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122화 (에필로그 3화) (123/124)

<에필로그 3화>

지우는 처음 보는 고모에게 낯을 가리며 울기도 잠시, 이내 들떠서 좁은 거실 안을 돌아다니기 바빴다.

제 엄마 무릎 위에 앉아 블루베리와 바나나를 오물거리다, 제 고모가 사 온 콩순이 주방 놀이 세트를 신기한 듯 가지고 놀다가, 다시 제 아빠에게 돌아가 콩순이 냉장고를 열어달라고 조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지쳤는지 엄마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소라는 아이를 방에 눕혀놓고 문을 살짝 열어두곤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그나마 치운다고 치웠는데도 실내는 아기 용품들로 어질러져 정신이 없었다.

“우리도 곧 이사할 거야. 집 알아보고 있어. 곧 퇴거 명령 내려올 거거든.”

“여기서 멀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래도 회사가 가까우니까요.”

부부의 말에, 예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복잡했다. 아무리 전세자금대출을 받아도 제대로 된 집을 구하긴 힘들어 보였다. 거기다 소라가 음식 솜씨가 꽤 좋아 조만간 반찬가게나 조그만 1인 배달업체를 차릴 계획도 있어서 자금이 절실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섣불리 도움을 주기도 어려웠다.

“지우 선물이 하나 더 있는데….”

하지만 기껏 준비해 온 걸 도로 가져갈 순 없다. 큰돈도 아니고, 지우에게 주는 것이라 하면 두 사람의 면도 서지 않을까.

“네?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또요?”

“고모로서 지우에게 주고 싶어서요. 앞으로 아이 크면서 필요한 거 많을 테니까요.”

예서가 봉투를 하나 꺼내 소라에게 내밀었다. 인형처럼 동그란 눈이 확 커졌다. 정우가 차마 면목이 없는지 봉투를 그대로 예서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우리도 지우 하나 건사할 여유는 있어.”

소라가 남편을 찌릿 흘겨보았다. 여유는 개뿔, 무언의 반박이 역력히 보였다.

“아니야. 벌써 두 돌 지났는데 아무것도 못 해줬잖아. 다른 데 쓰지 말고… 지우에게 필요한 데 써줬으면 좋겠어.”

“감사합니다. 지우 고모!”

소라가 냉큼 봉투를 받아 치마 주머니 속에 넣었다. 정우가 다시 마다할까 싶어 액수를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우리 지우가 아직 낯을 가려서 그렇지 다음번에는 고모, 고모, 하면서 엄청 따를 거예요! 우리 딸이라서가 아니라 워낙 영리해서 두 번째 보면 다 기억하더라고요.”

최소라가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어리숙한 남편 대신, 그녀라도 이렇게 똑 부러지니 다행이다 싶었다.

잠시 후 아이가 깨자 최소라는 둘만 남겨두고 딸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일부러 남매끼리 둘만의 얘기를 나누라는 무언의 배려였다.

“고맙다, 예서야. 아까 그 돈… 지우한테 잘 쓸게.”

“그래.”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정우는 시종일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예서가 보다 못해 먼저 운을 뗐다.

“지우가 정말 예쁘네. 오빠랑 올케 반반씩 닮았고.”

“응. 그나마 지우 때문에 살아.”

오빠란 말에 안경 너머 음울하던 눈에 조금 미소가 어렸다. 쌍둥이 오빠긴 해도, 예서는 그를 한 번도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물론 몇 초 더 일찍 태어났을 뿐인데다 오빠 노릇 비슷한 것도 해 본 역사가 없으니 할 말이 없었다.

“엄마는 시골 내려가셨다며.”

“어. 거기 오래된 약국 인수받아 그럭저럭하고 계셔. 난 가끔 연락하는데 휴… 전화할 때마다 이혼하고 다시 미국 가라 하도 그러셔서 요즘은 아예 안 해.”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모친과 아내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이경은이 그에게 헌신한 걸 생각하면 엄마를 저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라의 눈치를 안 볼 수도 없어서 아주 죽을 맛인 듯했다.

“예서 넌… 엄마한테 계속 연락 안 할 거야?”

“…….”

“이해한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

정우가 면목이 없는 듯 쭈삣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진짜 이기적인 새끼였지. 너한테 얼마나 못되게 했는지… 나밖에 몰랐어. 엄마가 나만 사랑하고 잘해주는 걸 당연한 거라 여겼고…. 그렇게 뒷바라지해 주셨는데 공부도 안 하고 돈만 축내고.”

“…….”

“그런 주제에 널 항상 질투했어. 너는 과외 한번 안 받고 학원도 안 다니면서 공부도 늘 1등이고 S대 들어가고…. 동네 아줌마들이 너 칭찬할 때마다 심통 나서 집에서 더 깽판이나 치고. 진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괜찮다곤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지난 일을 어떻게 하겠어. 이미 벌어진 일인데.”

