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07)화 (108/124)

<107화>

-이 자식아! 너, 도대체 뭐 하고 다니는 놈이야! 어?

우렁찬 고함과 욕설에도 그는 단말기를 귀에서 떼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업무 보고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한 회장이 듣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닌지라 다시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건 이미 들은 거잖아! 결론만 알면 됐지, 뭘 더 구구절절 얘기해.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아…. 아무튼 조사 끝나면 바로 병원으로 가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합의금도 최대한 맞춰줘. 쌍방폭행이라도 네가 먼저 시작했다며. 원만하게 합의 안 하고 일 커졌다가 언론에서 냄새라도 맡으면 속수무책이라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합의금은 얼마를 주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사과를 할 마음은 없었다.

-그쪽이 등신인 건 내 알 바 아니지만 나야 고마울 뿐이지. 그쪽이 가치도 모르고 놓친 보석을 내가….

서규진의 신랄한 음성에 다시 심장이 조여들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면 뼈가 부러지도록, 아니, 아예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잔인하게 더 패 버렸을지도 몰랐다.

잠시 후 주혁은 반쯤 멍한 채 경찰서를 나왔다. 조사와 탐문은 어이없을 만큼 짧게 끝났다. 어차피 피해자가 합의에 의해주면 사건이 자동 종결되니 서에서도 그를 더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는 김 비서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에 익은 그룹 병원 건물이 보일 때야 김 비서가 멋대로 여기까지 데려온 걸 알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때 본관 앞에 멈춰 선 택시에서 누군가 내려 건물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무도 잘 아는 뒷모습이었다. 땅거미가 진 어둠 속에서도 한눈에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실루엣이다. 주혁은 차에서 내려 곧바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두 눈 가득, 서규진이 몸서리쳤던 광기가 다시 떠올라 있었다.

***

환자가 잠이 든 데다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간호사의 말에 예서는 병동 스테이션 앞에서 돌아섰다. 시비가 붙었던 가해자가 SG그룹의 후계자였기 때문인지 서규진의 병실은 직계 전용 구역에 있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혔다. 예서는 다리에 힘이 풀려 병동 라운지 휴게실 구석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닌 듯했지만, 사건의 전말을 듣고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 지금 외근 때문에 S호텔 쪽에 와 있는데 소월로에서 서규진 씨랑 주혁 선배 둘이 난리가 났다니까? 말도 마! 둘이 드잡이하는데 엄청 무서웠어! 깜짝 놀라서 내리려고 하는데, 시커먼 경호원들이 나타나서 못 보게 하려고 촘촘하게 둘러싸더라.

두 시간 전 현주에게 뭘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다가 뜻밖의 소동을 듣게 되었다. 얼마 전 서규진과 영화관에 갔을 때 현주와 그녀의 남자친구 커플과 우연히 마주쳤고, 어쩌다 보니 영화가 끝난 뒤 넷이 더블데이트처럼 식사를 하게 되어 현주도 서규진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뭐…?

-말도 마.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맞더라. 주혁 선배가 서규진 씨를 차에 밀어붙이면서 멱살을 틀어쥐는데 둘 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어.

현주는 SG 의료센터 구급차가 와서 서규진을 데려갔고 한주혁도 차에 타면서 현장이 빠르게 수습되었다고 덧붙였다.

-둘 다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았어. 다만 서규진 씨가 팔을 좀 삐끗한 것 같더라고. 어, 예서야. 나 지금 가봐야겠다. 미팅 시간 5분밖에 안 남았어!

아직 에디터, PD와 회의가 남아 있어 곧바로 병원에 올 수가 없었다. 한참 뒤 오는 길에 서규진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봤지만 치료 중인지 연결이 되진 않았다.

예서는 머리를 뒤로 젖혀 벽에 기댔다. 지끈거리던 머릿속 가득, 북소리 같은 진동이 계속 울려댔다. 무슨 일로 두 남자가 몸싸움까지 벌인 건지 전혀 짐작이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S호텔에서 입구로 들어오던 한주혁의 시선이 테라스 너머의 그녀를 찌를 듯 보다가, 맞은편 서규진을 빠르게 훑는 걸 보았다. 그리고 소동이 벌어진 건 서규진이 그녀와 헤어져 사무실을 향해 출발한 직후였다.

나 때문이구나. 우리가 교제한다고 믿고 있을 테니까.

예서가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짐작이 간다고 해서 그 이유가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한주혁의 미친 짓거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그들과 상관없는 사람까지 다치게 하다니.

