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12)화 (113/124)

<112화>

이경은과 박 여사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멍하니 보고 있다 그중 초로의 여인에게 다가갔다. 이경은이 올 때마다 몇 번 마주치기도 해서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저,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신당이 갑자기 왜 이렇게 날벼락을…. 혹시 주 실장이 돈 들고 튄 거예요?”

설마. 그래서 전화가 불통이었던 건가?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바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가 던진 말은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주 실장 그년이 돈 들고 튄 건 맞아요! 근데 튀면서 다 사기라고 폭로하고 갔다니까요! 그 홍련인지 홍시인지 그년도 사기꾼이었고, 연꽃 선녀랍시고 그동안 우리 등쳐먹은 인간도 싹 다 한통속이었지 뭐야!”

“네? 그게 무슨….”

“이것 좀 봐요, 여기! 주 실장이 가기 전에 전체 문자로 보낸 건데 못 봤어요? 우리 아들에게 종이로 뽑아달라 해서 가져온 거라우. 나도 굿값 미리 주려다가 며칠 미룬 게 천만다행이었지!”

여자가 내미는 종이에는 주 실장이 남긴 장문의 문자가 빼곡하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고객님들, 더는 속지 마세요. 퇴직금 조로 남은 계좌 잔액 챙겨서 이렇게 떠나는 저도 나쁜 년이지만, 신내림 받은 척 헛소리를 일삼았던 연꽃 선녀(차연화)와 그 사생아인 홍련 보살(양혜련)은 더 나쁜 것들입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양혜련은 역술인 생부의 피를 이어받아 그런지 관상과 기본 사주를 볼 줄은 알았지만 그게 다예요.]

그 아래로는 그동안 차연화가 어떻게 헛소리를 지껄여 왔는지, 양혜련은 어떤 식으로 호구 명단을 작성해 주변을 사전 탐사시켜 아주 용하디용한 족집게 보살 노릇을 했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뭐? 그럼 우리 집 양반 바람피운 것도 미리 알고 감쪽같이 맞춘 척한 거야? 응?”

옆에 있던 박 여사의 얼굴이 검붉게 달아올랐다. 마침 그 옆에 있던 여자도 한 마디 끼어들었다.

“이 연꽃 선녀도 알고 보니 아주 악질이더라고요. 보니까 여러 레퍼토리를 딱 정해서 거기 맞춰 점괘를 내렸던데 얼마나 간사한지. 아들 잘 안되는 집에는 그 집 딸이 기를 다 빼앗아 간다느니, 그 기를 다시 찾으려면 신령님의 부적을 반드시 침대 밑에 깔고 자야 한다면서 부적을 쓰라고 얼마나 입에 침을 튀기면서 열변을 토했는지 몰라!”

“그건 당한 애 엄마도 문제야! 우리 옆집도 딸 둘만 있다가 어렵게 아들을 가졌는데 자꾸 아프고 공부도 못해서 늘 속을 끓였나 보더라고. 안 그래도 딸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시모가 얼마나 구박하고 아들은 이뻐했던지, 당시에는 매일 울면서 서러워하더니 어느새 자기도 아들, 아들 하고 있더라고.”

그새 끼어든 또 다른 여자의 말에, 이경은이 움찔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다들 저를 주시하자 언성을 더 높였다.

“여기 와서도 그런 낌새를 보였겠지! 그러니까 연꽃 선녀 그 사기꾼이 옳거니! 하고 딸들이 잘될수록 아들이 기를 빼앗겨 잘 안되니 딸들 적당히 누르라고 한 거야.”

“어머? 내 동창네는 반대로 얘기했다던데? 딸이 자꾸 아픈 게 아들 때문이라 그래서 아들 기운 죽이는 부적을 써야 한다고 그랬대! 그 아들이 사실은 그 남편이랑 전처 사이 아들이었거든. 설마 그래서?”

“그래, 그거구만! 연꽃 선녀, 그 인간이 아주 교묘하게 사람 심리를 이용해서 미운 자식 더 미워하게 유도하는 거였어. 아, 생각해 봐! 전처 아들이 이뻐 보일 리가 있어?”

귀가 얇고 심지가 굳지 못하다면 얼마든지 꼬임에 넘어갈 만했다. 원래부터 눈엣가시였는데 용한 무당이 부채질을 하면 당연히 휘둘리지 않을까.

“잠깐만요! 일부러 그랬다고요?”

이경은이 여자들을 붙잡고 늘어지듯 물었다. 신당의 물건들을 부수며 악을 쓰는 소리 때문에 귓전이 따가웠다.

“그렇다니까! 완전히 사기꾼이었어. 순전히 부적 팔아먹으려고 그렇게 사람을 갖고 논 거야!”

“어, 어떻게 그런….”

이경은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을 사람들이 신고를 했는지 경찰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동안에도 그녀는 흙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일어나질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철석같이 믿었던 연꽃 선녀가 부적팔이를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해 온 것이었다니. 선입금한 복채도 복채였지만, 그동안의 세월이 한꺼번에 부정당한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예서야. 그럼 내가 그런 사기꾼 말만 믿고 널 그동안….

