 없었기에 버텨야만 했다.
살갗에 불쾌한 덩어리가 닿는 느낌에 입술을 씹었다. 여린 살이 금세 썰려 나가고 비릿한 피가 잇새로 흘렀다.
“힘 빼시오, 양반 나리. 자…….”
“대수야! 커헉!”
갑자기 사내를 부르는 큰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장지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임 형!”
배에 칼이 꽂힌 임씨가 연신 피를 뱉어 내고 있었다. 곧이어 따라 들어온 가죽신에 서경의 시선이 닿았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발이 곧장 서경에게로 다가와 무언가를 덮어 주었다.
서경의 시야가 가려지자마자 비명이 연달아 터졌다. 무언가 베이고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긴장이 풀린 서경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벌써 엿새째네. 별일 없는 게 맞는가?”
문지헌은 살이 내린 서경보다 비리비리한 의원을 못마땅한 듯 채근했다. 이미 제 깊은 상처도 돌본 의원인지라 믿을 만한 이임을 잘 알지만 서경의 일이라 이토록 못난 태도를 보였다.
“그간 뭉쳤던 기운이 풀어지고 있습니다. 가슴에 맺힌 울혈만 나아진다면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더 좋은 약이 있다면 구해다 주게. 아니, 내가 갈 테니 알고 있는 걸 말해 주면…….”
“장군, 말씀드렸듯 심중에 자리한 울혈은 약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분으로 보아, 하루 이틀 견딘 세월이 아닌 듯하니 이 정도면 많이 나아진 게지요. 참고 지켜봐 주시는 것이 최선입니다.”
문지헌은 의원을 보내고 서경의 곁에 앉았다. 뺨에 긁힌 자국과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입술까지 모두 아물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상처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쓰렸다.
“……경아.”
방법이 잘못됐었다. 서경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음에도 그 무엇 하나 선택하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다섯 해 만에 다시 서경을 보았을 때, 여전히 연모를 담고 있는 시선에 안심하면 안 되는 거였다. 당장 목을 베어 죽여도 모자랄 인사에게 어떤 취급을 받으며 지내 왔는지 알게 되었을 때, 바로 그 나락 같은 곳에서 꺼내 왔어야 했다.
〈또 나를 자네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겐가?〉
서경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는데. 마음이 기울어졌다고 해서 승자인 듯 굴며 몰아세우는 머저리 같은 짓을 했다. 적군의 심리와 연모하는 이의 마음을 같은 선상에 놓았다는 것 자체가 패인이었다. 하마터면 서경을 영영 잃을 뻔했으니 친우의 자격도 박탈해야 함이 옳았다.
하나, 이제 두 번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서경은 그로부터 꼬박 아흐레가 지난 뒤에야 눈을 떴다. 그동안 문지헌은 한시도 떠나지 않고 서경의 옆에서 머물며 구완에 힘썼다.
오랜 시간 누워 있었음에도 어느 한 군데 무른 곳 없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은 문지헌의 보살핌 덕이라는 의원의 말에 서경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을 뿐이지만 그마저도 기뻤다.
“이제 묽은 죽은 질릴 거 같아서 고기를 넣고 만들어 봤네. 소화에 문제없을 것이라고 하니 찬찬히 먹어 봐.”
“고맙네.”
창백했던 서경의 얼굴에 차차 혈색이 돌았다. 말수가 적어진 것이, 경원관 시절로 돌아간 듯했으나 뭐든 괜찮았다. 살아 주었다는 그 자체로도 서경은 큰일을 한 것이었으니.
상투를 내린 서경은 그의 분위기와 몹시 잘 어울렸다. 올린 머리에 갓을 얹고 도포의 끈을 조인 모습도 그러했으나, 아등바등 버티기 위해 목숨 줄을 조였던 것만 같아서 애잔했다.
문지헌이 그 시절의 서경에게 눈이 갔던 것은 서고에서의 일도 일이었지만, 어딘가 도움을 바라는 애처로운 모습이었기 때문인 듯했다.
“물도 마시게.”
“…….”
서경은 문지헌이 건넨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천천히 물을 넘겼다.
“지헌.”
“응, 말하게.”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는가.”
갑작스러운 물음에 식후 탕약을 건네려던 문지헌의 손이 멈칫했다.
