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13)화 (114/124)

<113화>

이대로 뒀다가는 정말로 사달이 날 것 같았다.

“대체 뭣 때문에 헤어졌는지 죽어도 말을 안 하니까 모르겠다만, 그게 뭐든 네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붙잡으란 말이야!”

“민예서… 다른 새끼 있어.”

“뭐…?”

“다른 남자 만나고 있다고. 미국도 같이 갈 거야. 아마도.”

“야. 혹시….”

그러고 보니. 뇌리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본 적은 없지만 전에 동환과 새은, 채린과 마주쳐서 한바탕 회포를 풀었을 때 예서가 누구랑 사귈락 말락 한다고 흘렸던 기억이 났다. 스튜디오 어디더라. 블… 블랙피크? 블러드피크?

“혹시 예서 소설 드라마 제작하는 그 회사 대표야?”

“…….”

“확실해?”

“그만 가 봐.”

한주혁이 각종 서류며 랩탑 여러 대가 어지럽게 놓인 책상으로 되돌아갔다. 출장 중인 척, 몸은 여기 며칠째 갇혀 식음도 전폐하고 일에만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회사를 나가지 왜….”

“벌려놓은 일 하나씩 처리하느라 시간이 빠듯해서.”

“12월에 어디 간다던데 정말이야?”

“응.”

한주혁은 랩탑 키보드를 두드리며 여상하게 답했다. 화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눈이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그저 관성에 의해 움직이는, 잘 빚어낸 기계나 조각상의 안구처럼도 보였다. 남자인 그가 봐도 혀를 내두를 만큼 잘생긴 얼굴인데도 소름이 쫙 끼쳤다.

“어디?”

“나중에. 잘 가.”

하아, 성준이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려다 문 앞에서 멈췄다.

“너 그러다 또 쓰러질 것 같다고 어르신들 걱정이 태산이셔. 가사 직원들은 다 어디 간 거야? 다 출퇴근제로 돌렸어?”

한주혁은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할 뿐 일언반구 대꾸도 없었다. 성준은 눈알을 굴리며 문을 열어젖혔다. 그때 나지막한 저음이 뒤통수에 꽂혀왔다.

“박성준.”

“…….”

“급한 일만 처리하면 모든 게 끝날 거야.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성준이 안도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예서 잊고, 다 훌훌 털어버리고 극복하겠단 거지?”

“준비 중이야.”

“준비? 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긍정의 무언으로 여겨졌다. 아까 그러지 않았는가. 급한 회사 일만 마무리 지으면 어디 가겠다고. 분명 기분전환 겸 해외 어디든 나갔다 오려는 거겠지. 성준은 재차 숨을 들이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빛이 한껏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 그러면 밥 잘 챙겨 먹고 일도 적당히 해. 급한 거 마무리하면 다시 제대로 보자. 응?”

“잘 가.”

무뚝뚝한 대꾸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성준은 문을 닫고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로비를 걸어 나왔다. 얼마나 지독한 사랑인지, 그 또한 몇 번 연애를 거쳐왔는데도 절감되지 않는 뭔가가 한주혁에겐 있었다.

대체 왜 헤어졌을까. 마음 같아선 예서에게 찾아가 얘기라도 해 보고 싶은데.

하지만 주혁이 이제 심기일전하겠다고 하니 그럴 필요도 없을 터였다. 성준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사촌이 정말로 준비하고 있는 게 뭔지 꿈에도 모른 채였다.

***

12월이 얼마 남지 않은 주말, 기온은 벌써부터 영하를 넘나들고 있었다. 현주는 때 이른 칼바람을 뚫고 퇴근하자마자 커다란 쇼핑백 몇 개를 거실에 내려놓았다.

“예서야, 빨랑 와서 이거 봐봐! 아까 전화로 말한 것들. 너도 하나 골라.”

회사 사은품으로 받은 창고 재고품이라며 꺼낸 것들은 겨울 장갑과 머플러, 모자 등 여러 패션잡화였다. 하나같이 비싸 보였다.

“진짜 이월상품 맞아? 상태가 너무 좋은데.”

“그렇지? 다 창고에 묵혀둬서 그렇지 퀄리티는 브랜드 그대로거든. 나머지는 언니랑 엄마랑 나눌 거니까 너부터 골라. ”

“아냐. 난 진짜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먼저 사진 찍어서 엄마랑 언니에게 보여드려. 먼저 고르시면 남는 거 내가 할게.”

사진 찍기 좋게 하나씩 가지런히 정리하던 예서의 손길이 멈췄다. 손목 쪽에 풍성한 밍크 털이 부착된 회색 모피 장갑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현주야. 이거….”

“어. 이게 마음에 들어? 진짜 예쁘지? 작년 이맘때쯤 회사에서 행사할 때 꼈던 건데. 그때는 다른 거 주긴 했는데 이것도 진짜 탐났었어.”

“그 행사, S호텔에서 한 거였지?”

“응. 올림퍼스 홀.”

“그날… 라운지 카페에서 주혁 선배 만났다고 했었지? 네가 한참 뒤에 얘기해 줬던….”

예서는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운을 뗐다.

