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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11)화 (112/124)

<111화>

-저는요! 부당한 대우에는 참지 않는다고요, 어머니. 우리 지우에 대해서는 더더욱! 제가 정우 씨 봐서 얼마나 참고 있는 줄 아세요?

-아니, 근데 얘가? 야! 내가 이제 정우라고 하지 말랬지!

움찔대던 것도 잠시, 정우란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돈을 얼마를 들여서 사주를 틀어놨는데 왜 자꾸 정우래! 혁진이라 부르란 말이야! 민혁진!

-엄마, 그만 좀! 제발 그만 좀 해요!

정우, 아니 혁진이 소라를 뜯어말려 방에 데려가 간신히 다툼이 종결되었다. 이경은도 씩씩대며 약국 제조실에 들어앉은 뒤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분이 가시질 않았다.

“안 되겠어. 미리 점값 예치해 둔 것도 있겠다, 그년 떨어져 나가는 부적이라도 하나 써 달라고 해야지, 도저히 이렇겐 못 살아!”

이경은은 분해서 이를 갈다 연꽃 선녀의 신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종의 매니저인 주 실장을 통해 홍련 보살과의 상담을 예약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엔 오류라고 여겼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다시 걸어봐도 똑같은 기계음만이 흘러나왔다.

“응? 번호를 바꾼 건가? 아니, 그럼 미리 알려줘야지. 사람들 어떻게 예약하라고 이래?”

이경은은 혀를 크게 차곤, 함께 신당을 다니는 동창 박 여사의 번호를 눌렀다. 혼비백산한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얘! 안 그래도 내가 전화하려고 했는데, 홍련인지 백련인지 그 무당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연락이 안 돼! 굿하기로 한 날짜 때문에 전화했더니 안 받길래 홈페이지랑 그 뭐야, 젊은 애들 하는 거, SNS인지 뭔지 들어가 봤더니 싹 다 없어졌어!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 지금 약국에 있지? 기다려봐. 내가 지금 갈 테니까.

박 여사가 다급하게 서두르다 뭘 엎었는지 깨지고 구르는 소음이 흘러들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이것들 다 도망간 거 아냐? 내가 굿값 선금으로 미리 한 장 줬는데 이를 어째! 어쩌냐고!

박 여사는 한참을 아우성치다 전화를 뚝 끊었다. 이경은은 망연자실, 끊어진 휴대폰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끝이 쭈삣 서며 등줄기에 불쾌한 소름이 돋고 있었다.

“설마. 아닐 거야.”

내가 그동안 연꽃 선녀님을 봐 온 세월이 얼만데. 요양 중인 선녀님이 그럴 리가 없어!

“그럼 그 홍련인지 청련인지 그년이….”

이경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흰 가운이 크게 펄럭이며 책상 위 약 가루가 송진처럼 바닥에 흩뿌려졌다.

***

예서는 택시를 타고 간신히 병원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두 다리가 후들거려 이를 꽉 악물었다.

새벽에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 하루 종일 침대 위에 있었다. 고된 노동에 시달린 것처럼 온몸이 아파, 어제 하루를 허비한 뒤에야 서규진의 병실에 올 수 있었다.

지금도 상태가 썩 좋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 퇴원한다 해서 더는 집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서규진에게 진 빚은 사죄해야 한다.

그는 이미 퇴원 수속을 마치고 라운지 휴게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팔꿈치 아래부터 붕대가 감긴 채였다. 그녀를 향해 웃는 얼굴이 홀쭉해져 전보다 더 기름해 보였다.

“미안해요. 규진 씨.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예서 씨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정작 사과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예서 씨가 그러면… 꼭 그 자식 대신해서 사과해 주는 것 같잖아요.”

“…….”

“어제 면회를 오긴 왔더라고요. 저도 코딱지만 한 양심은 있는지, 안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는지. 눈 돌아갈 만한 위로금과 사업상 꽤 군침 도는 제안을 던지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사과는 안 하더군요.”

서규진은 한숨을 뱉어내고 죄인처럼 머리를 수그린 예서를 돌아보았다.

“제안은 고사했고 위로금은 받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SG가 대단하고 자체 디지털 콘텐츠 계열사도 준비 중이라 하지만…. 어차피 회사도 플로리다로 옮길 거고, 엮이는 것 자체가 싫더라고요.”

