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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14)화 (115/124)

<114화>

가장 까다롭고 오랜 시간이 소요됐던, 미국 바이오기업 P사와의 마이크로바이옴 신약 치료제 개발 및 기술이전 계약이 성공리에 체결되었다.

업계 내 매우 괄목할만한 성과에, 국내외 언론은 관련 기사를 앞다퉈 보도하기 바빴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한주혁의 모습은 어느 기사에도 없었다. 뚜렷한 이유 없는 재택근무도 점점 길어지고 있어서 그를 둘러싼 의혹은 조금씩 더 증폭되어 갔다.

“단순한 휴가입니다. 지난 1년간 너무 무리를 하신 데다, 1월부터 다시 살인적인 스케줄이 시작되기에 연말까지는 잠시 휴식을 가지시려는 것뿐입니다.”

그룹 직계의 일정과 동향 및 대외적인 이미지를 관리하는 컨트롤 타워, 임원 비서팀에서는 외부의 문의를 그렇게 칼같이 잘랐다. 미디어 룸에서의 기자 간담 브리핑까지 끝나고 문이 닫힐 때까지, 한주혁 본부장은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같은 시간, 그는 P시의 별장 테라스에 서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겨울 안개가 윤무를 흩뿌리는 수평선 너머, 계곡과 연결된 바위들이 보였다. 아주 오래전 갑작스러운 폭우에 침수되어 인명사고를 낼 뻔했던 계곡이었다.

호수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누군가 발을 딛기라도 하면 곧바로 깨질 게 뻔했다. 그리고 얼음보다 더 차갑고 시린 물속으로 추락해 서서히 가라앉을 것이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거친 강추위였다. 그 아래 침몰한 몸뚱어리를 발견해 건져 올릴 때면 이미 한참 늦어 있겠지.

그는 계곡 쪽을 최대한 가까이서 보기 위해 테라스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하염없이 수면을 내려다보다 결국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직접 계곡까지 가보기 위해서였다.

한참 뒤 인적 하나 없는 계곡 한가운데 차 문 닫는 소리가 잔향을 일으켰다. 주혁은 길게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고적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차디찬 개울이 흐르는 바위틈을 내려다보았다. 여름과 달리, 한겨울의 물은 그저 을씨년스러운 회색빛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염없이 수면만 내려다보던 두 눈이 어느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의 의식은 순식간에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흐르기 시작했다.

***

-이럴 거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붙잡았어.

사늘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그녀를 깨웠다. 눈을 떴지만 다시 암흑이 펼쳐져 있었다. 꿈에서 깬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혹은 꿈속의 꿈에서만 벗어난 것인지도 몰랐다.

-왜 잡아줬냐고.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새카만 웅덩이 같은 바닥에 제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거울 같았다.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다시 머리 위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개새끼였어.

음색이 점점 더 무겁고 탁하게 변해갔다. 흡사 무저갱 아래서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뭐든 할 거야…. 정말로 뭐든.

예서가 힘껏 고개를 저었다.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가 나만 보길 바랐어. 그래서 네가 하는 일조차… 질투하고 시샘했던 거야. 믿어지지 않겠지만 정말로 그랬어. 그래서… 그렇게 너 상처 주고 쓰레기처럼 굴었어.

선배. 그만. 이제 듣고 싶지 않아요. 우린 이미 끝났어!

-너는 늘 빛이 났어. 그래서… 미치도록 갖고 싶은 동시에 그런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내 마음이 두려웠고, 그래서 널 피하고 싶었던 거야.

다음 순간 그녀는 방파제처럼 생긴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쏴아, 환청 같은 파도 소리에 이어 하얀 포말이 일어나는 파도가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예서야!”

핫,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조수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에 있었다. 그녀를 흔드는 손길이 어딘가 다급했다. 벽시계는 벌써 8시가 넘어 있었다.

“괜찮아? 악몽이라도 꾼 거야? 끙끙대는 소리가 계속 나길래 열어봤더니…. 세상에, 이 땀 좀 봐!”

“어… 괜찮아요. 어서 일어날게요. 언니도 출근 준비해야 되니까.”

예서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손으로 훔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저녁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다. 떠나기 전에 수민의 집에서 이틀 밤 자고 오전에 출발하기로 했던 차였다.

“그나저나 어떡해- 나도 공항에 배웅 나가고 싶은데 하필 저녁에 네 팀이나 방문이 줄줄이 잡혀서 말이야. 오전은 한가해서 출근 늦게 해도 되는데.”

“괜찮아요, 언니. 우리 이틀 동안 실컷 수다 떨었잖아요. 영원히 가는 것도 아니고 반년인데 뭘….”

“그래도 서운한 걸 어떡하니. 사람 일 어떻게 알아. 반년 계획하고 갔는데 몇 년 더 있을 수도 있고, 쭉 눌러앉게 살 수도 있는걸. 아무튼 친구들이라도 공항에 배웅 나온다니 정말 다행이다.”

예서는 엷게 웃어 보였다. 대학 때 제일 친했던 새은과 현주, 동환, 미주, 채린이 배웅을 나올 예정이었다. 아무리 저녁 비행기라도 평일인 데다 고작 반년 예정인데 다들 오겠다고 주장하니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근데 공항 가는 길에 잠깐 들린다는 데가 어디야? 아는 사람 집?”