“경아, 그게.”
“내가 서득제의 집이 아닌 자네의 집에 이리 오래 있었는데도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것이 말이 안 돼. 괜찮으니 말해 주게. 자넨 알고 있지?”
서경의 눈은 일렁이는 기색 하나 없이 잔잔했다. 어떤 대답이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듯, 앞으로 마주 잡은 손은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명을 달리하셨네.”
“그래……. 언제?”
“10년, 정도 되었다고 들었네.”
여각을 토벌하고 돌아온 문지헌은 다른 일은 제쳐 두고 서씨 가문의 풍문부터 조사했다.
겉으로는 인자한 기운을 풍기고, 때가 되면 곳간을 풀어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만들어 내고 있던 서득제였지만 대문 안쪽의 사정은 달랐다. 그러니 얼마 들쑤시지 않아도 서득제의 몰락을 바라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서경의 집을 오가며 자주 보았던 명이 아범에게 운을 띄우자 불안한 눈을 굴리던 그는 곧 다른 이를 데려왔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짐승이 따로 없었습니다. 사연 있는 여노비들을 안쓰럽다고 몫을 후하게 쳐서 데려와서는 아랫도리 휘두르는 용도로 썼습니다. 눈먼 아비 약값으로 팔려 온 말자나, 어린 동생을 동첩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필요한 돈을 제 몸값으로 대신한 난이까지 모두요. 노비 값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후하게 쳐 주었으니, 그 어린 것들이 강제로 한다 한들 한마디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기정은 서득제에게 끌려가는 어린 여노비를 뒤로 숨겼다는 이유로 멍석말이를 당한 노비였다. 그 일로 한쪽 눈을 잃고 다리를 절게 된 기정은 문지헌이 굳이 돈을 찔러 주지 않아도 서득제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불었다.
서득제의 부인인 염씨가 광증을 앓았다는 대문 안쪽의 비밀 역시 금세 털어놓았다. 5대 독자이자 적자인 서경을 홍역이 아닌 실족사로 잃은 뒤, 그 얼굴을 꼭 닮은 한 얼자를 죽은 제 아들인 양 품었다는 이야기는 집안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를 이야기였다.
〈동이는 염씨의 몸종이었던 여정의 아입니다. 서득제를 빼쏜 얼굴은 눈가의 점을 빼고는 도련님과 쌍둥이라고 할 만큼 똑같았습니다. 가문이 휘청할까 도련님이 죽은 것도 쉬쉬하던 서득제가 부인까지 광증을 앓는다는 풍문이 새어 나간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을 겁니다. 해서, 얼자인 동이를 서경 도련님인 양 들어앉히고 여정은 마을 밖으로 쫓아 버렸습니다.〉
종종 노비들이 지내는 거처로 도망 왔다던 서경은 어미를 그리며 곧잘 울었다고 했다. 서득제나 염씨 앞에서 여정을 찾으면 그날로 어미의 목숨은 없는 것이 되니 기정을 붙들고 소리 없이 울음을 토하다가 돌아갔다고.
〈하지만 여정은 얼마 못 가 죽었습니다. 서득제가 처음 몇 번은 다른 노비를 시켜 여정에게 묵은 보리와 돈 몇 푼을 전했는데, 마지막으로 약첩을 함께 보낸 뒤로는 발길을 끊으라고 했답니다. 약첩이 한약재 냄새가 아닌 쿰쿰한 냄새였다고 하니 보나 마나 쥐약이었을 겁니다.〉
기정이 알려 준 곳은 산 너머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어린 서경의 걸음으로도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지척에 어미를 두고도 죽은 줄도 모르고 지냈을 서경을 생각하니 문지헌은 당장에 서득제를 칼로 베어 버리고 싶었다.
이 모두 서경이 문지헌을 피하려 사헌부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알게 된 일이었다.
문지헌은 언제든 그를 서득제의 손아귀에서 빼낼 수 있었음에도, 서경이 제 마음에 눈을 돌리지 않길 바라는 헛된 욕심 하나로 각화가 담은 주령구나 던져 주었던 것이다.
“10년…….”
서경이 맞잡은 손등 뼈가 도드라졌다. 문지헌이 다가가 손을 얹자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원하면 언제든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데려다주겠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으로 모셨어. 물론 서득제는 모르는 일이니 염려 말고.”
