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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10)화 (111/124)

<110화>

그제야 테이블 위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강제로 범하며 갈기갈기 찢긴 옷은 이미 쓰레기로 처분됐는지, 어디에도 없었다.

상관없었다. 바로 옆집이니 가운 차림으로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서는 그러는 대신 침대 옆 의자로 엉거주춤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한주혁을 길게 응시했다.

“하세요. 그 마지막 참회란 거.”

“…….”

“대신, 약속해요. 다 듣고 나면 다시는 선배 볼 일 없을 거라고.”

두려웠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한주혁은 마음만 먹으면 또다시 그녀를 범하거나, 며칠 동안 여기서 나갈 수 없도록 가둬둘 수도 있었다. 완력과 돈으로 되는 일이라면 그게 뭐가 됐든,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런데도 불안하지 않았다. 한주혁도 이제는 알 터였다. 결국 의미 없는 강압과 폭력일 뿐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만 보길 바랐어. 그래서 네가 하는 일조차… 질투하고 시샘했던 거야.”

등신 같지만 그랬다. 그래서 그게 창작이든 뭐든, 무조건 부정적인 태도로 보고 어떤 식으로든 폄하했다. 스스로도 어이없지만 정말로 그랬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정말로 그랬어. 그래서… 그렇게 너 상처 주고 쓰레기처럼 굴었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더는 의미 없는 말들이 깊은 동굴 안에서처럼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뭐라도 하고 싶었다.

차라리 죽었다가 살아나면 민예서가 그를 봐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제 손으로 기꺼이 숨을 꺼트릴 텐데. 얼마든지.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내가 원했던 건 단지… 진심과 존중이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예서가 고적한 침묵을 깨고 말을 이었다.

“대단한 걸 바랐던 게 아닌데… 한주혁 씨에게는 아주 어렵고 큰일이었던 거죠. 그걸 몰랐던 내 불찰이었어요.”

“예서야.”

“한주혁 씨. 나야말로 미안해요.”

예서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전신이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리고 아팠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바닥에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한주혁 씨 말대로예요. 내가 한주혁 씨를 그렇게 흔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어릴 적 손을 잡아준 것만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마저 후회하기에는 그에 대한 마음이 너무도 크고 깊었다. 그때의 일에 대해 굳이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다.

“선배가 그렇게 거부하고 밀어낼 때 순순히 포기하고 돌아섰더라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테니까요.”

“아니, 틀려.”

한주혁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날 흔들지 않았어도 결국 우린 이렇게 됐을 거야.”

격렬히 부정하는 어조에 평소의 오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네가 가만히 있었어도 결국은 내가 널 가만두지 않았을 거고… 결국은 이렇게 됐을 거야.”

언젠가 그녀도 말했듯, 그의 시선은 늘 민예서에게 붙박혀 있었다. 개강도 하기 전, 소리 없이 내리던 눈송이 사이로 한 여자가 보였던 그때부터.

녹지 않은 잔설이 교문 앞 여기저기 널려 있던 며칠 뒤, 이른 오전부터 지나치던 카페의 유리창 너머, 그녀가 보이던 순간 왜인지 그대로 갈 수가 없었다. 딱히 커피 생각이 간절했던 게 아닌데도 안으로 들어가 대면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 안녕하, 아니, 어서 오….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던 여자는 아직 소녀라고 해도 될 만큼 앳되어 보였다. 동그랗게 뜬 눈이 보석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지그시 응시하고 있자니 그 안으로 빠져버릴 듯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본 적이 있었나. 민예서는 그가 본 중 가장 예쁜 사람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낡고 후줄근한 카페 앞치마도 그 빛을 가리진 못했다.

“너는 늘 빛이 났어. 그래서… 미치도록 갖고 싶은 동시에 그런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내 마음이 두려웠고, 그래서 널 피하고 싶었던 거야.”

어릴 적 사고를 기억해 냈을 때는 그래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단지 우연에 불과했다. 계곡에서의 그 인연이 없었다고 해도 그는 결국 민예서에게 깊이 빠졌을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그녀가 없는 미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건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얼마 전 이모님을 만났어요. 미국으로 가시기 전에 찾아오셔서… 그 일에 대해 말씀하셨죠.”

부모님에 대한 끔찍한 과거를 들쑤시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건을 알고 나서, 그의 비틀린 내면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도 감히 할 수 없었다. 타인이 입에 올리기엔 그에게 너무 참혹한 사건이었다.

“선배를 더는 원망하지 않아요. 하지만 다시 믿고 시작할 수도 없어요.”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이 될 터였다. 비록 그가 또 한 번 자신을 범하고 상처입혔을지언정, 그의 참회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주고 싶었다. 그를 향한 감정이 여전히 컸기에.

“그러니까 이제 서로를 영원히 보내주기로 해요.”