그가 실소를 뱉으며 덧붙였다.

“지금은 보상의 의미로 도와주는 척해도 언제 또 뒤틀려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타입이잖아요. 그 한주혁이란 사람. 이런 말 하긴 좀 없어 보이지만, 살면서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

“예서 씨를 아직도 못 잊고 있던데요. 아니, 못 잊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그는 뭔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예서를 심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서도 더 묻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이미 잘 알았다.

“규진 씨. 미안해요.”

그녀가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서규진이 입가로 가져가던 종이컵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의 사과임을 알아챈 것 같았다.

“정말… 미안해요.”

서규진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컵을 멀쩡한 손으로 살짝 구겼다. 입술에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우리… 안 되는 거죠?”

“…….”

“고백도 하기 전에 이렇게 차이는군요. 하하…. 하긴 예서 씨도 내 마음, 진작 알고 있었겠죠.”

“미안해요. 규진 씨.”

“그 자식에게 돌아갈 건가요?”

“아뇨.”

예서가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절대로.”

“…….”

“우린 이미 1년 전에 끝났고, 그 사람도 이젠 확실히 포기할 거예요.”

“하지만 예서 씨도….”

서규진이 뭔가 더 말하려다 틈을 두었다. 종이컵을 놓아주는 손이 주먹을 살며시 말아쥐었다.

“예서 씨도 아직 감정, 남아 있잖아요.”

목이 콱 메이는 느낌에 예서가 숨을 멈췄다. 갈 곳 잃은 시선이 테이블 위를 잠시 방황했다. 차마 서규진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막상 당사자 앞에서는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척 잘도 연기했지만 지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합니다. 공연한 말을 했군요.”

서규진이 멀쩡한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때 회사에서 직원이 그를 데리러 왔다. 두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결국 다음을 기약했다.

“몸조리 잘하시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잠깐만요. 예서 씨.”

예서가 돌아서는데 서규진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우리 여전히 좋은 파트너죠? 드라마도 흥하고 차기작도 줄줄이 잘 되어야죠. 우리가 맡으면 당연히 잘 되겠지만. 아, 물론 작가님 원작이 훌륭해서지만요.”

“…그럼요.”

미안함에 망설였지만 애써 밝게 대답했다. 그제야 서규진도 안심한 듯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은 병원 앞에서 갈라져 각자의 길을 갔다. 예서는 택시 뒷좌석에서 고모의 미국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고모. 저예요. 고모부님이랑 다 별일 없으시죠…?”

두 사람은 그녀의 미국행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눴다. 주말에 오피스텔을 비우고 미국으로 갈 때까지는 다시 현주의 K시 아파트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시골집 수리가 끝나서 현주의 부모님이 다시 내려가신 게 얼마 전이었고, 현주는 연락할 때마다 적적함을 호소하곤 했다.

“네. 편도 항공권만 미리 예약해 두고 차근차근 준비하려고요. 아직 한 달 반쯤 남았으니까 시간은 충분해요. 경현이 제대하고 아예 같이 갔으면 좋았겠지만….”

통화하다 보니 어느새 오피스텔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예서는 택시에서 내려 건물 앞을 주의 깊게 살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로 들어설 때까지도 경계심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옆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동안에도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릴라치면 재빨리 일어나 바깥의 동태를 살피곤 했었다.

그가 다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하루라도 빨리 현주의 집으로 가고 싶었다.

한주혁의 존재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두려웠다. 정확히는, 머릿속의 그를 떨쳐내지 못하는 그 고독의 시간이 미치도록 싫었다.

***

신당은 폭풍우가 한차례 휩쓸고 간 폐허 같았다. 안쪽은 도둑이 든 것처럼 엉망진창이었고, 마당과 신당 안팎으로 사람들이 빚쟁이처럼 몰려와 있었다.

“아, 뭐해! 당장 경찰 불러서 이것들 다 콩밥을 먹여야지!”

“더 뒤져봤자 소용없다니까? 도망갈 때 싹 챙겼을 텐데 값나가는 게 남아 있을 리 있나!”

악다구니와 고함 속에는 오열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아이고, 세상에! 내가 그동안 여기 쓴 돈이 얼만데! 미리 준 부적값만도 몇백인데 그걸 다 갖고 날랐어! 이 오장육부를 찢어발겨도 시원치 않을 년들! 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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