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미 알고 있었어요.
BTD 공금
"나, 할 말이 있는데..."
여느 때처럼 나를 오피스텔 앞까지 데려다준 동윤이 차를 세우고 머뭇거렸다.
"할 말이요? 해요."
처음 그에게 접근했던 이유까지 잊을 정도가 되어서 그런지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요즘 경호와 경희는 별다른 연락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두 사람 모두 우리 주변에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들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윤정 씨 부모님을 찾아뵙는 게 좋을까요?"
동윤이 말하면서도 연신 내 눈치를 봤다.
"네? 우리 부모님을 왜?"
당황해서 그를 빤히 보다가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내가 프러포즈를 받은 건가 싶어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가족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나야 이미 시시콜콜할 정도로 다 말했다.
"프러포즈를 먼저 해야 하는 건데... 내가 그런 거에 좀 약해서..."
동윤이 말끝을 흐리며 눈치만 봤다.
근사한 프러포즈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 그와 결혼까진 상상조차 한 적도 없었다. 그건 말 그대로 내가 숨기고 있던 비밀이 밝혀진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그러면 그가 결혼은 고사하고 나와 말도 섞기 싫어질 수도 있다.
"내가 많이 서두른 거죠?"
동윤이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한동안 잊고 있던 진실이 떠올라 괴로웠다.
언젠가는 동윤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경희도 입을 닥치고 있는 눈치인데 내가 먼저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탁!
갑자기 차 앞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우린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믿고 싶지 않지만, 경호가 주먹을 쥐어 양손으로 차 앞을 내려치고 두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미친 여자에게 걸려들더니 그도 마침내 이성의 끈을 놓은 모양이었다.
"동윤 씨는 그냥여기 있어요."
차마 동윤에게 험한 꼴은 보이기 싫어 차 문을 열고 급히 내렸다.
전화를 받지 않자 화를 참지 못하고 쫓아온 게 확실했다. 헤어지기 전에도 제멋대로이더니, 저 못된 버릇은 죽기 전에 고치지 못할 모양이었다.
"뭐야? 미쳤어?"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경호에게 다가가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래, 미쳤다. 너 같으면 내 여자가 다른 놈이랑 붙어먹는데 제정신이겠냐?"
적반하장도 정도가 있지, 경호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기 시작했다.
"내 여자? 네 여자는 그 미친 여자지. 당장 꺼져. 경찰 부르기 전에 당장 꺼지라고."
동윤이 차에서 내리기 전에 해결하려고 경호에게 다가가 빨리 가라는 눈짓을 했다.
양심은 없어도 여자에게 무식하게 손찌검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만나는 동안에도 지질한 짓은 많이 했어도 그렇게까지 형편없진 않았다.
"내가 다 정리했다고 했잖아. 잠시 미쳐서 그런 거라고 했잖아!"
경호가 꺼지기는 고사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뭐야?"
뒤에서 동윤의 목소리가 들려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모든 게 끝장이었다. 경호가 입을 놀리면 동윤이 내가 숨기고 있던 비밀을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런 식으로 알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운명이 가혹한 거라면 어쩔 수 없었다.
"당신? 남의 여자랑 놀아난 주제에 어디 감히 그따위로 입을 놀려?"
경호가 주먹을 쥐더니 당장이라도 날릴 기세로 나를 옆으로 밀어냈다.
더는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경희와 바람이 나서 발가벗고 있다가 연달아 걸리고도 뻔뻔했던 그에게 분노의 한 방을 날릴 차례였다.
퍽.
주먹을 아래부터 위로 들어 올려 그의 얼굴에 정확히 날렸다.
내가 때리고도 그렇게 큰소리가 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모자라 내 손이 얼얼할 정도였다.
"허억... 너, 너, 윤정이 네가..."
옆으로 날아가듯 몸이 들썩거려 휘청거리던 경호가 맞은 뺨을 잡으며 눈을 크게 떴다.