“응. 맞아. 그날이었어. 왜?”

“아, 아냐. 아무것도. 그보다 이 머플러는 패턴이 화려해서 언니분에게 어울릴 것 같네. 모자는….”

예서는 애써 화제를 바꾸려고 애썼다. 그로부터 며칠 뒤 송유영과 시내에서 마주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송유영이 보여줬던 사진 속 모피 장갑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현주였다. 다른 여자와 맞선을 보는 줄 알고 가슴이 무너졌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 부질없었다. 그가 맞선을 보든, 다른 여자와 만나다 결혼을 하든,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물건을 정리한 뒤 둘이 오랜만에 피자와 맥주를 시켜 마주 앉았다. 이제 미국으로 떠날 날이 머지않아 이런 시간이 한층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럼 아파트는? 결국 계약 안 하기로 했어?”

“응. 미국에서 돌아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려고….”

“에휴. 나 같으면 일단 매수해 놓고 세 주고 가겠구만. 이럴 때는 우리 팀장님이 귀에 못 박히게 하던 말을 들려주고 싶네. 실거주 한 채는 언제나 진리! 서울 집은 오늘이 제일 싸다…! 끅!”

“현주야. 너 너무 많이 마셨어. 이제 그만.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을게.”

“야, 앉아 봐. 내가 너라면 하고 싶은 게 또 하나 있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예서를 만류하며 자리에 도로 앉혔다.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 얘기를 늘어놓던 현주의 이야기에서 대화의 중심이 다시 예서에게로 돌아왔다.

“내가 하려던 얘기가 뭐냐면… 그래도 내가 연애를 너보단 많이 해 봤잖아? 하나같이 다 괜찮아서 시작했던 남자들이 결국 꽝이었던 경험도 이번이 벌써 몇 번이야. 후… 하긴 서로 꽝이었던 거겠지만.”

현주는 혀가 꼬여가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예서야. 너 미국 간다니까 말하는 건데…. 몇 달이 몇 년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사람 일 모르는 거니까.”

예서가 그녀 앞의 새 맥주캔을 슬쩍 가져가려 할 때였다.

“내가 너 같으면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 같아. 주혁 선배.”

캔에 닿았던 손가락이 멈췄다. 아무래도 현주가 생각보다 더 취한 것 같았다.

“현주야. 너 너무 마셨어. 내일 오프라도 일단 오늘은 이만….”

“주혁 선배가 결정적으로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람피운 것만 아니면, 다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래. 너도 아직 감정 있잖아. 아니, 많잖아.”

“…….”

“선배도 너한테 지독하게 미련 많은 눈치였고. 지금도 일에만 미쳐 산다는 소문이 파다해.”

“현주야.”

“야, 민예서. 나 취했다고 아무 말 막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막 하긴 하지. 술김에 막 하긴 하는데 그래도….”

끅, 딸꾹질이 섞인 푸념이 다시 이어졌다.

“그래도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이러다 나중에 정말 크게 후회할까 봐. 아무리 남녀 일은 둘 외엔 모른다지만, 둘이 문제없을 때는 선배가 너한테 정말 잘해 줬잖아. 뭐든 잘 사 주고 선물 보따리 가져다 안기고…. 이런 거야 뭐 선배 집안이 보통 아니니까 그렇다 해도, 제삼자인 나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일도 있어. 너 노트북 랜섬웨어 걸려서 발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공항에서 바로 달려온 거.”

말문이 턱 막혔다.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미국 가려고 비행기 타기 직전에 바로 왔었다며. 그리고 또… 이런 얘기 좀 조심스럽지만 너 가족 때문에 힘들어할 때 선배가 너 독립하라고, 필요한 자금이나 뭐든 다 지원해 주겠다고도 했었잖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심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현주가 모르는 것들도 그 외 많았다. 드디어 졸업하고 독립하게 됐을 때 거금의 보증금을 빌려주고, 뭐든 필요한 거 사라고 카드까지 억지로 떠안기다시피 했었다.

하지만 그런 금전적인 것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엄마와 싸우고 한밤중에 집을 뛰쳐나왔을 때 그가 밤샘 작업도 손 놓고 바로 달려와 주었던 일이었다.

두 사람의 처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늘 일이 최우선이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바로 달려왔던 그의 마음 때문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우선해 주었던 게 처음이어서. 나에게도 기댈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던 밤이어서.

“아니, 오해는 하지 마. 너한테 뭐라는 게 아니라… 끅! 난 당연히 예서 네 편이지… 그래도 좀….”

현주는 예서가 저만치 밀어뒀던 맥주캔을 끌어와 입구를 따고 단번에 쭉 들이켰다. 그러고는 똑같은 얘기를 한참 더 반복하다 테이블 위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버렸다. 예서는 어느새 흐물흐물 녹아버린 현주를 간신히 부축해 방 침대 위에 눕혔다.

주방을 정리하려고 식탁 앞에 선 예서는 마음을 바꾸고 남은 맥주를 끝까지 다 마셔버렸다. 머리가 알딸딸 흐려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새 현주처럼 머리를 처박고 흐느적대는 꼴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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