“아… 네. 잠깐만 보고 가려고요. 근데 언니, 빨리 준비해야 하지 않아요? 벌써 9시 다 되어가는데.”

예서가 말끝을 흐리며 칫솔을 든 수민을 욕실로 되돌려 보냈다. 수민은 부리나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예서를 부동산 사무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예서의 버스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아 있어서 두 사람은 사무실 옆 카페로 들어가 간단한 아침을 들었다.

“근데 예서야. 너 집에 연락… 아직은 안 할 생각이지?”

수민이 베이글 샌드위치를 반으로 자르며 예서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약사님이 또 연락 주셔도 모른 척할 테니 걱정 마.”

“아기는….”

예서가 말끝을 흐렸다. 이틀 전 수민이 들려준 정우의 이야기가 아직도 거짓말 같았다.

정우가 잠시 혁진으로 개명했다가 결국 다시 정우로 돌아간 것, 미국에서 한국계 혼혈 아내를 만나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온 것, 결국 둘이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도 낳았다는 사실을 차례로 들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뭣보다 조카의 존재가 가장 실감 나지 않았다.

“아니에요. 7월에 한국 들어오면 그때는 연락을 해 봐야겠죠.”

“그래. 봐서 정우에겐 한번 연락해 봐. 전에도 말했지만 그때의 정우가 아니거든. 애가 생겨서 그런가, 철이 많이 들었더라고.”

“다행이에요.”

“시장 마트에서 들은 말인데 아무래도 정우네가 분가해서 나갈 것 같아. 그저께도 말했지만 와이프가 사람은 참 괜찮아 보였는데 아무래도 속은 미국인이니까…. 약사님은 뼛속까지 아들밖에 모르시는 분이고. 고부간에 트러블이 보통이 아닌가 봐.”

“…….”

“차라리 잘 됐지, 뭐. 약사님도 이참에 그렇게 품 안의 아이처럼 감싸고 돌던 아들과 떨어져서 각자 인생 살아보는 게 나으실 거야.”

수민과 헤어지고 P시 행 버스에 오르는 마음이 착잡했다. 아직 모친을 대면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정우도 그녀에게 살가운 쌍둥이 오빠였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호텔 주차장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하며 갓 태어난 딸과 아내를 책임지려 한다니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다. 26년 동안 집안일은커녕 아르바이트 한번도 안 해 본 정우다. 그 상황에서 모친과 분가해 독립한다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다.

예서는 차창 너머를 응시하다 손안의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지금이라도 수민에게 다시 연락해 물어보면 정우의 번호를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고민하던 것도 잠시, 결국 휴대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었다. 아무리 모친의 잘못이 그의 잘못은 아니라고 해도, 모친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인 이상 그에게 연락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정우가 단 한 번만이라도 그녀의 편이 되어 줬더라면. 그랬다면 지금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이었을까.

***

펜션의 카페는 비수기인데도 손님들이 꽤 있었다. 주인 얘기를 들어보니, 인근 지역 겨울 축제 행사와 얼음낚시 때문에 성수기의 절반 정도는 상시 방문객이 있는 모양이었다.

예서는 몸을 녹이는 이용객 틈에 앉아 있다가 호수가 보이는 테라스로 잠시 나가보았다. 저 멀리, 계곡과 연결된 뒷산과 등산로가 보였지만 주인은 그쪽으로 갈 수 있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정색했다.

“계곡요? 아유, 거기야 봄 여름 가을에나 좋지. 지금은 아무도 발길을 안 해요. 낚시할 데도 많은데 이 추위에 뭐 하러. 젊은 아가씨 혼자 갔다가 발이라도 삐끗하면 큰일 나니까 아서요.”

예서는 수긍했지만 결국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와 계곡 쪽으로 향했다. 주인아주머니의 경고를 귀담아들었기에 등산로로 연결되는 다리를 건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과는 달리, 다리 저편에는 겨울 등산객이 드문드문 보였다.

눈을 감고 여덟 살 때의 기억을 반추해 보려 했지만 이상하게 잘 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절규와 비바람 소리, 누군가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제 목소리까진 떠올랐지만 제 손목 아래 매달려 있던 존재는 그렇지 않았다. 기억 중 그 부분만 말끔히 도려내진 것 같았다.

이상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이!”

그때 다리 너머에서 일행을 부르는 남자의 고함이 예서의 회상을 가로막았다.

“이만 내려가자! 출출한데 저기서 뭣 좀 먹고 갈까?”

남자 여럿이 다리를 건너 펜션 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건너온 쪽에도 등산객이 몇몇 보였다. 예서는 그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 돌아섰다. 그때 뇌리를 스치는 뭔가에 고개를 돌렸다.

선배…?

그의 뒷모습을 본 것 같았다. 너른 어깨, 단정한 두상과 가지런히 정리된 뒷모습은 대학 시절의 한주혁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가 이 시간에 회사가 아닌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그의 업계 내 활약상을 다룬 경제 기사를 보지 않았던가.

예서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다리 반대쪽을 향해 걸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직접 눈으로 한주혁이 아닌 걸 확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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