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민예서는 내 거야.”
“……?”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쭉 내 거라고. 알아듣겠어?”
착 가라앉은 저음인데도, 언성을 높이는 것보다 더 오금을 저리게 했다.
남자는 눈 깜짝할 새 그의 코앞에까지 와서 섰다. 긴 속눈썹 아래 두 눈이 광기에 차 있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것 같았다.
“하.”
하지만 규진도 보통은 넘었다. 사양길을 걷던 부친의 사업체를 지금의 위치에까지 올려두기까지 나름 산전수전을 겪어 왔다.
“이제 알겠네.”
규진이 실소를 터뜨렸다. 어이가 없었다. 남자가 누군지 생각날 듯 말 듯 했지만, 민예서의 전 남자친구란 것만은 확실했다.
“댁이 그 사람이군요. 바로 그 전 남친.”
이제야 짚이는 게 있었다. 조금 전 민예서는 식사 중 테라스 너머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갑자기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었다. 그녀가 보던 지점에 바로 이 남자가 있었던 거다.
“그래서 갑자기 여기까지 쫓아와 날 죽이기라도 하려던 겁니까? 이게 대체 무슨 짓이죠?”
“결혼, 절대 못 해.”
남자는 그의 질문엔 아랑곳없이 제 할 말만 했다. 규진의 눈초리가 험상궂게 변했다.
“뭐? 댁이 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어.”
“헤어진 지 1년이나 넘었으면서 무슨 상관이냐고!”
규진도 반말로 응수하며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아무리 그래도, 10대도 아니고 대로변에서 주먹다짐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전신에 한기가 일며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 정도로 눈앞의 남자는 어딘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미쳐 빡 돌 정도로 궁금하다면 확실히 말해주지.”
일단은 이쯤에서 떼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팽팽한 긴장감, 두 눈 가득한 광기에 숨이 막혀 왔다.
“예서 씨랑 꼭 결혼까지 갈 거야. 내가 아주 적극적으로 프러포즈를 할 거니까.”
“아니.”
남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규진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침이 목울대를 크게 꿀렁이며 넘어갔다.
“민예서는 너와 결혼하지 않아. 아니, 할 수 없어. 나한테 돌아올 거니까.”
“하….”
규진의 입에서 다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새끼가 얼굴만 허여멀건 멀쩡해서, 아주 미친놈이네. 이제 와서 뭔 개소리야, 도대체.
“그것만 똑바로 알면 돼. 그러라고 뒤에서 박아준 거니까.”
남자는 한쪽 눈썹을 오만하게 치켜올렸다. 끝까지 안하무인, 건방지게 구는 태도에 규진의 배알이 뒤틀렸다.
“차는 보험 처리해 줄 테니 연락하시고.”
“별 등신 같은 새끼를 다 보겠네. 누가 저런 여자 놓치래? 어?”
거친 욕설을 내뱉는 규진의 얼굴도 이젠 파르라니 달아올라 있었다. 단순히 차만 박히고 불링을 당한 거면 차라리 미친개에게 물린 셈 칠 터였다. 하지만 이제 저와 잘될 일만 남은 민예서가 아직도 제 여자인 양,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느니 지껄이는 개소리에 단전에서부터 열기가 끓어올랐다.
“댁이야말로 잘 들어. 민예서 씨는 이제 그쪽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야.”
원래는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귀국길에 준비한 특별한 선물을 건네려고 했지만 계획을 바꿨다. 다음 주 미국 최대규모 OTT사와 큰 계약이 마무리되는 날, 그 기념으로 회사에서 회식 파티를 열어 민예서와 플랫폼 스태프들도 초대할 예정이었다.
그때 단둘만 있게 될 때 민예서에게 정식으로 만나자고 청할 계획이었다. 물론 결혼을 전제로 한, 진지한 교제가 될 것이다.
“민예서 씨는 지금 나와 잘 만나고 있어.”
아직은 상호합의로 부담 없는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눈앞의 미친개에게 곧이곧대로 사실을 말해줄 의무까진 없으리라.
“그쪽이 등신인 건 내 알 바 아니지만 나야 고마울 뿐이지. 그쪽이 가치도 모르고 놓친 보석을 내가….”
규진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일순 뺨에 엄청난 타격감이 일며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이 하나가 뽑혀서 날아간 것 같았다. 남자의 안광이 번뜩이는 순간 재빨리 피했어야 했는데 그 순간을 놓쳐 버렸다.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차 보닛에 세차게 부딪치는 충격에 이어 다시 멱살이 잡혔다. 규진도 지지 않고 냅다 팔을 휘둘렀다. 남자는 방심하고 있었는지 빗겨나갈 뻔한 주먹에 맞아 크게 휘청거렸다. 그 역시 한 쪽 입술이 터져 있었다.
