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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알지 못하던 것들에 관한 고민 (3/6)

3. 알지 못하던 것들에 관한 고민

BTD 공금

뻔뻔한 계집애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전투 정신이 솟구쳤다.

당한 만큼 돌려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다른 여자의 애인을 빼앗을 때는 스릴이 넘쳤겠지만, 이제 반대가 되었으니 내가 얼마나 똥줄이 탔었는지 제대로 알려줄 차례였다.

"오랜만이네요."

건물 로비에 유일하게 있는 카페에 앉아있던 경희가 나를 보자마자 피식 웃었다.

마치 내가 자신과 싸움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듯 가소롭게 웃는 그녀를 보자 손이 근질거렸다. 성질대로면 머리카락이라도 다 쥐어뜯어 놓고 싶은데 법이 있으니 참아야만 했다.

"난 요즘 시간이 엄청 빨리 가는 거 같은데, 그쪽은 더럽게 늦게 가나 봐요? 난 어제 보고 오늘 보는 거 같아서요."

맞은편에 앉아 나 역시 빈정거렸다.

경호의 차 안에서 발가벗고 있다가 나에게 들켰을 때도 경희는 당당했다. 태어날 때부터 뻔뻔함을 장착하고 있던 것처럼 내가 보란 듯 그의 페니스를 손으로 툭툭 치고 옷을 입었다. 그 광경을 보고 경악해서 별다른 말도 할 수 없었다.

"왜요? 경호씨가 다시 만나 달라고 매달리니까 속이 시원해요?"

경희가 나를 쏘아보며 찻잔을 들었다.

"시원하고 말 것도 없어요. 잊었어요? 내가 너 가지라고 했잖아."

존댓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양심이 없는 여자 앞에서 예의 따위를 차리는 건 사치였다. 이성적으로 대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오르게 한다는 걸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았다.

"가지라고 했으면 경호씨에게 괜히 돌아오면 받아줄 것처럼 여지나 주지 말아요."

경희가 큰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았다.

동윤 때문에 쫓아온 줄 알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동윤과 관련된 얘기는 전혀 하지 않고 기억하기도 싫은 경호에 대해서만 말했다. 아무래도 눈치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빤히 보기만 하자 그녀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냥 내가 좀 예민하게 굴어서 경호씨가 잠시 흔들린 거니까..."

"그 말이나 하려고 나오라는 거였어요?"

확실히 하기 위해 빠르게 물었다.

"그 말이요? 내가 한가해서 경호씨가 잠시 만나던 여자나 찾아온 줄 알아요?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으니까 온 거잖아요."

경희가 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되면 동윤처럼 멋진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도 경호처럼 우유부단한 놈까지 가지고 싶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역시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여자였다.

"걱정할 거 없으니까 두 번 다시 이따위로 찾아오지 말아요. 다시 말해줘요? 난 그 남자를 가질 생각이 없으니까 가져요."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고 일어섰다.

조만간 나와 동윤의 관계를 알게 되면 지금보다 더 미쳐 날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 순간에 지금보다 더한 모욕감을 느끼게 해주면 속이 후련해지고도 남을 것이다.

"난 경호씨가 작아도 사랑해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경희가 외쳤다.

매달리는 게 아니라 망신을 주려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회사 아래에 있는 카페까지 쫓아와서 이럴 리가 없다.

"누가 뭐래? 계속 사랑해."

너무 어이가 없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윤정 씨는 우리 경호 씨 거가 작아도 귀여운지 몰랐죠? 그래도 난 그런 거 따지지 않고 사랑한다고요."

미친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미친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정말 너무 사랑한다고..."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말하는 그녀가 너무 창피해서 카페 밖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도망치듯 밖으로 나온 뒤에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알고 찾아와서 이딴 짓을 벌인 거라면 이번에도 내가 당한 거였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저런 개또라이..."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내뱉다가 휙 돌아섰다.

유리로 된 벽 너머에 있는 경희가 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설마 통쾌해서 웃는 건가 싶었는데 어깨가 들썩거리는 게 울음을 터트린 거였다.

* * *

토요일이 되어서야 동윤의 카페에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대체 경희가 무슨 생각으로 찾아왔었는지 몰라도 동윤이 자꾸만 떠올라 어쩔 수가 없었다. 더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그를 만나고 싶었다.

