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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123화 (에필로그 4화) (124/124)

<에필로그 4화>

하긴 SG그룹 며느리가 될 건데 다이아몬드야 껌이지. 그에 비해 우리 정우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이경은은 억하심정을 누르고 예서에게 웃어 보였다. 어떻게 해서든 화해를 해야 정우도 살고 그녀도 살 수 있다.

처음엔 갑자기 찾아와 당황했지만, 일단 예서가 먼저 찾아온 사실 자체가 너무도 기뻤다. 한주혁이 분명 그러지 않았는가. 이쪽에서 먼저 연락하지만 않으면 예서 쪽에서 먼저 찾아오는 건 상관없이 건물이든, 돈이든 무엇이든 준다고. 하지만 제대로 화해하게 되면 그깟 푼돈이 문제겠는가 말이다.

“예서야. 이렇게 먼저 찾아와줘서 정말 고맙다. 한 본이랑 다시 잘해보기로 한 것도 잘했고. 아무렴!”

예서는 담담하게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냉랭할 만큼 침착한 태도, 차분한 몸가짐이 예전의 딸과는 확실히 달랐다. 과거의 예서는 늘 엄마 기분을 살피고 쩔쩔매는 그런 아이였는데.

“어제 정우 만나고 왔어요. 올케와 지우도요.”

“어머, 그랬니? 잘했다, 정말 잘했어!”

이경은은 잠시 눈치를 보던 것도 잠시,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고는 최소라에 대해 온갖 비난을 시작했다. 멀쩡하던 아들 정우가 본 데 없는 고아에게 홀려 어떻게 학업도 중단하고 모자간을 이간질하고 있는지, 하소연을 멈출 줄을 몰랐다. 그대로 뒀다간 밤을 새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엄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그제야 이경은은 혼자 떠들던 걸 멈추고 딸을 바라보았다. 예서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운을 뗐다.

“저를 왜 그렇게 싫어하셨어요? 정말 그 역술가의 말 때문이었나요…?”

“예서야.”

“그 말을 믿고 정우가 잘 안될 때마다 저를 미워하신 건가요? 그리고 지금도 그 말을 믿고, 제가 정우보다 더 잘 될까 봐 두려우신 건지… 한 번쯤은 꼭 여쭤보고 싶었어요.”

“예서야. 널 싫어하지 않았어. 너도 내가 배 아파 낳은 내 새낀데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니.”

이경은이 답답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널 싫어한 게 아니라… 정우, 그 아이가 더 눈에 밟히고 마음이 아프고 갑갑했어. 너는… 너는 뭐든 정우보다 나았으니까.”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었다. 예서는 그녀의 진심을 끌어내기 위해 한 발 더 다가섰다.

“엄마. 저와 정우, 그리고 엄마 당신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솔직히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저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랜 침묵이 흘렀다. 이경은은 다 식어버린 엽차를 들이켜곤 땅이 꺼져라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예서야.”

“…….”

“미안하구나. 하지만 자식이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야. 정우가 더 모자라고 더 짠해서 더 손이 가고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던 걸… 내 마음이 그런 걸 어떡하겠니.”

이경은이 울먹이며 손수건을 꺼내 눈두덩을 닦았다. 그 어떤 꾸밈도 없었다. 연꽃 선녀, 홍련 보살, 그 사기꾼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원래부터 그런 마음이었던 것을, 그 두 사람이 부추기고 더 몰아붙였을 따름이었다.

“지금도… 같은 마음이시겠네요.”

모친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대답한 것이나 같았다. 예서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날씨 이야기를 하듯 여상한 음색이었다. 처음부터 달리 기대한 것은 없었다. 이유야 어쨌든, 어머니는 쌍둥이 중 한쪽을 더 사랑했고 지금도 그랬다.

“이만 가볼게요.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자, 잠깐만! 예서야!”

이경은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제지했다. 그리고 다급하게 말했다.

“저기, 염치없다만 우리 정우… 한 본에게 잘 말해서 그룹에 자리 하나 마련해 주면 안 되겠니?”

“…….”

“번듯한 자리를 달라는 것도 아냐! 아주 좋은 직책일 필요도 없고. 그저 지금처럼 호텔이나 경비회사 야간직 전전하는 것보다는 뭐든 나을 것 같아서 말이다.”

예서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자 이경은이 그녀를 붙잡고 열변을 토했다.

“나는 바라는 거 정말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 정우만이라도, 어떻게 좀 안 될까? 가족이잖니. 부인 오빠인데 한직 하나 마련을 못….”

“죄송해요, 엄마.”

예서가 그녀에게 잡힌 손을 천천히 빼냈다.

“정우나 올케, 지우가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제 선에서는 조금은 도울 수 있어요. 하지만 선배에겐 그럴 수 없어요.”

“뭐…?”

“정우는 잘해 나갈 거예요. 올케도 야무지고 좋은 사람이니까요.”

