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17)화 (118/124)

<117화>

“그 애 좀 데려와 봐. 민예서. 아, 미국에 있다고 했나?”

“가려다가 안 갔대요.”

원미란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다가 언성을 높였다.

“공항에서 김 비서에게 연락해 주혁이 구한 사람이 그 애예요. 조금만 늦었어도 바로 저승길 건넜을 거라는데 그 애가 재빨리 알려주지 않았으면…. 아유, 상상만 해도 심장 내려앉아 죽겠네. 저도 그 길로 바로 미국 간 줄 알았더니 아직 한국에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그 애가 김 비서에게 연락했다고?”

“네에. 좀 전에 전화했더니 아직 서울에 있더라고요. 안 그래도 내일 여기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당신은 일단 회사 일에만 집중하세요. 주혁이 저런데 회장님까지 자리를 비우시면 되겠어요?”

한 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운지 창가에서 막다른 복도까지 정신없이 오가는 낯빛이 심란하다 못해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았다.

“무조건 둘이 다시 붙여 놔. 처음부터 반대를 하길 했어, 뭘 했어!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해. 뭐든 다!”

“참, 답답하신 양반.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예서가 뭐 바라는 게 있는데 주혁이가 그걸 안 들어줘서 둘이 헤어졌겠냐고요!”

“아무튼 내일 그 아이 만나면 무조건 맘 돌려놔. 주혁이 죽어도 상관없으면 냅두고.”

“여보!”

두 사람의 실랑이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담당의가 라운지 문을 노크하고 들어와 부부 앞에 섰다.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박사님. 우리 주혁이 어떤가요? 예후가….”

“아직은 뭐라고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다만, 코마 상태가 좀 더 길어질 수 있으니 회사 일이나 한 본부장님 상황을 대외적으로 어떻게 하실 것인지…. 미리 대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라운지에는 다시 극도의 긴장이 감돌았다. 부부는 그 뒤로도 담당의와 한참 더 대화를 나누고 자정이 넘어서야 본가로 귀가했다.

***

어느덧 성탄절이 코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세밑까지는 단 열흘을 남겨두고 있었다.

예서는 엘리베이터 통유리창 너머, 여전히 병원 부지 한가운데 선 크리스마스트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경이 그나마 거대한 장식품들 덕분에 한결 따뜻해 보였다.

예서는 의료진과 간단한 담소를 나누고 안쪽 병동으로 들어섰다. 보름째, 오늘도 어김없이 주혁의 병문안을 오게 되었다.

처음엔 상태만 확인하고 원래 계획대로 미국에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기약 없는 혼수상태로 빠져들게 되면서, 그녀의 미국행도 하루하루 늦춰지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한국에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건 잘 안다. 한주혁이 깨어날 가능성이 더 커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거나, 깨어나더라도 물속에서의 심정지와 저산소로 인한 뇌 손상이 영구적일 가능성, 그리고 일주일 전 원미란이 그녀에게 애원하다시피 강조했던 또 다른 가능성 때문에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발! 예서 양. 우리 주혁이 좀 살려줘요…! 다시 깨어나도 예서 양이 없으면 주혁이 또 엉뚱한 생각 하고 말 거야. 응?

그녀는 예서가 그의 생명의 은인이라며 연신 고마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조카 옆에 붙들어두려는 간절함을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규진과 더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사실에 커다란 희망을 품는 눈치였다.

그가 이상 없이 의식을 되찾는 것만 확인하면 떠날 것이다. 하지만 원 관장의 말대로, 또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게끔 마지막으로 얘기는 나누어야 하리라.

예서는 병실 문 앞에 서서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문고리를 잡는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지금도 믿기지가 않았다.

한주혁이 스스로 생을 놓아 버리려 했다니. 심지어 다정할 때조차 뼛속 깊은 자신감, 자기 본위의 오만함이 완전히 숨겨지지 않던 그였는데.

그런 그가 스스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 발로 과거 두 사람의 인연이 처음 시작되었던 그 장소로 돌아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나고자 했다니.

눈물이 새삼 왈칵 차올랐다. 예서는 울음이 터지기 전에 재빨리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간병인은 그녀의 도착 즉시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너른 병실에는 환자와 그녀, 오직 둘밖에 없었다.

예서는 문을 살며시 닫으려다 일부러 힘주어 쾅, 닫았다. 발소리도 죽이지 않았다. 동작도 평소와는 달리, 일부러 더 크게 기척을 내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런데도 병상에 죽은 듯 누운 남자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중문 역할을 하는 투명한 휘장을 걷고, 복잡한 의료기기 케이블로 연결된 침상 앞까지 다가가 그 앞에 앉았다.