“내가 진짜 미안했다, 예서야. 용서해 줘.”

“…….”

“그래서 지금 이렇게 벌 받나 봐. 넌 소설가로 성공해서 그렇게 잘 되고 나는….”

“…….”

“알아. 다 네가 노력한 결과라는 거.”

“그 경비회사는 계속 다닐 거야? 야간 자리밖에 없어서 힘들다고 들었는데.”

“어쩌겠어. 학력이 고졸이라 마땅히 들어갈 데가 없는데…. 당장 먹고살아야 되니까 당분간 다니면서 이직도 알아보려고.”

예서는 시계를 보았다. 한 비서에게 말한 한 시간이 어느덧 지나 있었다. 예서는 아래층에서 올라온 소라와 지우, 정우의 배웅을 받고 한 비서가 대기 중인 차로 돌아왔다.

“그럼 건강히 잘 지내. 올케도 잘 지내시고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아빠 품에 안긴 지우에게도 손을 흔들며 방긋 웃어 보였다. 아이는 웃지는 않았지만 외면하진 않았다. 고모를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늦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저기, 지우 고모.”

차가 출발하기 직전, 소라가 차창에 대고 속삭였다.

“아까 그 돈… 너무 많은데 다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지우 필요한 거 아낌없이 다 해주세요. 나중에 반찬 가게 오픈하면 꼭 부르시고요.”

“고마워요, 아가씨!”

소라가 울먹이며 웃었다. 마침내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예서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정우에 대한 해묵은 감정이 다 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첫 조카는 정말 예뻤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랐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주혁이 도쿄 현지에 도착해 급한 미팅을 막 끝낸 모양이었다.

“네, 선배. 잘 도착했어요?”

-응. 하네다 공항. 어디야? 집 아닌 것 같은데?

“잠깐 어디 들렀어요.”

-어디? 아까 공항에선 그런 말 없었잖아.

“잠깐 아는 사람 집에요. 모레 오면 얘기할게요.”

아직 한 명, 남은 사람이 있었다. 내일 그 만남까지 끝내고, 모레 한주혁을 보게 되면 그때 다 얘기해도 늦지 않으리라.

“숙소 도착했어요? 저녁은 총리관저에 초대받았고 내일 중요한 협의가 있다고 했었죠?”

-안 그래도 꽤 곤란한 일이 생겼어. 이걸 어쩌지.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가 정색하며 한숨을 깊이 내쉬자 예서가 미간을 좁혔다. 계약 체결에 벌써부터 문제가 생긴 걸까.

-아주 큰일이야. 도착한 지 아직 10분도 안 지났는데 민예서가 너무 보고 싶어.

하아. 예서의 목 깊은 곳에서 신음이 흘렀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놀랐잖아요, 선배.”

-이게 보통 큰일이야? 앞으로 48시간을 민예서 없이 어떻게 견디지?

“선배. 양치기 소년 몰라요…? 자꾸 그런 장난치면, 다음에 정말 큰일 있을 때 안 믿는다고요.”

두 사람은 그녀가 한남동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을 옥신각신하다 전화를 끊었다. 그쪽에서 계속 끊지 않으려고 해 예서가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해야 했다.

***

모친 이경은은 외조모 윤미실의 시골집에 기거하며 읍내에서 약국을 하고 있었다. 예서는 먼저 외조모의 집에 들러 선물 꾸러미를 놓고 잠시 얘기를 나눈 뒤 한 비서와 약국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일부러 약국 문을 닫을 때 맞춰 시골로 내려왔다. 외조모의 얘기를 들어보니 서울에서처럼 직원을 따로 구할 형편도 아닌 것 같았다.

“어서 오세….”

이경은은 카운터 앞에 앉아 있다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딸을 보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녀는 예서와 그 뒤에 선 한 비서를 번갈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서야.”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연락도 없이 어쩐 일…. 아, 아니다. 잘 왔어.”

이경은은 망연자실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듯 가운을 벗었다.

“마침 문 닫을 시간이니 집에 가자. 너 할머니 뵌 지도 오래됐고….”

“방금 할머니 뵙고 오는 길이에요.”

예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잠깐 얘기하고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한 시간 뒤 비행기를 타야 해서요.”

차로는 네 시간 정도 걸렸다. 그녀나 한 비서 모두에게 장시간 밤길 운전보다 비행 편이 나을 터였다.

***

이경은은 읍내의 오래된 찻집에 앉아 오랜만에 만난 딸의 매무새를 빠르게 훑었다. 일견 수수한 차림새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옷과 머플러는 최상급의 핸드메이드 캐시미어였고 귓불에 박힌 나비 모양 보석은 분명 다이아몬드로 보였다. 소맷자락 아래로 살짝 드러난 클래식 쿼츠 시계도 사방이 핑크 다이아몬드로 둘러싸인, 최소 수천만 원짜리 명품이었다.

한 본부장이 해 준 건가? 아니면 시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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