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택시를 쫓아 무리하게 속력을 내진 않았다. 민예서가 어디에 사는지 호수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민예서를 태운 택시와 단 한 번도 신호등이 엇갈리지 않아 오피스텔에 거의 동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민예서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그를 보고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고는 황망히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출입 관리 데스크로 다가섰다.
주혁은 유리문 너머로 그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다 그녀를 뒤따랐다. 데스크 경비원에게 재빨리 인사하고 중문에 출입 카드를 찍으려던 민예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귀신을 본 것처럼 등잔만 해져 있었다.
“선배! 지금 무슨….”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그때 데스크에 앉아 있던 초로의 경비원이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구면인 것처럼 반갑게 인사하는 둘의 모습에 민예서의 동공이 급격히 흔들렸다.
오랜만에 보는 그런 얼굴이 무척 예뻤다. 동시에, 가슴이 아릴 듯 괴로웠다. 예전에는 그가 저를 버릴까 봐, 떠나갈까 봐 두려움에 떠는 동요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그 성질이 달라져 있었다.
“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그럼요. 그럼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이사 오신 건가요? B동 2110호 맞죠? 가만있자, 이사차는 못 봤는데….”
“아직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중문에 카드를 찍기 전 지갑에서 지폐 여러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정중히 올려놓았다.
“고생하시는데… 약소하지만 마음의 표시입니다.”
“예? 아니, 전에도 주셨는데 또 이러시면….”
경비원은 오만원권 지폐들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럼 한 장만 받겠습니다. 나머지는….”
“아닙니다. 직원분들께서 다 같이 커피라도 드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는 다시 인사를 해 보인 뒤 중문에 카드를 찍고 민예서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 한가운데 자리한 거대한 장식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민예서가 중문 밖에 서 있었다. 울 듯이 일그러진 얼굴마저 눈이 부셨다.
민예서는 마침내 중문 안으로 들어서서 그 앞까지 걸어와 멈췄다.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한지 수심이 어리다 못해 그늘이 져 있었다.
“B동 2110호요?”
분노와 혼란이 뒤섞인 눈동자가 마음에 쏙 들었다. 헤어지겠다고 선언한 뒤, 민예서의 얼굴은 늘 일관되게 차디찬 돌덩이 같았다.
그래서 그 어떤 감정이라도 끌어내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비록 그게 끝 간 데 없는 분노라 할지라도.
“일부러 거길 계약한 거군요. 내가 어디 사는지 뻔히 알고.”
민예서는 입술만 달싹일 뿐 더 말이 없었다. 하긴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옆집이 비기를 기다렸다가 이사를 가자마자 바로 계약해 그녀와 마주칠 기회를 엿보는 미친 짓까지 벌일 줄은.
“선배. 정말 미쳤어요?”
민예서가 주먹을 꼭 말아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차라리 저 주먹으로 그를 때리고 후려치길 바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내가 정말… 경찰에 신고라도 하길 바라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매물이 나왔길래 정식으로 매수했고, 내 집을 내가 원할 때 왕래하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선배가 오늘 규진 씨를 왜…. 갑자기 또 왜 이러는지 내가 모를 것 같나요?”
민예서의 눈에 핏발이 섰다. 뭐든 좋았다. 어떤 욕설을 하고, 비난하고, 실컷 공격해도 다 감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무감한 눈으로 그를 벌레 보듯 응시하고 돌아서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선배는 전에도 그랬죠.”
“…….”
“최인하. 인하 오빠가 내게 고백할 것 같으니까 바로 날 불러내서 사귀자고 한 거, 기억 안 나요?”
하지만 막상 닥쳐보니 꼭 낫지만도 않았다. 민예서가 그를 보는 눈에는 이제 짙은 혐오와 경멸까지 떠올라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 만큼 아팠다. 무형의 흉기가 심장을 단번에 꿰뚫고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천천히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가지긴 싫지만 남 주기도 싫어서… 그래서 무리해서 날 불러내 호텔까지 미리 예약해 두고 사귀자고 하지 않았냐고요. 똑같이, 이번엔 서규진이 눈에 거슬린 거겠죠.”
“…….”
“규진 씨와 잘 만나는 것 같으니까 또 발동한 거예요. 혼자만의 소유욕이든, 승부욕이든, 오로지 선배밖에 모를 그 비틀린 마음이!”
“아니.”
주혁이 악문 잇새로 내뱉었다.
“그런 게 아니….”
“제발 그만해요!”
예서가 크게 소리쳤다. 감정이 격앙되어 있을 때도 언성을 높이는 일이 거의 없던 여자였다. 젖은 두 눈이 극도의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이제 더는… 못 참겠으니까.”