예서는 몸을 일으켰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무언의 눈빛에, 한주혁이 망연자실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예요, 선배.”

“예서야.”

“오지 말아요. 제발.”

예서가 단호하게 잘랐다. 그리고 독하게 내뱉었다.

“자 줬잖아요. 마지막으로.”

제 귀에도 섬뜩할 만큼 지독한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원하던 대로 마지막으로 해 줬으니까… 이제 제발 놓아줘요. 그 기억을 평생 끌어안고 살든, 다 떨쳐내고 새롭게 시작하든 이젠 한주혁 씨 몫이라고요!”

“…….”

“앞으로 다신 볼 일 없을 거예요. 곧 미국으로 떠날 거니까.”

-경현이는 제대하고 일단 돌아올 건가 봐. 한국에 자리 잡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지만. 너도 이 기회에 우리랑 같이 지내다 가면 어떠니?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며. 고모 집에 한 번은 와봐야지.

어쩌다 한 번씩 통화할 때마다 고모는 미국 집에 오라는 권유를 하곤 했다. 빈말이 아닌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 고마웠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닌지라 막연히 미루고만 있던 차였다.

“서규진 그 새끼랑 같이 가는 건가?”

스튜디오 블루피크의 본사가 그의 부모님이 계신 플로리다 쪽으로 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서는 부정하려 입술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서 대표에겐 미안하지만 차라리 그렇게 믿는 편이 모두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에게 티끌만 한 여지도 줄 수 없었다.

“그 사람, 다시는 건드리지 마세요. 규진 씨와 나는 앞으로도 쭉 이어질 인연이니까.”

차기작, 그다음 작품 모두 그의 스튜디오와 계약했다. 비록 남녀 사이는 여기서 끝나겠지만 비즈니스는 계속 이어질 터였다.

예서는 가운 차림으로 현관을 향했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황망히 옆집 문으로 들어가 안전 걸쇠까지 단단히 채우는 손끝에 경련이 일어났다. 중문까지 확실히 잠근 뒤에도 떨림은 멎지 않았다.

예서는 중문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다리 사이 홧홧하던 아픔, 전신을 감도는 근육통과 둔통, 그 어느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심장의 흉통이 너무 격렬해 그 외의 감각은 일시에 마비되어 버린 것 같았다.

***

이경은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며느리와 한바탕 설전을 벌인 지 한 시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분이 가시질 않았다.

-어머니! 정말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제가 미워도 이제 가족인데 어떻게 가족의 욕을 그렇게 심하게 하세요? 우리 지우 욕까지!

최소라가 시장 귀퉁이 순댓국집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제 남편에게 애를 맡겨놓고 혼자 순댓국이나 처먹고 있을 줄은. 저번에는 옆 식당에서 그 비싼 갈치조림을 혼자 처먹고 있어서 혹시 또 애를 밴 건 아닌가 기함했건만. 어쩜 저리 식탐이 아귀 같은지.

어쨌든 그때는 그년이 지척에 있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마침 장 보러 나온 건너편 한의원 사모와 얘기하던 중, 난데없이 나타난 며느리와 손녀 험담을 보긴 했다.

-어디서 저런 것들이 굴러들어와 내 아들 신세를 이렇게 망치는지…. 말도 말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궁리한다니까요. 어떻게 해야 저 둘을 찢어놓을 수 있는지. 제발 미국으로 꺼져 버렸음 좋겠어요. 쓰잘데기 없는 애새끼도 데려가서 우리 정우, 아니 우리 혁진이 자유롭게 해 주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휴우….

그걸 듣고 있던 소라가 새파랗게 질려서 집까지 쫓아와 그녀에게 따지고 든 것이었다. 아들이 잠든 갓난아기를 방에 두고 나와, 단단히 식겁한 얼굴로 고부간 다툼을 말렸는데도 언성은 잦아들 줄 몰랐다.

-아니, 너 지금 감히 어른에게 따지는 거야? 배운 데 없는 막돼먹은 고아는 역시 다르구나, 원! 사람이 본 데 없이 자랐어도 유전자가 중한 법인데…. 우리 딸 예서도 내가 아무리 엄하게 했어도 너처럼 되바라진 꼴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어!

한국말이나 못하면 몰라. 으이그, 화상이 왜 한국어는 이렇게 잘해서 그걸 또 듣고 이 유난을 떠는 거람. 웬수!

-어머니. 말씀은 똑바로 하셔야죠! 예서 아가씨에 대해서는 저도 들은 게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뭐?

-어머니가 그렇게 못되게 하셨으니까 참고 참고 참다가 지금 연락 끊고 살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 지우 고모인데도 만날 수도 없고요. 하지만 전 달라요. 예서 아가씨는 끝까지 잘 참았을지 몰라도 전 며느리니까요.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며느리예요.

-아니, 이게 터진 입이라고 어디서 함부로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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