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몇 번이나 말했지만 선배와 나, 이제는 안 돼요. 나는 이미….”
이미 마음을 정리했어요. 아니… 정리하려고 결심한 지 오래예요.
예서는 최대한 단호하게 들리기를 바라며 냉랭하게 덧붙였다. 두려움에 전신이 떨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차분하게 응시하면서.
“그러니 선배도 선배 인생을 살아요. 제발.”
더는 상처 받고 싶지 않으니까. 선배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간들조차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요, 제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규진 씨나 내 주변 사람들 앞에도.”
예서는 한주혁이 조용히 동요하는 사이 그의 옆을 스쳐 가 현관으로 향했다. 한주혁의 상처받은 얼굴을 더는 보기 괴로웠다.
등 뒤에서 씨근거리는 숨결이 와닿았다. 어느새 그에게 다시 잡혀 있었다. 부서질 듯 무시무시한 악력에 이어 시야가 거꾸로 돌았다.
너무 놀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목소리를 낸 것은 이불도 없이 휑한 매트리스 위로 던져졌을 때였다.
“선배, 그만! 이러지 말아요, 제발!”
머리채가 잡히는 아픔에 입술을 질근 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통증은 머리칼을 움켜쥔 악력에서만 느껴졌다.
힘껏 물었다고 생각한 것은 제 아랫입술이 아니라 한주혁의 혀였다. 어느새 그녀의 입 안 가득 파고든 그의 것이 그녀의 이 끝에 짓눌린 것이다.
하지만 혀는 물러나긴커녕 더 깊숙이, 더 가열차게 예서의 입 속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사고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흐, 읏… 으….”
피에 얼룩진 키스가 멎은 뒤로도 그는 예서를 놓아주지 않았다. 품에 더 바짝 당겨 안는 손길이 그악스러웠다. 그의 무게에 밀려 허리가 뒤로 넘어가는 순간, 다른 쪽 손이 원피스 자락과 속옷을 한꺼번에 헤집고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선배! 미쳤… 흐윽! 그만!”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저항하며 울부짖는 헐떡임, 짐승처럼 씨근거리는 숨이 한데 뒤얽혔다. 한주혁이 바르작거리는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타고 있었다.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어. 내 인생을 살겠다고!”
광기에 번뜩이는 두 눈이 젖어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한 번만… 얘기를 들어줘, 제발.”
하지만 지금 그가 요구하는 건 얘기가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행위였다. 한주혁은 완전히 미쳐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지 못하면 숨이 끊어질 것처럼 구는 걸 도저히 막을 재간이 없었다.
“이거 놔요!”
엄청난 힘 앞에 발버둥 쳐 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원피스가 난폭하게 찢기며 단추가 매트리스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외음부를 더듬고 돌기를 끄집어내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허벅지를 쓸다가 다시 위로 올라와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흐읏, 아, 그, 만! 선….”
브래지어를 허리까지 내리고 굶주린 아이처럼 정신없이 빨아대는 입술과 혀에 숨이 가빴다. 무슨 짓을 해도 그를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가슴은 그의 타액에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다시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예서가 본능적으로 다리 사이를 꽉 오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쪽 무릎이 다리 사이를 강제로 벌려대는 통에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구멍을 거칠게 쓸다 안으로 쑥 밀어 넣는 손가락에 머리끝이 쭈삣 서는 것 같았다.
“아! 아파! 아파요, 그만!”
힘껏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아, 하아, 미친 사람처럼 거칠게 씨근덕대는 제 숨결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뜨뜻한 점막 안을 훑고 쑤시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훨씬 더 거대한 물건이 가랑이를 치대고 비벼 왔다.
“흣… 안….”
예서가 흐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비에 젖은 숲 냄새 같은 체향, 농밀하다 못해 숨이 막힐 것 같은 열기와 온기 모두,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제 몸처럼 잘 알던 것들이었다. 다시는 맞닿을 일이 없으리라 믿었던 무형의 것들이기도 했다.
“이렇게 날 거부하는 게, 그 새끼 때문이야?”
응? 그가 제 것을 다리 사이에 문지르다 사납게 물었다. 예서의 손톱이 제 팔뚝을 바늘처럼 깊숙이 쑤셔왔지만 통각이 마비된 양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서규진, 그 새끼랑 잤어?”
제 귀에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씨발. 끝 간 데 없는 욕설도 함께였다.
“아흑!”
갈라진 틈을 치대던 성기가 단박에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그는 하나로 맞붙은 채 예서의 몸을 꼭 끌어안고 한 쪽 귀에 입술을 묻었다.
“아니. 그 새끼는 너한테 손끝 하나도 못 댔어. 보면 알아.”
벼랑 끝에 매달린 것처럼 쥐어짜는 신음이 흘렀다. 경부 앞까지 치받쳐 들어온 기둥의 단단함이 묵직했다. 맞지? 어떻게든 제 짐작을 확신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대답해.”
퍽, 퍽, 내벽을 후려치듯 꿰뚫고 박혀오는 살점에 정신이 혼미했다. 안쪽을 쉼 없이 찌르고 들어오는 쾌감을 부정하려 울음을 터뜨릴 때였다.
