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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18)화 (119/124)

<118화>

오전부터 영하의 바람이 도심을 휘돌기 시작했다. 쇼핑몰과 아케이드는 다가올 성탄 대목을 맞아 크리스마스트리며, 화려한 장식, 눈길을 끄는 이벤트 배너로 중무장을 마친 채였다.

흐린 하늘, 한파 속에서도 도심을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예서가 병원 당직팀을 위한 간식을 베이커리에서 픽업해 병원으로 향할 때였다. 박성준이 마침 병원 부지에 들어서던 그녀를 발견하고 경적을 울렸다.

“예서야!”

“성준 선배.”

차창을 내리는 그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주혁 선배의 병문안을 온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병동으로 들어서는 순간, 담당 간호사가 수화기를 황급히 내려놓았다.

“민예서 님! 마침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늘 사무적으로 차분하던 스테이션의 분위기가 어딘가 들떠 있었다. 설마. 예서가 하마터면 손에 든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혹시 선배가….”

“네, 30분 전 깨어나셨습니다.”

김 비서도 소식을 듣고 막 달려왔는지 간호사 대신 말을 이었다.

“회장님과 관장님도 곧 오실 겁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선배는… 몸은….”

예서가 가슴이 벅차올라 말을 더듬자 박성준이 대신 물었다.

“몸은요? 어디 이상은 없나요? 후유증, 이상 증상 이런 거 없어요?”

“네, 곧 정밀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맥박, 혈압, 모두 정상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지극히 안정된 상태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서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심신 모두 정상적으로 의식을 되찾는 것- 그게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단 한 가지였다.

박성준도 뛸 듯이 기뻐하며 일단 얼굴을 봐야겠다고 병실로 향했다. 예서도 그 뒤를 따르며 계속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그 설렘은 박성준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싸늘한 불안감으로 변질되었다.

흐트러진 시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주혁이 누워 있어야 할 침상은 텅 비어 있었다.

“어? 어디 갔지. 화장실에라도 갔나.”

“선….”

태연한 박성준과는 달리, 예서가 한껏 이를 악물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콱 틀어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병실과 연결된 비상구 문을 부서져라 열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등 뒤에서 박성준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설마. 아닐 거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예서는 문고리를 있는 힘껏 당겨 열었다. 인공 잔디와 수목들로 꾸며진 루프탑 공간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눈에 익은 뒷모습 역시.

안전용 바운더리 블록이 제거된 난간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예서의 귓전에 누군가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선배!”

비명은 다름 아닌 제 목소리였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그에게 반쯤 다가선 뒤였다.

“안 돼!”

두 다리가 쓰러질 듯 후들거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상대방을 달래야 한다고 어디선가 본 기억 때문에, 더 다가갈 수도 없었다. 예서는 기어이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요!”

한주혁이 환자복 위에 코트를 걸친 채 이쪽을 망연자실 보고 있었다. 그가 난간에서 한참 떨어져 그녀를 향해 완전히 돌아선 뒤에야, 예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한 번 더 소리치는 목이 반쯤 쉬어 있었다.

“허튼짓하지 말라고요! 제발! 흐윽….”

“예서야.”

한주혁이 그녀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이 곧장 뻗어와 예서의 얼굴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젖은 눈두덩이며 뺨을 쓸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지런히 잡아주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진짜 예서구나.”

그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3주 가까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환자 같지 않게, 환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눈가는 붉게 젖어 있었다.

***

사람들이 몰려와 호들갑을 떨기 전에 잠시 바람을 쐬고 싶었다. 난간 너머, 15층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충동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그냥 이대로 몸을 날릴까.

하지만 25층도 아닌 15층은 애매한 높이였다. 잘못했다간 목숨을 부지한 채로 스스로 끊지도 못하고 강제로 연명해야 할 상태가 될 수도 있다.

그럼 미국에 있는 민예서에게도 소식이 전해지겠지. 얼마나 참담한 꼴일지. 차라리 부고를 듣게 하는 쪽이 백번 낫다.

