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뒤 게이트로 들어가 혼자가 되자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늘 가보고 싶었던 미국인 데다, 어릴 때 그녀를 유일하게 아껴줬던 고모네 가족과 지내게 되었다. 게다가 차기작인 현대물 연재는 물론, 오래전에 써 두었다가 공모전에 낙선했던 정통 판타지물의 출간 반응도 썩 괜찮은 편이었다.
모든 게 지극히 순조로웠다. 출판사와 플랫폼 PD와 에디터도 평일에 어렵게 배웅까지 나와주었다. 사람이든, 일이든,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새롭게 깨닫는 요즘이었다.
공부는 시간과 정성을 쏟은 만큼 정직하게 결과로 나왔었다. 하지만 사람은 달랐다. 지금까지 사람에 대해서는, 그 반대로 느껴본 적이 훨씬 많았던 것 같았다.
어릴 때는 친할머니, 자라면서는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사랑받기 위해 늘 애쓰고 또 애썼다. 다 그녀가 부족하고 잘못한 탓이라 여기면서. 심지어 정우와도 사이좋게 잘 지내기 위해 뒤에서 더 많이 베풀고 져 주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리고 선배도….
예서는 자꾸만 시큰거리는 눈시울을 훔치고 시계를 확인했다. 마침내 탑승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데스크에 하나둘씩 줄을 서기 시작했다. 여권과 탑승권을 체크받고 탑승기와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는데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성준 선배…?
그녀가 미국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인사차 연락이라도 한 것일까.
예서는 잠깐 망설이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저만치서 앞서 걸어가는 외국인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점퍼 깃 너머로 삐져나온 남색 후드가 낯설지가 않았다.
“여보세요? 성준 선배?”
-어, 예서야. 오늘 미국 간다며. 이제야 들었네. 진작 인사 못 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선배.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한주혁과의 관계 때문에 서로 연락할 수 없는 상황임은 둘 다 잘 알았다. 박성준은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다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는 너 붙잡고 이런 말 하는 건 정말 경우가 아니긴 한데…. 휴우. 이제 주혁이도 제발 정신 차리고 정상 궤도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무슨 소리지. 이미 그러고 있는 게 아니었나.
-회사 일은 랩탑으로 하는 모양이긴 한데…. 지금은 며칠째, 어디더라? P시 호숫가에 뜬금없이 별장을 사서 두문불출 중인 모양이야.
예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순간 앞서가던 남자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대학 때 한주혁이 좋아해서 자주 입던 후드티와 같은 옷임을 알아보았다. 세 시간 전, P시의 호숫가에서 본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 위로 겹쳐 보였다.
“P시 호숫가요?”
-그렇다네. 어, 잠깐만. 지금 회사라서 가 봐야겠어. 아무튼 거기서는 좋은 생각만 하고, 잘 지내!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
어지간히 급했는지 성준은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못했다. 갑자기 가슴이 선득해지며 발밑이 꺼지는 착각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 뒷모습… 선배였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펜션을 등지고 등산로 너머로 향하던 사람은 한주혁이 맞았다. 등산객들이 무심결에 한 말이 서늘하게 재생되었다.
-겨울철 이 시간에 저기까지 가는 사람은 없어요. 나쁜 생각이라도 하지 않는 한.
-아니, 못 할 말이 아니라 실제로 1년에 한두 명씩은 꼭 물에 떠내려온다며! 여기 호수가 한강만치 깊어서 나쁜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딱이라나 뭐라나-
설마.
“저, 미스?”
그때 승무원의 부름이 예서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탑승기까지 연결된 통로에는 그녀만 남아 있었다. 들어오길 기다리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승무원이 예서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항공편 탑승객 맞으시지요? 무슨 문제라도….”
“네. 맞아요.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럼 지금 탑승해주실 수 있을까요? 15분 내 이륙 예정입니다.”
“네? 네.”
승무원은 상냥하게 웃으며 한 발짝 앞서 걸었다. 예서도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그러다 기체 문 앞에서 다시 멈춰 섰다.
“…미스?”
“죄송합니다. 저… 못 탈 것 같아요.”
“네?”
“죄송해요.”
예서는 승무원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곧바로 뒤돌아서서 다시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휴대폰의 리스트를 뒤져 누군가의 번호를 찾았다. 다행히 김 비서의 연락처는 그대로 있었다. 통화도 금세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민예서 님?
“김 비서님, 안녕하세요? 불쑥 죄송합니다.”