그때 현주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예서는 텅 빈 휴게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통화에 응했다.

-어, 예서야. 통화 괜찮아?

“응. 지금 병원 라운지야. 규진 씨 어떤지 보러 왔는데 자고 있어서 만나진 못했어.”

-아, 그렇구나. 근데 예서야. 음… 방금 미팅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마음에 걸려서. 네가 지난주에 그랬잖아. 서규진 씨가 고백하면 받아들여 진짜로 사귀어야 할지, 여기서 끝내는 게 나을지 아직도 고민 중이라고.

응, 예서가 심란함에 꺼져가는 소리를 냈다.

-이 상황에 물어보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너… 아직도 주혁 선배 못 잊고 있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목구멍이 턱 막혔다. 현주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서규진이 고백해오길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 자체가 그 방증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얘기 끝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작년 언제더라. 맞아, 11월 말쯤 S호텔에서 회사 행사가 있었을 때, 그때 선배랑 잠깐 얘기한 적 있어. 대화 중 정작 오간 말은 거의 없었지만.

현주는 당시 한주혁이 그녀를 불러 오랜 침묵 끝에 꺼냈던 말을 들려주었다. 예서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현주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지랖인 거 알아. 미안. 근데 선배가 정말 힘들어 보이긴 했어.

“…….”

-안 그래도 너 심란할 텐데 괜히 얘기했나 보다. 신경 쓰지 마. 그나저나 서규진 씨는 어떻대?

예서는 현주와 좀 더 얘기를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한주혁이 현주를 앉혀두고 했다는 말이 한꺼번에 떠올라 심장을 두드려댔다.

-예서는 잘 지내나 해서.

-무슨 일 있으면 알려줄 수 있을까.

-대가 없이 부탁하는 건 아냐.

이제 와 다 무슨 소용이라고….

눈물과 실소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예서는 라운지 휴게실을 나와 내일 재방문 예약을 한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SG 직계 전용 병동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한주혁이 여기 오진 않을 것이다. 그가 서규진에게 사과할 리 없으니까.

그가 아는 한주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쌍방폭행이지만 시작은 그가 했을 테고, 멀쩡히 길 가던 사람을 붙잡아 기어이 이 상황까지 야기했겠지만 뉘우치거나 반성할 리 만무했다.

출구를 나와 전철역과 가까운 후문이 어느 쪽인지 두리번거릴 때였다. 귀에 익은 저음이 그녀의 뒤통수에 와 박혔다.

“민예서.”

방금까지만 해도 여기서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 믿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남자의 음성이기도 했다.

예서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막 어스름이 내려앉은 주차장 부지에는 둘밖에 없었다. 조명등에 비친 한주혁은 더 크고 위협적으로 보였다. 예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그를 경계의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서규진 보러 온 건가?”

“네.”

하,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비소가 공기 중 흩뿌려졌다. 찢어진 입매가 잔혹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속이 참 쓰렸겠어. 전 남친에게 얻어터진 현 남친 꼴을 보고 있자니.”

“본인이….”

예서가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은 있으신 건가요? 남을 다치게 해놓고도 어쩌면 그렇게….”

“자각이 있으니까 한 짓이야.”

“…….”

“나한테 그러더군. 너 같은 여자를 놓친 등신이라고.”

그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예서가 두 걸음 물러섰지만 거리는 거의 좁혀지지 않은 채였다.

“제정신 똑바로 박혔으면 그런 말을 지껄인 새끼를 가만 놔뒀을 리 있어?”

“회사 생각은 전혀 안 하셨나 봐요. 규진 씨가 합의해주지 않으면 결국 그룹이나 선배에게 좋을 게 없을 텐데요.”

“그깟 좆같은 합의, 안 해줘도 상관없어. 확실히 끝장내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예서는 더 듣지 않고 돌아섰다. 더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지금 한주혁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저히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하지 않았다.

***

“그깟 좆같은 합의, 안 해줘도 상관없어. 확실히 끝장내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야.”

일이 커지든, 언론이 얼마나 찧고 떠들든 상관없었다. 민예서가 그 새끼랑 기어이 잘돼서, 제 손이 더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지는 것보다는 뭐든 나을 것 같았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민예서는 돌아서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가 뭐라 발광하든, 더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꼿꼿하고 단아한 등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빠른 보폭은 금세 택시를 잡아 그 안으로 사라졌다. 주혁도 제 차 문을 열고는 운전석에 앉자마자 바로 시동을 걸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걸 제지할 어떤 이성도 남아 있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