동윤도 놀랐는지 우리 옆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더는 속이고 싶지 않았다. 원래의 나를 보고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내가 뭐? 네가 이 남자 애인이랑 놀아났을 때도 내가 참았어. 아니, 오래 만나서 나한테 질릴 수 있다고,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돌아오라고 매달렸지? 그때 네가 뭐라고 했어? 다리 잡고 매달리는 나한테 뭐라고 했냐고!"
미친 여자처럼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경호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잘못? 네가 미안하다고 하면 나는 무조건 받아줄 거라고 믿었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는지 몰라도 내 앞에서 다른 여자랑 발가벗고 뒹굴다가 걸려서도 분위기 깨지니까 꺼지라고 한 놈이랑 다시 만날 생각 따위 없어. 이 남자 애인이랑 그랬을 때는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동윤이 옆에 있는 걸 알지만 말을 돌려서 하고 싶진 않았다.
"잠깐... 이 남자 애인? 경희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경호가 나와 동윤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래! 이 개자식아!"
있는 힘껏 경호를 옆으로 밀어내고 오피스텔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모든 게 허무하게 끝났어도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내가 벌인 일이니, 동윤에게 무슨 욕을 듣더라도 감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윤정 씨!"
오피스텔 로비를 걸어가는데 뒤에서 동윤이 달려와 내 어깨를 잡아 세웠다.
"이제 다 알았잖아요."
눈물이 툭 떨어질 것만 같아 눈에 힘을 주고 앞만 보며 말했다.
"지금 말할 기분이 아닌 건 알겠는데 나랑 얘기해야만 해요. 제발 나랑 얘기하고 들어가요."
동윤이 매달리며 말했지만, 그의 손을 밀어냈다.
경호와 추잡스러운 모습까지 보인 것도 모자라 비참해지고 싶진 않았다. 당연히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했던 내가 받아야 할 고통이지만 오늘은 싫었다.
"미안해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윤정 씨, 뭔가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
"됐다고요! 그래요, 내가 미친년이에요!"
다시 뒤따라온 동윤이 내 팔을 잡았지만, 힘껏 뿌리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고개를 돌리자 닫히는 문 사이로 동윤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몰라. 정말 나도 모르겠어."
내 앞에서 그가 사라진 뒤에야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 * *
될 대로 되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어차피 회사에 출근하면 친구들 외엔 내게 전화를 할 사람도 없어 휴대폰 전원을 껐다. 동윤이 전화를 할지 모른다는 조그만 희망조차 품고 싶지 않았다.
"윤정 씨, 누가 찾아왔는데 나가봐."
옆자리의 김 대리가 말해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누가요?"
시큰둥하게 말하자 김 대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건 그렇고 윤정 씨,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겠어."
나만 보면 잔소리를 늘어놓기 바쁘던 그녀가 보기에도 심한지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요? 아닌데..."
말끝을 흐리며 서랍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펴봤다.
정말 다크서클이 짙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환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하긴, 내가 제정신으로 일을 하는 것도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사람이 기다린다니까 뭐해? 비주얼이 장난이 아니던데 누구야?"
김 대리가 오랜만에 물고 뜯을 걸 찾았는지 조금 전과 달리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와 달리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동윤이라는 판단이 서자 이대로 축 늘어져서 바닥 밑으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그를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사무실 밖으로 걸어갔다.
"윤정 씨."
역시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중 비주얼이 좋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동윤 외엔 없었다.
"내려가죠."
회사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사무실 앞에서 망신은 당하기 싫어 그의 옆을 지나갔다.
어깨가 축 늘어져서 억지로 올리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차라리 그가 이런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서라도 적당히 비난하고 가기를 바라는 게 전부였다.
"걱정 많이 했어요."
동윤이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내려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미안해요."
무조건 미안하다고 빌어도 시원치 않은데 말은 삐딱하게 나갔다.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다행이네요."