“……고맙네.”
“그러려면 먼저 자리 털고 일어나야지. 오늘도 산책할 텐가? 청명하니 하늘이 높…….”
“지헌.”
서경이 몸을 일으키려던 문지헌의 소매를 잡아 세웠다. 조용히 올려다보는 시선에 문지헌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말하게.”
“내게 궁금한 것이 없는가?”
“있네.”
망설임 없는 문지헌의 즉답에 서경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어머니에 대해서 말할 때도 흔들리지 않았던 눈동자가 요동치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런데 왜 묻지 않아.”
“가뜩이나 힘든 사람한테 물어볼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되어 그러지. 그러는 자네도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지 않나?”
“…….”
“천천히 하게. 말하고 싶을 때, 언제든. 곁에 있을 테니까.”
서경은 또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서경을 잃을 뻔했던 문지헌은 서득제를 벌하는 것을 더는 미루지 않았다. 서경을 끔찍이 아끼는 대사헌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사지를 찢어 놓아야 속이 시원할 놈이었으나, 서득제에게 있어 멸문지화보다 심한 형벌은 없을 터였다. 서경 역시 그럴 테고.
서득제가 교수형에 처하던 날, 문지헌은 서경과 함께 여정의 묫자리에 다녀왔다. 완전한 자유를 알리기 위해서.
“여혜…….”
“혜야.”
“영…… 입에 붙지는 않는 것 같구나.”
“하나, 자네에게 잘 어울리는걸.”
어미의 이름에서 딴 여씨는 사정을 딱하게 여긴 왕이 친히 붙여준 것이었다. ‘혜’라는 이름 또한.
진즉에 서경이란 이름을 버리고 싶어 했던 그는 어색하게 발음하며 웃음 지었다.
“지헌.”
“응, 혜야.”
“…….”
전부터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알았으나, 여혜로 바뀌고 나서는 반응이 더욱 두드러졌다. 부드러운 빛의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는 여혜를 볼 때마다, 문지헌은 만족스러운 반응이라는 듯 낮게 웃었다.
여혜는 원해서 오른 자리가 아닌 사헌부 장령은 사직을 원한다며 관복까지 반납하고 돌아왔다. 하여,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진 그는 한결 편해진 차림으로 퇴궐한 문지헌을 맞이했다.
건강을 회복한 후로 함께 석반을 들고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아졌다. 문지헌은 여혜가 술을 꼴딱꼴딱 넘길 때마다 울렁이는 목울대에 시선을 뺏겼다. 목 넘김이나 손놀림 하나, 느릿하게 움직이는 눈꺼풀만 봐도 짐승인 양 회가 동했다.
특히나 흑단 같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넘겨 묶고 먹빛의 야장의를 입은 날은 덜컥 손목이라도 잡고 싶어 안달이 났다. 서고에서 본 흐트러진 모습이 떠오르는 까닭이었다.
“말해 보게.”
문지헌이 작게 웃으며 재촉하니, 여혜의 품에서 붉은 주머니가 나왔다.
“자네야말로 말해 보게.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던 것, 기억하나?”
“……하지.”
“신여각이라며, 그저 시정잡배 같았던 놈들에게 끌려갔을 때 발정하는 향을 맡았네. 그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많이 옅을 뿐 이것과 흡사한 것 같아서 말이야. 내 말, 틀렸는가?”
위로 비죽 올라가는 눈이 제법 매서웠다. 주머니에서 주령구를 꺼내어 상 위에서 굴려 대며 고개를 까닥이는 여혜의 모습에 문지헌이 술을 크게 들이켰다.
“여각민들이 하는 말이, 곁에 두고 싶은 이와 함께 이 주령구로 놀이를 하면 마음이 통한다고 하지 않던가…….”
“각화인 것을 참으로 몰랐다고?”
“……용서해 주게.”
허. 여혜가 크게 헛웃음 소리를 내더니 주령구를 문지헌에게 내밀었다.
“그래. 그렇게 원하던 주령구 놀이나 해 보자고. 먼저 하시게.”
서슬 퍼런 여혜의 표정에 문지헌은 못 이긴 척 주령구를 굴렸다. 손에서 쏟아져 나온 주령구는 데굴데굴 굴러 각각 ‘얼굴 간지럼 태워도 참기’와 ‘석 삼(三)’에서 멈췄다.