지우 가족이 어디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어려움에 처한다면 발 벗고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먼저 자립을 해 보는 게 급선무라 믿었다. 모친의 무조건적인 애정과 헌신이 결국 정우를 그 전의 의지박약, 약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예, 예서야!”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예서는 찻집을 나와 한 비서가 대기 중인 차에 올랐다. 뒷좌석에 앉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정확히 무엇에 대한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이제는 모친을 정말로 놓아줘야 한다는 자각이 들 따름이었다. 정확히는, 어머니를 향한 제 오랜 짝사랑을 끝내고 미련 없이 보내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한주혁에 대한 짝사랑에도 마침표를 찍고자 결심했지만 그는 그녀의 그런 결심을 철회하게끔 만들었다. 그녀가 그에게 있어서, 세상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모친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할 욕심은 없었다. 당신의 말대로 정우가 안타까워 좀 더 사랑하고 귀애하는 것도 괜찮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고 확인받는 건 역시 다른 문제였다.

모친은 그들 가족과 아무 상관 없는 누군가의 말을 너무나도 굳게 맹신한 나머지, 두 자식 중 한쪽을 위해 다른 하나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평생 품고 살아왔다. 어쩌면 앞으로도 쭉 품을지 몰랐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놓아야 했다. 마지막까지 정우의 취업을 부탁하던 모친을 향한 마음을, 이제는 그녀도 접기로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마주할 순간이 있겠지만 지금은 각자의 삶을 살아갈 때였다. 모두를 위해 그게 최선이었다.

“사모님.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아, 네, 수고하셨어요.”

예서는 재빨리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차창 너머, 역 대합실처럼 아담한 공항의 외관을 둘러보았다. 평소보다 더 이르게 다가온 석양이 청사 지붕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차에서 내려 공항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한 비서가 조금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뭔가 말하려고 고개를 기울였다.

“저, 사모님. 실은….”

“예서야.”

하지만 한 비서보다 그녀를 부른 남자가 더 빨랐다. 예서가 깜짝 놀라, 저만치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한주혁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일본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선배, 이 시간에 어떻게 여기….”

“일정이 조금 일찍 끝났어. 그래서 한 비서에게 전화했더니 외할머니댁에 있다고 하길래.”

“그래서 집에 안 가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응.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데 뭘. 보고 싶어 죽겠는데 한 시간이나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예서가 어이없어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못 말리는 남자다. 한 시간도 못 기다리겠다고 기어이 여기까지 비행기를 타고 오다니.

하지만 더 웃지 못했다. 한주혁이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폭 안았다. 예서가 아무리 바르작거려도 소용없었다. 한 비서와 김 비서 모두 애써 멀리 떨어져 먼 곳을 보고 있는데도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좋은데? 단둘이 여행 가는 거 같고.”

한주혁은 비행기에 나란히 타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시선은 희미하게 날이 서 있었다.

“외할머니는? 건강하셔?”

“네. 오래 뵙지는 못했어요.”

“…울었어?”

“응. 아니.”

예서가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의 의혹을 일축시켰다.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삼켰다. 그러고는 한 손을 잡아 꼭 쥐었다.

“다음에는 같이 가.”

그의 입에서는 모친이나 정우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그녀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꺼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두 사람은 그녀와 제일 가까운 사이면서도 삶을 가장 힘들게 했던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서는 어제 처음 만난 조카에 대해 얘기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단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다.

한 시간 뒤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였다. 서울은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아직은 싸리눈에 불과했지만 이대로 쭉 내리면 꽤 쌓일 것 같았다.

“올해는 봄이 빨리 오나 했는데. 눈은 참 자주 오네.”

“눈이 와도 이상하게 별로 안 추워요.”

예비부부는 공항 밖에 대기 중인 차에 다시 올랐다. 한주혁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올겨울 난 한 번도 안 추웠어. 네가 있었으니까.”

민예서가 늘 내 곁에 있어 주었으니까. 그가 밀어처럼 속삭이며 옆자리의 그녀를 더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야말로 한주혁에게 그 말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선배가 있어서 올겨울은 정말 따뜻했어요. 앞으로도 쭉 그럴 거고요.

“사랑해.”

그가 예서의 귓불에 쪽, 입을 맞췄다. 예서가 엷게 웃으며 커다란 손을 더듬어 쥐었다. 조금 전까지 모친 때문에 눈물 지었던 일이 아주 오래전 일 같았다.

이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은 어김없이 되돌아올 것이다. 3월이 되고, 4월을 보내고, 그리고 완연히 무르익은 봄 속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5월의 부부가 될 터였다.

이제는 저에게도 완전한 가족이 있었다. 그녀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사랑하며 이해하는 가족이.

잠시 먼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그녀의 절대적인 편이 되어줄 선배가 영원히 곁에 있을 것이기에.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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