그는 두 발을 바닥에 딛고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운이 좋다면. 자꾸만 나쁜 생각이 수면 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차피 언제고 저질러야 할 일이다.

그 여자가 없는 삶 따위,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민예서가 날 떠난 지금은 이렇게 숨을 내쉬고 있어도….

“선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늘 그리웠고, 죽어서도 그리워할 목소리였다. 이제는 하다 하다 환청까지 듣는 건가. 주혁은 실소를 머금은 채 다시 까마득히 먼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 찢어질 듯한 비명이 다시 울렸다.

“안 돼!”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상구와 난간 구역 사이에 민예서가 서 있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은 환시라기에 너무 또렷했다. 이어지는 고함 역시도.

“허튼짓하지 말라고요! 제발! 흐윽….”

주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예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을 뻗어 만져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면, 그때는 드디어 정신이 나갔다는 증거일 터였다. 민예서를 향한 그리움에 미쳐버린 나머지, 그녀의 환각이 보이고 환청까지 들리는 거겠지.

“예서야.”

하지만 신기루가 아니었다. 손끝에 와닿는 보드라운 살결, 따스한 온기는 그의 전신이 기억하는 민예서가 맞았다. 그는 감격에 겨워 그녀의 젖은 눈과 뺨,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차례대로 쓰다듬고 매만졌다.

“진짜 예서구나.”

“선배….”

“진짜야.”

그는 그대로 민예서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째서 미국에 있지 않고 바로 여기, 제 눈앞에 있는지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가 깨어난 걸 확인한 즉시 다시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조차 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살아 있길 잘했다는 안도감밖에 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등신같이 실패했다는 씁쓸한 자괴감, 다시 시도해야 한다는 각오에 사로잡혀 있던 게 거짓말 같았다. 민예서를 다시 한번 품에 안고 그 온기를 느껴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환희일 뿐이었다.

민예서 특유의 다디단 살냄새, 가느다란 흐느낌, 빠르게 젖어가는 제 환자복 앞섶과 맞물린 심장 소리, 모든 게 기적 같았다.

“아니, 저렇게 서로 죽고 못 사는데….”

박성준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대는 소리가 아주 멀게 들렸다.

“왜 헤어진 거야, 참 내.”

징글징글하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돌아서는 기척에 주혁도 민예서를 포옹한 채 몸을 일으켰다.

“선배, 무거워요. 선배 아직 환자라고요….”

민예서가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주혁은 팔 힘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예서의 눈에서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돌아온 거지?”

혹시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고 누가 알려서 다시 돌아온 걸까.

“미국에서… 돌아와 준 거지?”

하지만 민예서는 고개를 저었다.

“미국에 가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그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재빨리 힐문했다.

“정말로 떨어지려고 했어요?”

“…….”

“선배!”

두 손이 그의 포옹을 매섭게 뿌리치고 그의 멱살을 바투 잡았다. 평소의 가녀린 민예서답지 않게 거센 악력이었다.

“아니죠? 떨어질 생각한 거.”

사슴처럼 예쁘기만 한 눈망울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강아지의 것처럼 유순하고 동글동글하던 눈매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답해요, 선배!”

주혁의 심장이 뻐근하게 가라앉았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감격스러운 민예서의 분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는 그녀가 독촉하는 대답 대신 조금 전 물음을 반복했다.

“돌아온 거 맞지?”

그녀의 대답에 제 앞날이 달려 있었다. 민예서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지그시 노려보기만 할 뿐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예서야.”

잘못했어. 용서해 줘,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그럼 다시는… 그런 생각할 일 없을 거야.”

“…….”

“다시 시작하자.”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정말로.

민예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로 번뜩이던 두 눈이 빠르게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녀 역시 제 말이 그냥 하는 헛소리도, 협박도 아님을 너무도 잘 알았다.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눈송이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 해의 첫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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