나와 달리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가 비웃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내 남자를 빼앗은 여자의 애인을 만났다는 자체가 나도 믿기지 않던 일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거나 마찬가지인 그가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그가 그 카페에 있는 걸 알고 일부러 매일 드나들었던 거라고 몰아붙여도 할 말이 없었다.
"나한테 화났어요?"
회사가 있는 건물 로비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동윤이 물었다.
"아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고개를 저으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비난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비난하라는 마음으로 테이블 위만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가 지금 우리가 앉은 자리가 경희와 만났던 자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거지 같은 운명이 그때와 똑같은 자리에서 다시 개망신을 당하게 할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카페에 오지 않아요? 아니지, 왜 내 전화도 받지 않아요?"
동윤이 나를 유심히 보는 시선이 느껴져 더욱 고개를 숙였다.
"알면서 왜 물어봐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쭉 해요. 욕을 해도 어쩔 수 없는 거 알아요."
점점 목소리가 낮아져 내가 말하면서도 말끝은 들리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요."
조금 전과 달리 동윤이 웃음기를 빼고 담담히 말했다.
"네?! 뭘 알아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그가 싱긋 웃고 일어섰다.
내게 다가오는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막상 그가 옆에 나란히 앉자 다시 고개를 숙였다. 평소 욕이라고는 입에 담지도 않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으니 목소리를 낮춰 나를 비난하기 위해 옆에 앉은 거일 수도 있었다.
"경희랑 아는 사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동윤이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상욕을 하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경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것처럼 똑같이 하진 않겠지만 상욕은 하고도 남았다.
"경희는 말 그대로 그냥 친한 친구였어요. 아니지, 친구라기보다는 후배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나, 경희랑 그런 사이 아니에요."
동윤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지 말끝이 떨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윤정 씨가 오해한 거라고요. 혹시 계속 오해할까 싶어서 사진도 치운 거였는데, 두 사람이 그렇게 얽힌 사이인 줄은 몰랐어요."
동윤이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싱긋 웃었다.
대체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가만히 있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가 경희와 연인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변하는 건 아니었다.
"미안해요. 나도 처음엔 나쁜 마음이었는데 동윤 씨가 너무 좋아져서..."
"일부러 알고 찾아온 것도 아니잖아요. 나도 그 정도는 알아요."
동윤이 나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그가 경희와 그저 선후배 관계라는 걸 알게 되자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조금만 더 그를 솔직하게 대했다면 이딴 꼴을 겪지 않고도 알 수 있던 거였다. 잘못한 시작을 감추느라 정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윤정 씨, 왜 내가 경희랑 그런 사이일 거라고 오해했어요?"
한참 나를 다독거리던 동윤이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아 자신을 똑바로 보게 하며 물었다.
"동윤 씨가 여자친구라고 했잖아요."
울먹거리며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럴 수 있었겠네요. 그때는 그냥 윤정 씨가 카페에 온 손님이니까 후배라고 자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서... 아니다, 내가 미안해요. 오해하게 말했네요."
"몰라요. 내가 다 잘못한 건데 왜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요? 동윤 씨가 이러니까 더 내가 미안하잖아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봤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단지 동윤이 나를 이해해주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
"그 경호라는 남자한테 들으니까 경희가 잘못했더라고요. 윤정 씨, 내가 혼내줄까요?"
동윤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뇨, 또 건드리면 내가 혼내줄래요."
코를 훌쩍거리며 말하자 그가 내 어깨를 당겨 안았다.
"혼내줘도 괜찮은데 그 남자한테 그런 것처럼 주먹을 날리지는 말아요. 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주먹을 휘둘러서 합의금 물어주기는 싫으니까요. 알았죠? 아! 앞으로 내가 잘못해도 그렇게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동윤이 다시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똑바로 바라봤다.
"몰라요"
장난기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되어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 정도면 마음고생이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우리 둘이 사랑한다고 해서 마냥 모든 게 좋을 수는 없었다. 그걸 알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에겐 경희보다 어마어마하게 말도 되지 않는 여동생이 셋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