“대답하라고…!”
한주혁이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괴로운 듯 신음을 터뜨렸다. 예서는 목덜미며 쇄골이 척척하게 젖어 들고 나서야 그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의 눈물을 직접 볼 순 없었다.
한주혁은 그녀의 목 안쪽을 빨고 깨물며 허릿짓에 미친 듯 가속을 붙였다. 죽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그의 것을 콱 조이며 찌걱거리는 제 몸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를 거부하고 밀어내는 대신 흣, 아흣, 하고 자꾸만 비음을 머금었다 뱉어내는 제 목구멍 역시.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데도 꺼질 듯 말 듯, 넋이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차라리 기절해 버리고 싶은데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몸이 처지는 순간을 용납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까무러칠 것 같으면, 극한으로 치닫던 감각 위로 새로운 쾌감과 고통을 동시에 가했다. 유두를 이 끝으로 할퀴고 긋거나, 허리를 뒤로 빼서 더 깊숙이 콱 찔러오는 등 어김없이 또 다른 충격으로 전이되곤 했다. 내벽이 찌릿하다 못해 헐어버릴 것 같았다.
“서… 선배… 흐윽!”
미친 짓거리였다. 작년 이맘때쯤 헤어질 결심을 하고 그에게 결별을 선언한 후 그를 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이런 짓까지.
“아, 악!”
흐느끼는 헐떡임이 잦아들자 단단한 물건이 경부 앞을 거세게 들이받았다. 쾌감보다 고통이 더 앞섰다.
그 통각을 달래기라도 하듯, 한주혁이 속도를 늦추며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면 예서의 마음이 돌아설 것처럼. 그녀가 이대로 영원히 그에게 붙들려 있기라도 할 것처럼.
가슴이 눌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내벽을 가르고 짓뭉개지는 감각이 재개되며 젖은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열기와 둔통, 자지러지는 비명 끝에 그가 마침내 짐승처럼 억눌린 신음을 뱉어냈다. 터질 듯 한껏 부풀어 올라 있던 기둥이 파정하며 비릿한 소리가 귀를 후벼파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눈물과 땀, 그의 체액이 튄 온몸이 끈적거렸다. 개처럼 헐떡이는 두 숨결 아래, 예서의 몸이 매트리스 바닥으로 꺼질 듯 가라앉았다.
손끝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눈을 떴을 때 구름처럼 폭신한 이불 속에 있었다. 새 이불과 가운 특유의 부드러운 냄새가 났다. 방은 터널처럼 어둡고 숨 막히게 더웠다.
제발 악몽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새 침구와 가운의 감촉, 낯선 공기만으로도 이미 진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절하듯 쓰러지기 전의 상황은 꿈이 아니었다.
그대로 누운 채 시선을 천장에서 정면으로 돌린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크고 새카만 그림자가 벽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한주혁이 두통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양손에 머리를 짚고 소파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녀가 깨어난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암순응된 예서의 시야에, 미동도 않고 이쪽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빛이 환시처럼 어른거렸다. 망막이 앞섶을 풀어 헤친 드레스 셔츠, 정장 바지를 간신히 인식했다….
예서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오랜 습관대로 벽을 더듬었다. 보조 등 스위치를 정확히 짚어낸 손끝에서 딸깍, 소리가 나는 동시에 아담한 공간에 빛이 깃들었다. 눈에 익은 구조의 방은 그녀가 누운 매트리스, 책상과 식탁, 최소한의 빌트인 가구만이 갖춰진 광경이 몇 시간 전과 똑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잔 건지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하지만 하체 쪽 통증이 더 심했다. 침대 아래 발을 디디려고 하는 순간 다리 사이에 찌릿한 아픔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은은한 조명 아래 한주혁이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물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고개를 수그린 그녀에게 불쑥 내밀었다.
“마셔.”
물잔을 받아 들어 그대로 면상에 뿌려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놀랍게도, 정말 없었다.
예서는 물컵을 간신히 받아 들고 고개를 젖혔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물이 달았다.
“죽 가져올게. 기다려.”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예서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뒤늦게 제 몸을 다시 살폈다. 잠든 새 씻겼는지 가운 안도 말라 있었다. 엉망으로 젖었던 몸이 거짓말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그사이 한주혁은 비서를 시켜 가져온 죽을 보온병에서 그릇에 옮겨 담아 가져왔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그렇게 강제로 안고, 씻기고, 이제는 제때 채우지 못한 끼니까지 챙기고 있다니.
“필요 없어요. 제발 내 눈앞에서… 아니, 내가 나갈게요.”
예서는 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이를 힘껏 악물고 한 발짝씩 걸음을 뗐다. 가방을 찾으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내 물건 어딨어요.”
“한 시간.”
그가 느릿느릿 다가와 그녀와 중문 사이를 가로막았다. 단지 앞에 섰을 뿐인데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만 줘, 예서야.”
“…….”
“마지막 참회쯤은 들어줄 수 있잖아.”
제발. 그의 먹먹한 눈이 그렇게 덧붙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