호흡 자체가 어려운 듯, 목소리가 꺼질 듯 가라앉았다. 어깨와 흉부가 크게 들썩이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아, 그녀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다 말을 이었다.
“한주혁 씨 말이 맞아요. 내 옆집은 나랑 아무 상관 없고 문제 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떠날게요.”
“…….”
“오늘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그때 중문이 열리며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가 로비로 들어섰다. 예서는 곧바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일부러 로비 제일 구석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버튼을 다시 누르는 손짓이 다급했다. 문이 닫히고 주혁의 시야에는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다른 쪽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이내 21층에서 내려서자 민예서가 복도 끝을 향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현관문 번호 키를 황급히 두드리려 했지만 주혁이 좀 더 빨랐다.
민예서의 입을 틀어막고 그 옆의 문을 여는 데까지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띠링, 2110호 현관문이 자동으로 닫히며 민예서는 순식간에 신발장과 그의 몸 사이에 자리했다.
“이게 무슨 짓… 아!”
중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민예서를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겁에 질린 토끼처럼 바들바들 떠는 얼굴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동시에 그의 심장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왜일까. 예전에는 이렇게 불안에 떨며 울먹이는 얼굴이 마냥 흡족했는데 더는 그렇지 않았다. 자꾸만 뒷걸음질치는 민예서의 위로, 몇 시간 전 서규진에게 주먹을 휘둘렀을 때의 스스로가 겹쳐졌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눈물을 흘렸던 제 등신 같은 꼴까지.
-네가 알기나 해? 우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그 애가 날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를 멍하니 보던 서규진을 향해 미친놈처럼 지껄였었다.
-세 번이나 고백하고 세 번 다 차였어. 그러고도 내가 사귀자고 하니 단번에 나한테 왔지. 민예서는 그만큼 내게 깊이 빠져 있었어. 내가 무슨 좆같은 짓을 해도 절대 돌아설 여자가 아니었다고.
올곧고 꾸밈없던 고백, 사귀긴 싫지만 남과 엮이는 것도 보기 싫은 거냐 따지듯 가하던 힐난, 불안에 울먹이던 얼굴, 갑자기 군대에 간다고 했을 때의 망연자실하던 표정, 미국으로 곧 떠난다고 통보하던 순간 충격에 젖어 들던 낯빛.
그 모든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 심장을 거세게 후려쳐 현기증마저 일었다.
“예서야. 내가….”
민예서가 벽에 기대 서서 움찔 떨었다. 그를 보는 시선은 두려움과 당혹감 그 자체였다.
-나는 누구와도 사귈 생각이 없어.
-누가 됐든, 우리 둘 중 하나가 끝내고 싶을 때 순순히 놓아주기로 하자.
-나 너, 다시는 안 봐.
-그래서 넌. 그만하고 싶어? 만약 끝내고 싶다면, 네 의향에 따를게.
일부러 떠보고, 애정을 확인하고, 상처받으면서 매달리는 과거의 민예서를 떠올리는 순간 심장이 부서질 것 같았다.
“내가 정말 미안해.”
-솔직히 수상이 되었다고 해도 진심으로 응원하진 않았을 거야. 어차피 낙선했으니까 솔직히 말하는 거지만.
게다가 그녀가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꿈마저 폄하하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했다.
-민예서는 내 병든 손가락이야. 내게 있어 민예서의 존재는 그래. 잘라낼 수도 없고, 품고 가기엔 너무… 감당하기엔 너무 커. 그래서 피곤해.
어떻게 그따위 말을 내뱉었을까. 이 여자의 면전에 대고. 지난날의 이기심과 오만에 대한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와 심장을 짓누르다 산산이 비산하는 것 같았다. 뼛속까지 한기가 몰려들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뭐든 할 거야… 정말로 뭐든.”
이제는 명확히 보였다. 자신이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그저 카드와 돈만 듬뿍 쥐여주고 물질적으로 풍족하게만 해주면 그게 다라고 믿었다. 예서가 정말로 원하는 건 진심, 그 하나뿐이었는데.
“선배.”
민예서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를 부르는 특유의 맑은 음색에는 일말의 희망도 묻어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선배와 나, 이제는 안 돼요. 나는 이미….”
주혁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절망에 짓눌려 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이미? 이미 서규진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일까.
그럼 나는 어떻게 살라는 거지? 이대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데.
민예서 없이는 그저 숨만 쉬고 연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린 제 앞날이 너무도 뻔히 보였다. 손바닥 위처럼 명확하고 또렷한 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