“참거나 술 석 잔이네.”
여혜가 몸을 일으켜 전에 문지헌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상체로 기울였다. 뒤로 살짝 물러난 문지헌이 팔을 뒤로 뻗어 몸을 받치고 다가오는 여혜의 얼굴을 응시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긴 여혜가 입술을 내렸다. 닿을 듯 말 듯, 문지헌의 귓가에 입술을 댄 여혜가 입을 벌렸다 오므리며 귓불을 간질였다. 내뱉는 호흡에 열기와 고소한 곡주의 향이 섞였다.
깎아지른 턱선을 타고 내려온 여혜가 입술 앞에서 고개를 떼자, 문지헌이 낮은 숨을 토했다.
“한 번은, 참은 거지?”
“제법이네. 하지만 아직 두 번이 남았다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지헌의 입술을 물었다. 말캉하고 따뜻한 점막이 굳어 있는 아랫입술을 희롱했다. 찰떡을 먹는 듯 오물거렸다가 좌우로 비비며 간질이자 바닥을 디딘 문지헌의 손이 움찔거렸다.
이윽고 혀를 빼내어 틈새로 천천히 밀어 넣자 문지헌이 침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여혜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문지헌의 고개가 기울어지며 혀를 삼켰다.
“으읏……!”
문지헌이 몸을 지탱하던 한 팔을 뻗어 여혜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입술을 벌려 두꺼운 혀로 여혜의 혀를 휘감고 빨아들였다. 입 속 천장을 간질이자 이번엔 여혜에게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바싹 몸을 붙이고 혀를 얽자 습윤한 소음이 샜다.
입술을 뗀 문지헌이 술을 연거푸 두 잔 들이켰다.
“미리 진 것으로 하지.”
여혜를 당겨 안은 상태로 몸을 일으킨 문지헌이 보료가 깔린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여혜의 눈가와 뺨에 연신 입을 맞췄다.
“주령구 놀이 아직 안 끝났네!”
“내가 다 졌어.”
“하으…….”
여혜를 눕힌 문지헌이 하얗게 뻗은 목을 베어 물었다. 무언가를 삼킬 때마다 울렁이는 이곳을 꼭 한 번 맛보리라 다짐했었다. 문지헌은 궁금했던 것만큼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야장의의 매듭을 풀자 드러나는 쇄골을 따라 입을 맞추며 흔적을 남겼다. 하얀 설원에 동백이 피듯 물드는 것이 기꺼웠다.
“혜야.”
“응…….”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했던 것 말이야.”
문지헌이 여혜의 얼굴 가까이로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오래전부터 연모했어. 여혜, 곁에 계속 있게 해 주겠나?”
맞닿은 서로의 가슴이 크게 울렸다. 들킬까 염려했던 것이 언제였는지 무색하게 빠르게 두드려 대는 여혜의 고동 소리가 문지헌에게 전이됐다. 여혜는 서서히 찾아오는 흥분에 그러쥐고 있던 옷깃을 놓고 문지헌을 감싸 안았다.
“……이제 더는 도망하지 않겠네. 놓지도 않을 거야.”
“도망한다고 해도 또 찾아낼 테니 걱정 마.”
문지헌의 말에 미소 지은 여혜가 작게 속삭였다.
“여각의 우두머리는 평생 곁에 두고 싶은 이에게 각화를 주었다고 했네. 향을 맡으며 밤을 보내면 서로에게만 발정을 하는, 이른바 ‘각인’을 하는 모양이야.”
“그런 것 따위 없이도 잊지 못하게 해 줄게.”
* * *
엎드린 여혜의 자태가 오래전 기억에 남겨져 있던 것보다 아름다웠다. 그날과 같이 먹빛의 의복을 걸쳤으나 몸은 더 무르익어 있었다. 문지헌은 한참을 빨아 댔던 밀부에서 고개를 들었다.
“하아……. 그만, 이제 그만하게…….”
잔뜩 풀어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혜를 보니 문지헌은 당장이라도 제 것을 박아 넣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각화 같은 것 없이도 발정하게 하는 건 여혜의 몸 그 자체였다.