"잘 지냈어요?"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으며 물었다.

주문대 앞에 서 있던 동윤이 그런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봤다. 나름 고백을 했다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여자가 일주일이 조금 지난 뒤에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네, 윤정 씨도 잘 지냈어요?"

동윤이 고개를 돌리고 주문대 위를 정리했다.

이미 자신의 고백에 대해 내가 거절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처지에서 보면 먼저 호감을 보인 여자가 막상 용기를 내어 고백하자 슬그머니 뒤로 발을 빼서 어이가 없을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충분히 이해했다.

"오늘의 커피로 마실게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자 동윤이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내게 돈을 받지 않겠다는 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싱긋 웃고 늘 앉던 자리로 가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낮에 오는 건 처음이죠?"

동윤이 내 앞에 커피가 담긴 컵을 내려놓자마자 웃으며 물었다.

"불편한데 일부러 온 거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가 맞은편에 앉아 나를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어딘가 눈빛이 변한 것처럼 느껴져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이제 막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뜬 소년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이상했다.

"저, 원래 커피 엄청 좋아해요."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뒤로 넘기며 말했다.

햇살도 유리로 된 벽을 적당히 뚫고 들어와 나를 빛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처럼 나풀거리는 원피스까지 입었으니 완벽했다. 이 정도면 화장을 떡칠 한 것처럼 보이는 경희와 완전히 다른 매력을 보일 수 있었다.

"커피만 좋아해요?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동윤이 야릇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뭐지? 설마 변태? 그럼 수갑이나 채찍이라도 준비를 해야 하나? 뭐, 이런 별 이상한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 게 아니라면 그를 보는 내가 변한 거였다.

"저기... 동윤 씨, 혹시... 음...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경희가 나에 대해 다 말했나 싶어 눈치를 봤다.

"내가 부담스러워요? 아니면 막상 알면 알수록 별로였어요?"

동윤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뇨!"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말하고 시선을 돌렸다.

경희를 떼어놓고 생각해도 동윤은 충분히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같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서로 통하는 게 많아 좋았다. 그와 같이 떠나는 여행이라면 정말 내 취미도 여행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을 정도였다.

"그 말은 나를 좋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괜찮아요?"

동윤이 몰아붙이듯 말하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목적을 이루는데 자꾸만 양심이 내 발목을 잡았다. 경희에게 보란 듯 복수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제야 내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 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동윤 씨가 좋기는 좋은데... 내가 실망을 하게 만들까..."

내가 말하면서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망해도 내가 해요."

"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피하는 게 싫어요. 윤정 씨, 난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그대로 직진하고 싶어요."

동윤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강렬해서 어디를 봐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손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쩌면 우연히 이 카페를 들어온 게 운명일 수도 있었다. 이름도 비슷한 경호와 경희가 발가벗고 내게 들켰을 때도 당당했던 것처럼, 나도 이 인연 앞에서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든 내가 싫어지거나 실망하게 되면 말해요."

마른침을 삼키고 테이블 위만 빤히 보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아니, 만약 생긴다고 해도 괜찮아요."

동윤이 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활짝 웃었다.

돌이켜보니 그가 내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괜찮다는 거였다. 진실을 알게 되면 전혀 괜찮지 않겠지만, 지금이 너무 좋아 조금 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동윤 씨, 혹시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거는 아니죠? 나는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은 있어요."

"나도 만났던 사람은 있어요. 왜요? 내가 바람이라도 피우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요?"

동윤이 웃으며 말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가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는 경희와 정리를 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 사악한 계집애가 쫓아와서 난리를 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그녀가 그에게 내게 저질렀던 만행을 얘기했을 리가 없었다.

"오늘 영업 끝날 때까지 같이 있다가 야식 먹으러 갈까요?"

그제야 나도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난 윤정 씨만 좋으면 뭐든 다 좋아요."

동윤도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다시 연애가 시작되자 일상에도 활기가 넘쳤다.

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했다가 지친 발걸음으로 돌아오던 길이 달라졌다. 동윤을 만날 생각만 하면 퇴근 시간까지 버티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와 자주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아서 그런지 늘 같이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손님은 많았어요?"

어김없이 퇴근하자마자 동윤의 카페로 가서 문을 열며 물었다.

"우리 윤정 씨랑 굶지 않을 정도로는 벌었어요."

