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바보. 선배가 아닐 게 뻔하잖아.
애당초 그 사람이 선배여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발이 자꾸만 계곡 쪽을 향했다. 예서는 다리 한가운데서 사진을 찍는 등산객을 빠르게 살폈다. 키가 큰 남자가 있긴 했지만 한주혁이 아니었다.
“저, 실례합니다. 혹시 저쪽에 다른 등산객도 계신가요?”
예서는 일행 중 제일 가까이에 있던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저었다.
“응? 아마 없을 거예요. 이 시간이면 다 내려오니까. 우리가 제일 늦은 팀이고.”
“겨울철 이 시간에 저기까지 가는 사람은 없어요. 나쁜 생각이라도 하지 않는 한.”
“예끼, 이 사람. 젊은 사람에게 못 하는 말이 없네!”
남편의 핀잔에 아내가 샐쭉하니 토를 달았다.
“아니, 못 할 말이 아니라 실제로 1년에 한두 명씩은 꼭 물에 떠내려온다며! 여기 호수가 한강만치 깊어서 나쁜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딱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나도 가게 젊은 사람들에게 들은 거니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쇼!”
예서는 재빨리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그 길로 돌아서서 다리를 걸어 나왔다. 결국 어릴 적 두 사람의 인연, 혹은 악연의 시작이 되었던 장소까지 닿지는 못했다.
하긴 계곡까지 들어가 그 바위며, 언덕, 나무와 개울을 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출국을 앞두고 순간적으로 빠져든 감상의 소치일 따름이다.
그는 실연에의 아픔을 딛고 극복해 가며 잘 지내고 있었다. 한동안 정신과 상담을 재개하고 약을 다시 먹기도 했지만,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았다. 그러니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와 회사 일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거겠지.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녀가 종용한 대로 그는 제 인생을 잘 살 것이다. 그녀와의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어쩌면 이미 잊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과거에 매여 여기까지 온 그녀야말로, 이제 미련을 떨치고 그녀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 때였다.
예서는 버스 터미널로 향하며, 남은 한주혁의 잔상마저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애썼다.
***
주혁은 등산로 끝, 인적 없는 수풀 뒤에 서서 호수를 길게 응시했다. 짧아진 해가 몰고 온 노을이 수면 위로 드리우며 흐린 윤슬을 자아내고 있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기 시작한 뒤에야 그는 시선을 거두고 폰을 집어 들었다. 공항에 대기시킨 수행원이다.
-본부장님. 민예서 씨가 방금 친구분들과 헤어져 게이트로 들어갔습니다.
“수고했어요. 철수해도 좋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간략한 보고, 마지막 지시를 끝으로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는 눈을 감고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여덟 살 소녀에게 한쪽 손목을 잡혔던 때로 다시 돌아갔다.
-살려주세요! 엄마!
웅웅,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과 아이들의 오열 때문에 처음엔 귀가 먹먹했다. 몸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매달려 있는 것 자체가 힘이 들어, 그냥 이대로 떨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때였다.
-야, 눈 좀 떠 봐! 자면 어떡해!
사이렌 소리에 섞인 여자아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자꾸만 흐려지는 의식을 번뜩 일깨웠다. 눈을 뜨고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힘을 주고 버티느라 찡그린 미간, 앙다문 입술, 그 와중에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무척 예뻤다.
그냥 놔. 안 잡아줘도 돼.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소녀가 고개를 뒤로 홱 젖혔다. 빗물이 눈 속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때 소녀의 가슴팍에 매달려 흔들리는 금빛 단추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돌아가신 엄마가 밤마다 잠옷 위에 걸치던 카디건의 금장식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말할 기회를 놓친 사이, 사이렌 소리가 더 커지더니 사람들이 달려와 아이들을 재빨리 구조해 주었다.
-저런, 둘 다 위험해! 비켜봐라!
누군가 그녀의 손 아래 매달린 그를 바위 위로 끌어 올렸다. 하지만 기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는지 그대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저를 붙잡고 있던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괜찮아? 너 엄마는….
저도 지칠 만큼 지쳤을 텐데 여전히 그를 걱정하는 눈길이 참 이상했다.
-도련님!
그때 한 무리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달려와 그를 에워싸고 안아 들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의 수행 비서들은 곧바로 그를 차로 데려가 뒷좌석에 태웠다.
-주혁아! 세상에, 이 꽁꽁 언 것 좀 봐! 큰일 날 뻔했다! 회장님에게 주혁이 무사하다고 빨리 연락해요.
큰어머니가 그의 얼굴과 손, 다리를 주무르며 연신 혀를 찼다. 그 와중에도 그녀가 생각나 창 너머로 소녀를 찾았다. 그때 주혁이 움찔, 놀라며 몸을 떨었다. 소녀의 모친으로 보이는 여자가 달려오더니 아이의 뺨을 힘껏 후려친 것이다.
너무 멀어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년 여자는 옆에 서서 엉엉 울고 있는 남자아이를 안고 버스로 황급히 달려갔고, 혼자 남겨진 아이는 고개를 수그리며 뺨을 매만지고 있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는 뺨이 붉어져 있었다. 연신 오른쪽 손목을 문지르는 걸 보면, 저를 잡아주다 다친 것 같았다. 가슴이 에일 듯 아팠다.
-큰엄마, 저기 저 애가 나 구해 준….
