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마침내 단둘이 병실에 남기까지 여러 사람들이 오갔고 몇 가지 검사를 더 거쳐야 했다. 한태진 회장과 원미란 관장, 그 외 직계 일가 몇 명이 왔다가 돌아갔다.
한주혁은 유동식으로 식사를 하고 샤워도 끝냈다. 간간이 근육통과 현기증이 밀려오고 움직임이 둔하게 느껴진다고 했지만, 정밀 검사 결과도 좋았고 기억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의료진과 측근들이 염려했던 크고 작은 후유증 중 어떤 것도 없었다.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
“선배.”
“예서야.”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침상에 등을 기대고 앉은 한주혁은 그녀에게 순서를 양보하듯 침묵을 지켰다. 한일자로 꾹 다문 입술에 희미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왜 그랬어요? 왜 그렇게까지….”
예서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더 말을 잇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내가 거기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선배 뒷모습을 보고, 뒤늦게 공항에서 김 비서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어떡할 뻔했어요?”
조금만 늦었다면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렇게 서로 마주 보고 있을 수도 없었겠지.
“네가 처음 날 살려준 곳이니까. 그래서 거기서 끝을 맺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는 여상하게 답하곤 예서에게 되물었다.
“너는? 넌 계곡으로 왜 온 거야?”
예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둘 다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주혁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18년 전 그 날. 언제 기억났어?”
“관장님이 오셨을 때 어릴 적 사진을 떨어뜨리고 가셨어요. 그리고… 선배의 고모님이 오셨을 때 그제야 깨달았죠.”
예서는 원미란과 류혜수, 두 사람과의 연이은 만남을 간략히 들려주었다. 그는 류혜수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침묵을 지키다, 예서가 얘기를 마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또 한 번, 네게 목숨을 빚질 줄은 몰랐어.”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김 비서와 백모를 통해 그가 어떻게 구조되었는지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만약 예서가 늦게라도 김 비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그녀를 다시 눈에 담을 수도 없었으리라.
“네가 날 살린 거야.”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처음부터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죽으려고 한 거잖아.
예서는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한주혁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잡힌 손을 빼내진 않았다. 제 몸의 일부인 것처럼 익숙한 그 온기와 단단함을 떨쳐내고 싶지가 않았다.
“돌아와 줘. 예서야.”
그가 낮게 속삭였다. 손을 잡은 악력은 부드럽지만 약하진 않았다. 혹시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달아날까, 초조한 불안감마저 배어 나왔다.
“이제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냐. 두 번이나 구해줬으니 네가 책임을 져야지.”
“선배.”
“사랑해.”
그가 침대 가장자리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한 번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그날, 카페 창 너머로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날 떠난 후로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간이 세상과 한순간 유리되어 둘만의 세계에 갇힌 것처럼, 지금은 눈앞의 그녀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예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서 한순간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미안해. 그동안 일부러 너 시험하고, 못되게 굴고 함부로 말했던 것, 모두 다 잘못했어.”
그가 예서의 손을 잡아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찌릿한 감각에 예서가 움찔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저지하지는 않았다.
“알아. 미안하단 말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단 거.”
애달픈 눈동자가 그녀의 것과 다시 맞닿았다.
“그러니까 평생 갚게 해 줘.”
응? 그녀의 동의를 바라는 간절함이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연신 흘러나왔다. 세상 그 어떤 애원과 호소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시선 앞에, 예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돌아서면, 그는 또다시 스스로 생을 놓으려 할 것이다. 다음번에는 기어이 성공하고 말겠지. 그때는 그녀가 확실히 곁에 없을 테니까.
“선배.”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가 준 상처 때문에 너무도 힘들어 헤어지길 원했다. 그래서 하늘 아래 다른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길 바랐을 뿐, 그가 괴롭고 힘들기를 바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하물며 죽는 것은 더더욱.
“사랑이 기억해요?”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그녀의 첫 아기였다. 아주 잠깐 품고 있다가 떠나간, 그와 그녀 사이의 아이.