먹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은 하얀 화선지 같은 몸은 엉망으로 자국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가학심을 불러일으켰다. 손으로 벌려 쥐었던 엉덩이는 또 어땠는가. 붉게 이지러진 제 손 모양에 감탄하여 쥐고 또 움켜쥐지 않았나.
문지헌은 제 혀를 움쭉거리며 물고 놔주지 않았던 밀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미 맛보았던 주름을 천천히 훑고 축축하게 젖은 구멍으로 끝을 밀어 넣었다.
“아윽…….”
“아픈가?”
“아니……. 혀보다 단단한 게, 읏, 느낌이 이상해서…….”
“이따가는 더 이상한 게 들어갈 텐데, 괜찮겠나.”
문지헌의 말에 여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상한 탓에 두 개째 밀어 넣고 있는 손가락을 힘주어 물었다. 밀부에 갇힌 손가락이 그런 여혜를 나무라는 듯, 안을 긁어내자 허리가 튀어 올랐다.
제 손으로 수음할 적에도 이리 이물감이 들었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지헌의 손가락 굵기가 저보다 두껍다고 하여도 그저 손가락인 것을……. 그래도 아직까지는 참아 낼 만하였기에 깊게 호흡을 들이켜며 버텼다. 하나, 그것도 잠시뿐. 굵다란 손가락이 네 개가 되어 안을 후벼 대자 신음이 점점 커졌다.
“하으, 지헌…… 아, 많아…… 너무…… 아!”
“네 개도 부족할 것 같은데.”
“거짓말하지 말게!”
문지헌은 바지를 내리지 않은 채 손을 놀리고 있던 터라,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크기가 제 것보다는 월등히 큰 것처럼 보이긴 했으나 까 보기 전에는 어림짐작하지 않기로 했던 것인데.
아이의 주먹은 되는 크기의 귀두와 울퉁불퉁하게 기둥을 감싼 핏줄이 바지 속에서 나오자 여혜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동안 무엇을 상상하며 수음했던 것인지. 모두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힘 빼게.”
“안 들어가네……. 안, 읏, 돼…….”
“더 빼.”
찰싹. 매서운 손이 엉덩이를 내려치자 여혜가 놀란 틈을 타 가장 두꺼운 귀두가 구멍을 뚫었다. 문지헌의 말대로 손가락 네 개로도 무리인 크기였다. 작게 길을 내어 두었던 내부에 천천히 욱여넣자, 드드득 하며 살갗이 뻑뻑하게 밀리는 소리가 났다.
여혜는 점점 장기가 밀려 올라오는 감각에 손으로 뱃가죽을 더듬었다. 만져지는 것은 없었으나 분명 숨통 근처까지 압박하는 느낌이 선연했다. 그러다 불쑥, 판판했던 아랫배에 뭉툭한 것이 튀어나왔다.
“허억……!”
뿌리 끝까지 안에 쑤셔 넣은 문지헌이 여혜의 손 위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제 것이 여혜의 안에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들어갔네. 만져지지? 내 좆이 네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게 말이야.”
“그런 말…… 으아…….”
문지헌이 여혜의 야장의를 위로 밀어 올리며 드러나는 등에 잘게 입을 맞췄다. 완전하게 하나가 된 몸을 맞붙인 것이 몹시도 안정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호흡이 불안정한 여혜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문지헌은 온몸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귓등이 달아오른 것이 마치 타는 석양인 양 붉어서, 여혜의 가슴을 붙잡아 일으킨 문지헌이 잘 익은 귓등을 핥고 귓불을 입에 물었다.
“으응, 읏……! 기, 깊어. 아!”
엎드려서 찔러 들어왔던 좆이 몸을 일으키자 다른 곳을 눌러 댔다. 더 깊숙한 안쪽이 쓸리는 감각에 여혜의 허리가 저절로 들썩였다. 바짝 조이며 위아래로 허리를 놀리는 통에 여혜가 다칠까 움직임을 참고 있던 문지헌이 자극을 받았다.
“하……. 여기가 좋은가?”
슬근슬근, 아래에서 위로 골반을 움직이며 좆을 밀어 넣자 여혜의 하반신이 경련하듯 바들바들 떨렸다. 양팔로 여혜의 몸을 끌어안은 문지헌이 길게 허리를 물리자 구멍이 바짝 조여들었다. 오므라든 내벽을 가르듯 꾸욱 쑤셔 넣자 꽉 다물린 압박감이 좆 전체를 씹는 것처럼 전해졌다.