-네, 여보! 혁이는 괜찮아요.
주혁이 백모를 돌아보며 차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큰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옴과 동시에, 운전석의 비서가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이에요. 특별히 다친 덴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저기, 김 비서! 집에 전화해서 지아, 승아한테도 걱정 말고 하던 거 하라고 일러요. 마침 둘 다 피아노 레슨 시간이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운전석 옆의 남자가 지시대로 집에 전화를 하는 동안, 차는 어느새 계곡 밖까지 나와 있었다. 주혁이 창에 달라붙다시피 계속 여자애의 모습을 쫓다가 결국 체념하고 고개를 돌렸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뺨을 맞는 순간 가슴이 뻐근해지며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단지 그를 구해 줬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이 맞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도, 훨씬 더 폭력적이고 끔찍한 상황을 코앞에서 접한 것 같은 기시감이 밀려왔다.
-주혁아. 왜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병원 곧 도착할 거니까 누워, 어서. 세상에…. 이, 얼굴 하얗게 질린 것 봐. 얼마나 놀랐으면.
그는 백모의 무릎 위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앉아 있을 힘조차 없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소녀의 말간 눈동자, 그리고 가슴팍에서 흔들리던 금빛 단추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기억은 모래 속 꽁꽁 묻힌 사금파리 조각이었다. 사장되어 있던 그 과거의 편린은 10대 시절을 관통하던 하나의 통과의식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소녀의 가슴팍에 달려 있던 금빛 단추는 어머니의 카디건 금장식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장식은 본래의 금빛 대신 피로 얼룩져 검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예서 때문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든, 언제고 수면 위로 떠올랐을 기억이다. 단지, 당시를 떠올릴 때마다 제 혀를 끊어내고 손발이라도 잘라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작고 어릴 때부터 아팠던 너였는데. 왜 내 감정을 좀 더 스스럼없이, 기꺼이 내보이지 못했을까. 어째서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고 인정하지 않았는지.
왜 너의 아픔, 그 오랜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 후벼파고 괴롭게 했을까.
그녀가 하는 일, 목표로 삼은 업, 그것조차 민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었다. 그녀가 그 일에 몰두한다 해서 그를 향한 애정이 덜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응원과 격려를 아낌없이 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지금처럼 두 눈 뜨고, 다른 남자가 기다리는 곳으로 보내는 일은 없었을 텐데.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서규진은 SG의료센터에서 퇴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로리다로 떠났다. 민예서의 고모가 있는 LA와 꽤 먼 거리였지만, 서규진에게 거리는 문제도 되지 않을 터였다.
어느덧 노을빛이 수면 위를 짙게 드리우며 주위의 새소리도 뜸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점퍼의 지퍼를 단단히 여미고 수면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부츠도 신은 채였다. 최대한 무거워야 더 빨리 가라앉을 터였다.
어느새 얼음처럼 차디찬 물이 발목 위로, 무릎까지 올라왔다. 순식간에 물이 차오른다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물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 그가 수면 한가운데로 깊숙이 침투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얼어붙을 듯한 추위에 이가 절로 맞부딪쳤다.
새들이 죄다 둥지로 돌아갔는지 사방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그가 일으키는 처벅, 처벅, 물보라 소리만이 귀를 가득 채워 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게 됐을 때 그는 전신에서 힘을 뺐다. 무시무시한 냉기에 몸을 맡기는 순간 기포가 수마처럼 밀려들었다. 양쪽 귀가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먹먹해지며,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언젠가, 부검의가 다양한 방식으로 사망한 시신의 참상을 설명한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났다. 그중 익사한 시체가 어땠다더라.
-몸이 물 때문에 세 배, 심하면 네 배까지 퉁퉁 부어오르고 살점 조직이 종이처럼 바스러질 수 있습니다. 추락사나 목을 맨 시체만큼이나 끔찍한 형상이죠.
지금쯤 민예서는 비행기에 탔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발견된 직후의 꼴을 절대 모르게 하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다시 재회한 첫날의 모습으로 기억해 주길 절실히 바랐다.
소리 없이 눈이 오던 날, 카페 창 너머로 시선이 맞닿았을 때의 한주혁으로. 그때의 반짝이던 예서의 눈동자를 영원토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끝나고 나서도, 비록 머릿속이 완전히 빛을 잃은 전구알처럼 까맣게 명멸하고 난 뒤로도 영원히.
숨이 막혔다. 전신의 땀구멍이 활짝 열리는 느낌도 잠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무시무시한 냉기가 살점을 꿰뚫고 뼛속까지 파고들어 정처 없이 부유하는 몸 안팎을 갈가리 찢는 것 같았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 결국 이것만이 남은 유일한 선택이었다. 민예서 없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법을 알 수 없었으니까.
제 몸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민예서에게 했던 제 과오에 대한 참회만은, 세포 깊숙이 파고드는 추위의 농도만큼 크고 확실했다.
미안해, 예서야. 너를… 그렇게 시험하지 말았어야 했어.
제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뭘 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직 그의 곁에서 그 한 사람만 보는 한.
처음부터 비뚤어진 집착에 무게를 둔, 기울어진 애정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것이 최선인지보다 제 욕심과 만족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랑이었던 거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의식이 몸과 더불어 빠르게 수몰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늦은 것 같았다. 뉘우침은 짧았고 그마저도 전할 상대는 이미 아주 멀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