오늘도 한주혁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어제의 그가 그 전날과 다름이 없던 것처럼. 반듯한 상앗빛 이마, 그 아래 길게 뻗은 속눈썹은 아주 약간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린 듯 완벽한 콧대와 입술, 입체적인 이목구비는 단순한 오수에 빠진 것처럼 한 치의 균열도 없다.

예서는 잔잔하게 흐르던 오디오 트랙을 그가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으로 바꿔놓았다. 겨울을 연상시키는 선율 자체가 평소 한주혁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선배.”

예서는 그의 머리맡에 앉아 한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늘 그랬듯, 이번에도 부드럽게 속삭였다.

“빨리 일어나요, 선배.”

왜 그랬어요. 내가 그랬죠, 선배 인생 살라고. 나도 그럴 거니까 선배도 이젠 그렇게 하라고요. 그런데 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 다른 쪽 눈에서 또 다른 눈물방울이 투둑 떨어졌다.

“선배. 꼭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깨어나야 돼요.”

만에 하나, 그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가지고 깨어난다면. 그럼 절대 그를 떠날 수 없으리라. 한 회장이나 원 관장과는 상관없이, 그녀가 스스로 한주혁과 제 몸 사이에 족쇄를 걸어 옭아맬 것만 같았다.

발목이 잡히는 게 두렵지는 않았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 이전의 한주혁이 아니게 된다면. 그건 결국 그녀의 책임이었다. 아무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 스스로가 그 책무와 속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예전의 그가 아니게 된다면….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이미 가슴 절반이 찢긴 것처럼 숨이 가빴다.

“선배. 맞아요. 사실은 다… 거짓말이었어요.”

애달픈 음색이 가늘게 재차 이어졌다. 절실함을 담은 두 눈이 눈물을 가득 담고, 새벽처럼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선배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이제 완전히 잊었다는 말. 서규진 씨와 잘 해 볼 거라던 말. 모두 다… 거짓이었어요.”

시선이 그의 얼굴에서, 하나로 맞물린 두 손으로 내려왔다. 그의 손은 여전히 크고 따뜻했다. 예전의 온기와 부드러움, 가지런히 정돈된 손톱과 우아한 손가락의 감촉도 모두 그대로였다.

“나, 아직도 선배를 사랑해요.”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보름 전 공항에서 곧바로 P시 호수로, 다시 SG그룹 병원으로 이동했던 때가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가 절체절명의 순간 구조되어 간신히 응급실에서 치료 중이란 말을 들었을 때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기약 없는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는 비보에, 이내 절망했다.

“사랑하니까… 선배가 제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눈을 떴으면 좋겠어요.”

영영 눈을 뜨지 않을 가능성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담당의도 말하지 않았던가. 의식만 돌아오지 않았을 뿐 전반적인 체력 상태는 좋은 편이라고.

간절한 바람은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좀 더 강렬해졌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오후, 예서는 그의 손을 잡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속삭이고 있었다.

“선배. 그냥… 깨어나기만 해줘요. 제발.”

건강히, 정상적인 상태로 일어나길 절실히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치 같았다. 그저 눈만 뜨면 좋겠다는 생각에 젖어 하루하루가 속절없이 지나갔다.

어느덧 면회 시간이 지나 있었다. 예서는 내내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고 느리게 돌아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의 것과 맞닿아 있던 병상 위 손가락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

귀가 웅웅 울렸다. 가느다란 빛줄기가 자꾸만 수면을 가르고 들어와 성가셨다.

뭔가 잘못됐어.

아래로 가라앉아야 하는데 자꾸만 그 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했다. 수초처럼 힘없이 너풀거리는 옷자락이 보였다.

그는 어떻게든 위가 아닌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애썼다. 잿빛 구덩이처럼 생긴 바닥이 그를 통째로 삼키고자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때 뭔가가, 부유하는 그의 몸뚱이를 양옆에서 붙잡고 끌어당겼다. 몸부림을 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게 수면 아래 주혁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욕지거리가 혀끝을 맴돌았다. 익숙한 병실 풍경을 보자마자 열리지도 않는 입술 사이로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실패에 대한 자괴감, 스스로를 향한 조소가 뇌리를 가득 채웠다.

등신 새끼.

김 비서가 제때 발견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별장의 위치를 극비로 부쳤어야 했는데. 병상 옆 스탠드 조명이 비스듬히 비쳐 들었다. 희미한 빛인데도 안구를 찌를 듯 강렬해 심히 거슬렸다. 상관없었다. 한 번은 실패했지만 두 번째에는 반드시 끝낼 결심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다 힘겹게 손을 뻗었다. 일단은 제 몸에 촘촘하게 둘린 이 복잡한 선들부터 제거해야 두 번째 시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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