“당연하잖아. 그 애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그가 그녀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어두운 눈에 해묵은 아픔이 서렸다.
“내 잘못이야. 아이를 그렇게 가게 한 것도.”
“아니, 그건 아니에요. 당신이 그날 오기 전부터 위험한 상태였으니까….”
예서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사랑이의 얘기를 꺼낸 건 그를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때 정말 괴로웠어요. 죽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죠. 그래서….”
눈물이 차올라 눈가가 뜨거웠다. 목이 메어오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는 잃을 수가 없어요. 선배가 또 잘못되면… 나도 무사하진 못할 것 같아.”
“그런 말 하지 마.”
그가 예서의 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놓지는 않았다.
“내가 혹시 잘못돼도 넌 잘 살아야 돼. 끝까지. 잘 먹고 잘 자고, 소설도 계속 쓰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 성공하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선배가 나 때문에 잘못되면….”
예서가 버럭 화를 내며 손을 뿌리쳤다. 참았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눈물방울을 기점으로 울음이 왈칵 터졌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고장 난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침상 위 그의 품에 있었다. 희미한 소독약 냄새도 잠시, 어느새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주혁 특유의 체취와 온기에 푹 젖어 든 채였다.
“울지 마.”
“…….”
“그러니까 네가 다 용서하고 내 옆에 있어 줘.”
그럼 잘못될 일, 절대 없을 테니까.
이어지는 속삭임에 예서가 그를 힘껏 밀어냈다. 물론 바위처럼 단단한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도무지 환자 같지가 않았다. 하긴 본인은 내일이라도 당장 퇴원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담당의가 혹시 모르니 며칠 더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고 제지한 차였다.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줘. 예서야.”
한주혁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며, 젖은 눈꺼풀에 맞닿았다. 부드럽다 못해 성스럽게까지 여겨지는 입맞춤이다. 예서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그 키스를 피했다. 그런 감각 속에서는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내 목숨은 이제 내 것이 아냐, 예서 네 거지.”
“억지로 떠넘기지 말아요….”
그 정색하는 대답에 한주혁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녀를 바투 끌어당겨 꼭 안았다. 예서도 더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순순히 마주 끌어안았다. 대답을 더 종용할 필요가 없었다.
주혁은 환희와 안도감으로 터질 듯한 심장을 억누른 채 미소 지었다. 민예서를 결국 이렇게 되찾았다. 그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소중한 여자가, 기꺼이 그녀 없는 생을 버리려 할 때 다시 돌아와 준 것이다.
“고마워, 예서야. 정말… 고마워.”
한때나마 완전히 잃었던 생에의 의지가 솟구쳤다. 혈관 가득 퍼져 전신을 내달리는 그 의욕에, 그는 난생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었다.
민예서의 존재는 그에게 다시 살 것을 종용하는 신의 가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로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었다.
늘 온전한 행복, 완벽한 평화가 아닐 수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억지로 완벽한 행복의 틀에 맞추려 하다가 하마터면 그녀를 잃을 뻔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민예서가 그의 곁에 있는 것 자체가 그에겐 이미 완벽한 인생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매일, 매 순간, 함께 하는 것. 그 일상 자체가 이미 기약된 행복의 완성이나 다름없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18년 전 그 폭우 속 계곡에서 시작되어 다시 재회한 그 날부터 철저히 민예서에게 종속되어 버린 것이다.
“예서야.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고백할 게 있는데….”
예서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물기가 흥건한 두 눈이 말갛게 반짝였다.
“나는 처음부터 너에게 반해 있었어. 내가 먼저 너에게 반했던 거야.”
주혁의 고개가 조금씩 기울어졌다. 예서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입술이 그의 입 속으로 삼켜진 까닭이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한참 더 서로를 탐했다. 의료진이 들어오기 전까지, 세상에 서로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애정을 재차 확인하고 내밀한 안도를 나누었다.
-본편 완결.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