이렇게 눈앞에서 비행기를 놓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숨통을 조여왔다.
“혹시 선배, 아니, 한 본부장님 지금 어디 계세요?”
난데없이 전화해 파혼한 옛 연인의 위치를 묻다니 제 귀에도 해괴하게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혹시 P시 호숫가 쪽에 있나요?”
-네, 맞습니다. 잠시 드라이브 다녀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 별장에 돌아오지 않으….
“김 비서님, 거기 등산로가 있어요! 펜션 옆에요. 그쪽에 있을지 모르니 빨리 가주세요. 네?”
-예?
“빨리요! 부탁이에요, 김 비서님!”
예서가 통유리 너머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몇 분 뒤엔 완전히 깜깜해질 터였다.
“서둘러주세요! 제발… 더 늦어지면 큰일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어찌나 다급한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제대로 말도 끝맺을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보겠습니다.
다행히 김 비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곤 바로 전화를 끊었다. 예서는 공항으로 나갈 길을 황망히 찾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이 저절로 왼쪽 가슴팍을 틀어쥐고 있었다.
심장이 북처럼 크게 울렸다. 너무 세차게 뛰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이 가빴다.
***
SG 그룹 의료센터 직계 클리닉은 조용한 소란 중에 있었다. 그룹의 후계자가 생명력이 꺼져가는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막 도착한 참이었다.
환자는 산소호흡기를 단 채 구급차에서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졌다. 의료진 중 누구도 섣불리 가망 여부를 논하지 못했다. 그나마 심폐소생술로 물을 많이 토해내 폐부종의 위험은 미미했지만 상태를 단언할 수가 없었다.
김승건 비서는 굳건히 닫힌 응급실 문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는 길에 소식을 접한 한 회장과 원 관장도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전 담당의가 한 말을 회장 부부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위기는 넘겼습니다. 조금만 더 물속에 있었으면 익사했을 거예요. 다만… 최악의 경우 저산소성 뇌 손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만을 빌어야죠.
김 비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기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좀 더 빨리 눈치를 채고 동향을 살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감에 낭패감만이 밀려왔다.
최악의 경우 뇌 손상이 올 수도 있다니. 부디 그 불운만은 피해 가길 바랐다.
***
직계 병동은 한순간 장례식을 방불케 할 만큼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차례대로 도착한 한 회장 부부, 마침 한국에 나와 있던 부부의 두 딸, 뒤늦게 도착한 박성준과 방계 가족들까지 모두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어쩌다 그런 사고를 당한 거랍니까? 휴가 간다더니 거기서 겨울 낚시를 하고 있었던 건가요?”
“김 비서는 뭐하고…. 아, 혼자 갔다고 했지. 아니, 우리 SG 후계자가 호수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어차피 해외 나가 있는 걸로 돼 있으니까 외부에는 일절 알려지지 않게 철저히 단속해야겠군요.”
“그동안 죽도록 일만 했는데 뭐, 이참에 제대로 요양한다 생각하고 쉬면 되지. 고비는 넘겼으니 금방 회복될 걸세. 걱정할 거 없어.”
일가는 한동안 병동에 심란하게 남아 있다 원미란의 권고로 일제히 귀가했다. 출가외인인 두 딸까지 다 본가로 돌려보낸 한 회장은 프라이빗 라운지에 처와 단둘이 남겨지자 그제야 속내를 드러냈다.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건 우리 둘만 아는 걸로 해. 제 발로 들어간 것도…. 외부엔 철저히 단속해. 애들한테도 말하지 마.”
“이를 어쩐대요, 여보? 세상에, 이젠 하다 하다 제 목숨을 제 손으로….”
원미란이 차마 제 입으로 끝맺지 못하겠는지 입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일가의 방문이 있기 전에 주혁의 최측근, 김승건 비서의 보고가 있었다.
혹시 몰라 체크해 본 결과 공증을 마친 유언장도 있었다. 회사 주식은 모두 한 회장 부부에게 증여하고, 부동산 및 개인 재산은 민예서에게 가게끔 작성된 유서였다. 이 부분에선 설마 하며 주혁의 의도를 믿지 않았던 한 회장마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놈! 완전히 돌아버렸어, 저 녀석. 그러지 않고서야… 고작 여자 때문에.”
“고작 여자가 아니죠! 고작, 이란 말을 붙일 정도가 아니니까 그렇게 독한 각오까지 한 거 아니겠어요…!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