이경은은 마당 한 귀퉁이에 주저앉아 폐가처럼 변한 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귀가 소음으로 먹먹해 정신이 없었다. 그새 소식을 듣고 막 도착한 사람들, 뒤늦게 도착한 경찰들로 신당 부지는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경은의 내면 깊은 곳은 단지 연꽃 선녀 탓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연꽃 선녀의 신당에 발을 디디기 전, 쌍둥이가 핏덩이였을 때도 정우에게 더 애정을 쏟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우는 순하디순했던 예서에 비해 무척 손이 많이 가는 아기였다. 무척 예민하고 까탈스러워 힘들게 하는데도 밉지가 않았다. 미워할 수가 없었다.

정우 때문에 밤잠을 설치다가도 아이가 간신히 잠든 얼굴을 보면 뿌듯했다. 예서를 볼 때와는 또 다른 감격이었다. 자라면서 더 떼를 쓰고 칭얼대기 일쑤였는데도 그랬다. 엄마에게 매달리고 의지하던 아이는 제 아빠가 가버린 이후에, 그녀에게 더 큰 존재가 되었다.

참 이상하지. 그렇게 말 잘 듣고 속 썩이는 법이 없는 딸보다, 때로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러붙고 골치를 썩이는 아들이 그렇게도 애틋했다니.

“하지만… 어쩌겠어. 내 마음이 그랬는데.”

이경은은 넋을 놓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정우는 그녀에게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예서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정우가 좀 더 가엾고 소중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연꽃 선녀란 이름의 사기꾼이 그런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해도. 그따위 엉터리 점괘를 오랜 세월, 끈질기게 주입시켰다 한들 이제 와 어찌할 도리가 있을까.

***

11월을 훌쩍 넘긴 어느 날, 성준은 사촌 집을 불쑥 방문했다. 한주혁이 대외적으로는 장기 출장인 척, 집 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내부 기밀을 들은 까닭이었다. 집안에 꽁꽁 갇혀 있어도 재택으로 업무는 계속하고 있어 어른들도 터치를 못 하는 듯했다.

“맞선도 들어오는 족족 고사한다던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한때는 일에만 미쳐 살더니.”

성준은 몇 번이나 벨을 누르며 혀를 찼다. 한 시간 전에 귀가한 걸 뻔히 알건만, 아무리 벨을 누르고 전화를 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특단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예서 일로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건데. 안 열어주면 간다?]

곧바로 삑, 보안이 해제되는 소리가 울렸다.

“뭐야. 설마 했더니 아직도 예서를 못 잊은 거야? 미친놈.”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성준이 우뚝 멈춰 섰다. 실내는 땅거미가 진 바깥보다 더 어두웠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고 찬 기운이 가득한 로비는 흡사 출구가 막힌 터널 같았다. 사용인들은 다 어디 갔는지 난방도, 조명도 죄다 꺼진 것 같았다.

“야! 한주혁! 어딨어?”

1층을 두리번거리던 중 2층과 이어진 나선형 계단 위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보였다. 정적을 깨뜨리는 얼음 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성준은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라 빛이 보이는 로비 구석 서재로 향했다.

“주혁….”

그는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희미한 조명이 음영을 드리운 방 안은 평소의 서재 그대로였다. 하지만 벽에 열 맞춰 세워둔 술병, 테이블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시가 잔해는 이전에는 없던 것들이었다.

“한주혁. 너….”

“말해. 예서에 대한 일이 뭔지.”

한주혁은 담배를 다시 꺼내 물며 명령하듯 툭 던졌다. 소파에 등을 대고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둔 품이, 정적이면서도 불량해 보였다. 핀트가 나간 건 그 삐딱한 자세뿐이 아니었다.

“박성준.”

움푹 들어간 두 눈이 병자의 것 같았다. 성준은 한순간 그가 약을 한 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약에 취해 몽롱한 눈빛은 아니었다. 잠깐 드나들다 재빨리 발을 뺀, 비밀 사교클럽 연회에서 질리도록 보았던 약쟁이들의 눈동자와는 아주 달랐다.

“너… 왜 이래?”

성준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소파에 엉거주춤 앉았다. 주혁의 눈은 약쟁이가 아닌, 병자에 가까웠다. 푹 꺼진 턱과 뺨, 앙상하게 마른 얼굴은 건장한 체격과 기묘한 밸런스를 이루고 있다.

한 마디로 정상이 아니었다. 산송장이란 게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살아는 있으되 마치 죽은 것 같은 상태.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은 성준의 간을 바짝 졸아들게 만들었다.

“내가 물었지, 예서에 대한 일이 뭔지.”

“…….”

“그냥 해 본 말이면, 꺼져.”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으름장에 성준은 흠칫 떨었다. 정말로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 같았다.

“예서, 곧 미국 가는 거 알아?”

한주혁은 대답 대신 담배 필터를 깊숙이 빨아들이다 무심한 듯 뱉어냈다. 성준은 이맛살을 구기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알고 있구나. 이 자식. 게다가….

“너 아직도 예서… 못 잊었구나.”

성준은 그제야 깨달았다. 24시간이 부족할 만큼 일에만 매진하던 워커홀릭은 결국 가면이었다. 민예서에 대해 조금이라도 덜 생각하기 위해 어떻게든 일에 미쳐 있었던 거다.

하지만 결국 여기까지가 한계였던 듯했다. 겉으로만 멀쩡한 척, 곪아들던 속을 이제 더는 숨길 수 없는 때가 온 것이다. 답답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 어떡하려고 이래?”

“…….”

“이럴 바엔 차라리 가서 붙잡아! 다시 돌아오라고 매달리기라도 하란 말이야!”

이대로 무너지고 망가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편이 낫다. 그, 뭐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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