“……젠장.”
더는 참을 수 없어진 그가 허리를 튕기듯 쳐올렸다. 생전 처음 맛보는 자극에 눈에 불이 튀는 건 문지헌뿐이 아니었다. 여혜는 숨통이 턱턱 막혀 오는 느낌에 고통스럽던 것도 잠시, 내벽을 쉼 없이 긁어 대는 귀두의 감각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하, 윽, 아! 지헌, 악, 으읏……!”
차곡차곡 쌓인 쾌감이 순식간에 터졌다. 잔뜩 부풀어 오른 여혜의 성기에서 후드드득 정이 쏟아졌다. 사정하고 있는 와중에도 쑤셔 대는 내벽이 점점 더 예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물을 먹은 듯 부어오른 안쪽이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여혜의 몸을 돌려 눕힌 문지헌이 하얀 다리를 어깨에 올렸다. 그러곤 양팔을 눌러 잡고 들어 올려진 밀부에 허리를 빠르게 처박았다. 퍽퍽퍽. 아래가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하아, 하아…….”
“거기, 응! 지헌아……. 아학, 아, 으!”
사정없이 극점을 찍어 대는 허리 짓에 여혜는 비명 같은 신음을 질렀다. 간지러운 내벽을 멈추지 않고 긁어 대니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하며 복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사정감과는 다른 폭력적인 느낌에 눈물이 솟았다.
“아, 나…… 쌀 것 같, 하, 으읏……!”
주르륵. 여혜의 성기에서 맑은 액이 흘러나왔다. 내벽이 크게 조여들며 좆을 압박하자 문지헌도 침음을 흘리며 여혜의 안에 파정했다.
* * *
작은 창밖 달이 잘 보이는 곳에 기대어 앉은 문지헌의 품속에는 여혜가 안겨 있었다. 처음으로 몸을 섞은 두 사람은 목말랐던 짐승처럼 흘레붙었다. 서로를 마음에 두었던 기간이 오래인 만큼 방에 처박혀 서로를 탐한 지 며칠째였다.
“지헌.”
“응, 혜야.”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여혜의 뺨에 문지헌의 입술이 연거푸 내려앉았다. 보송했던 낯이 밤낮 없는 색사로 인해 달콤한 땀으로 끈적였지만, 두 사람 모두 아랑곳하지 않고 살갗을 대었다.
“사실 자네를 연모한 지 꽤 되었네.”
“알고 있어.”
“아니, 자네가 안 것보다 더 되었다는 말이야.”
“언제 말인가?”
“언제 같은가.”
여혜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문지헌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서고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수음했을 때는 연모한 지 얼마나 됐을 땐가?”
“……자네.”
“응.”
“……봤는가? 봤어?”
품에서 벗어나려 바둥거리는 여혜의 몸을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낮게 웃는 문지헌의 목소리에 여혜는 부들부들 떨었다.
“내일 당장 천계수에 몸을 던질 테니 그리 알게. 수치스러워 더는 살 수 없어.”
“나도 했으니, 부끄러워 말게.”
“……언제?”
“자네가 내 이름을 부르며 수음한 그날. 아래가 도저히 가라앉지 않아서 세 번이나 연달아 하는 바람에 살갗이 다 상했었네.”
문지헌의 말에 여혜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꾸했다. 하얀 살갗인 탓에 매번 잘도 익는 귓등이 이번에도 보기 좋게 익었다.
“그건 내가 본 게 아니잖나.”
“보여 줘야 마음에 찰 것 같은가?”
“아무래도, 그렇지.”
“하지만 서고에서는 좀 그런데. 이젠 경원관 생도도 아니고.”
“그렇다면 저잣거리 골목에서도 괜찮네.”
“……여혜.”
“나도 연모하네.”
여혜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문지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부드럽게 풀린 눈매가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이리도 다정하고 살가운 구석이 있었다는 것을 저만 안다는 것이 좋았다.
온 나라가 단잠에 취한 지금, 문지헌만은 그렇지 못했다. 하나, 앞으로 얼마간을 더 잠 못 이룰지라도 기꺼울 터였다.
〈각화(刻花)〉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