"나도 우리 동윤 씨랑 맛있는 거 사 먹을 수 있는 정도로는 일했어요."

서로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하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 손님이 앉는 자리가 아니라 동윤의 옆이 내 자리였다. 카페 일이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괜찮아졌다. 잠시 그가 자리를 비워도 손님에게 간단한 음료 정도는 줄 수 있었다.

"오늘 카페 문 닫고 내가 사는 집에 같이 갈래요?"

동윤이 손님이 뜸해지자 옆에 서 있는 나를 지그시 보며 물었다.

"동윤 씨의 집에요?"

그가 혼자 사는 건 알지만 그게 더 신경 쓰였다.

예전과 달리 출근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속옷에 신경을 쓰긴 했다. 그렇다고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완전히 된 건 아니었다. 은밀한 몸짓을 나눈다는 건, 내게 서로가 더욱 깊은 관계가 된다는 의미였다.

"매일 밖에서 사 먹는 것도 편하긴 하지만 오늘은 내가 직접 요리를 해주고 싶어서요."

동윤이 눈치를 챘는지 내 한쪽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별다른 일이 없을 테니 안심하라는 의미이겠지만 없는 것도 좀 이상하긴 했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한 연인이 단둘만 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 밥만 먹고 헤어지는 건 쉽지 않다. 이미 카페에서 깊은 키스는 했어 도 선뜻 용기가 나진 않았다.

지이이잉.

때마침 가방에 넣어놓은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싱긋 웃고 주문대 아래 수납장에 있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전혀 반갑지 않은 경호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동윤 씨, 통화 좀하고 올게요."

굳이 예전 애인에게 걸려온 전화라고 말할 필요는 없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동윤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카페 밖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욕이라도 한바탕해 주고 싶지만, 혹시라도 동윤이 들을까 목소리를 낮췄다.

"왜 매번 전화질이야? 제발 작작 좀 하라고 했지?"

[윤정아, 너무 보고 싶다. 네 살 냄새도 그립고, 너를 안고 잠들었을 때가 제일 좋았어.]

경호가 잔뜩 취했는지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와 바람이 났다가 정신을 차리니 나에 대한 아쉬움이 넘쳐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그를 받아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 여자가 나를 찾아온 건 알아? 네 거기가 작아도 너무 사랑한다고 하더라."

[뭐?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줘? 내가 네 거기가 작아서 헤어진 것처럼 말하더라고. 너희 둘이 내 앞에서 그 짓거리를 벌이다가 걸려서 헤어진 거잖아. 그래, 생각해보니까 아예 그 이유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 같아."

당한 만큼 돌려주지 못해서 그런지 나쁜 마음이 솟구쳤다.

[그 미친 게 그렇게 말했다는 거야? 윤정아, 내가 미친놈이다. 내가 그게 미친년인지 모르고...]

"둘이 수준이 딱 맞는 거 같으니까 계속 만나. 아니다, 너희 둘 문제는 둘이 알아서 해. 또 전화하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

전화를 끊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헤어질 때는 사람을 세상에서 둘도 없이 구질구질하게 만들더니, 이제 지가 아쉬우니까 매달리는 꼴이 한심했다. 경호와 바람났던 경희에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뒤에서 동윤의 목소리가 들려 급히 돌아섰다.

"아뇨, 회사 동료한테 온 전화였어요. 내일 해결하면 되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

담담한 척을 하려고 했지만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동윤에게 다가가 빤히 보다가 결심했다. 이 복잡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내가 더욱 용기를 내야만 했다.

"동윤 씨, 오늘 동윤 씨가 만들어 주는 요리가 뭘지 궁금해요."

그의 손을 잡고 싱긋 웃었다.

"기대해도 괜찮아요. 나름 손맛이 있으니까."

동윤이 기분이 좋은지 나를 당겨 품에 안고 가볍게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 정도의 스킨십은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았다. 손을 올려 그의 등을 감싸 안고 오늘 입고 나온 속옷이 뭐였는지 떠올렸다.

다시 카페로 들어가 일을 도우면서도 그와 있을지 모르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능숙하게 보이기도 싫고, 전혀 모르는 여자처럼 보이기도 싫었다. 마침내 카페 문을 닫고 그와 같이 차를 타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바르게 뛰기 시작했다.

"윤정 씨,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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