한 대씩 공평하게 주고받은 것도 잠시, 남자가 엄청난 힘으로 규진을 보닛 위에 내리누르며 멱살을 재차 틀어쥐었다. 맞은 것보다 조금 전 그가 한 말에 분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분명히 내 거라고 했지. 민예서.”
“큭…흐….”
“민예서는 내 거야.”
이가 빠득 갈리는 소리가 짐승 같은 숨결에 섞여들었다. 멱살을 움켜쥔 손에 무시무시한 힘이 실려 왔다. 규진은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절박감에 남자의 손등을 꽉 부여잡았다.
“네가 알기나 해? 우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그 애가 날 얼마나 사랑했는지….”
“…….”
“세 번이나 고백하고 세 번 다 차였어. 그러고도 내가 사귀자고 하니 단번에 나한테 왔지. 민예서는 그만큼 나한테 깊이 빠져 있었어.”
뭔가 손등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규진은 피맺힌 입술을 핥으며 제 손등 위로 떨어진 눈물방울을 믿기지 않는다는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미친개처럼 날뛰던 남자는 이제 눈가를 입술처럼 붉게 물들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무슨 좆같은 짓을 해도 절대 돌아설 여자가 아니었다고.”
대리석처럼 사늘한 얼굴에는 한 점의 균열도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섭고 섬뜩했다.
몸서리가 쳐졌다. 사업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별별 일을 다 겪고 온갖 천태만상 사람들을 봐왔지만 지금처럼 현실감이 없었던 적이 있던가.
“미친….”
규진은 악력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상대방에게 잡힌 멱살을 힘껏 뿌리쳤다. 그리고 앗, 신음과 함께 왼쪽 손목을 그러쥐었다. 보닛에 부딪칠 때 뼈가 잘못된 것 같았다. 어금니가 뽑혀 나간 구멍은 피에 젖어 뻥 뚫려 있었다.
그때 검은 중형차가 다가와 그들 옆에 서더니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내려섰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규진을 부축하고 멍하니 송장처럼 선 남자에게 달려가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본부장님, 괜찮으십니까!”
그중 하나가 남자의 상태를 살피며 어딘가로 전화해 사람들을 호출했다. 또 다른 경호원들이 구급차며 보험사로 황급히 연락하는 눈치였다. 김승건 비서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남자가 규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으십니까? 일단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본부장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일단 치료가 끝나고….”
“생각났어.”
규진은 한쪽 손목을 움켜쥐고 잔뜩 인상을 쓰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제야 미친개처럼 조용히 날뛰던 남자가 누군지 떠올랐다.
“한주혁… 맞죠?”
충혈된 두 눈이 석상처럼 선 남자와 김 비서라 자칭한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SG바이오 한주혁 본부장… 읏.”
“움직이지 마십시오. 곧 구급차가 올 겁니다.”
한주혁은 미동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뺨에 말라붙은 눈물 얼룩이 져 있었다. 규진은 아픔도 잊고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갑자기 모골이 송연했다.
제 앞에 돌처럼 선 남자가 죽은 것 같아서였다. 분명 살아 있는데도 산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
김 비서의 수화기 너머로 악에 받친 고함이 경찰서 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한태진 회장 특유의 불벼락 같은 노성이었다.
-잘하는 짓이다! 이제 하다 하다 치고 박고 싸움질까지 해? 아니, 시간이 그 새끼만 거꾸로 도는 거야? 남들 철없을 때 징그럽게 애어른이더니 이젠 남들 철들 때 거꾸로 퇴행하는 거냐고!
“죄송합니다, 회장님.”
김 비서는 그 벼락을 대신 맞으면서도 행정적인 사안을 궤도에 되돌려놓고자 애썼다.
“쌍방폭행이긴 합니다만 피해자의 부상이 최소 일주일의 입원을 요할 만큼 더 심각해서요. 일단 최대한 잘 합의해 저희 선에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호통이 웅웅 울리자 김 비서가 재빨리 덧붙였다.
“결렬될 뻔했던 이뮤노바렉스 바이오파마와의 협상도 결국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회장님.”
그는 진심으로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한주혁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그쪽에서 다시 조율한 협상안을 거부하고 협업 계획을 무효로 돌리겠다는 제스처로 읽힐까 봐 적잖이 염려를 하던 차였다.
결국 더 안달 나 있던 I사에서 30분 전 연락이 왔다. SG가 선제안했던 원래 계약대로 이행하는 데 동의하겠다는 뜻을 밝혀온 것이다.
“이리 줘요. 내가 통화하죠.”
넋 놓고 있던 주혁이 김 비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찢어진 입술에 타이는 흐트러져 있었고, 건네받은 휴대폰을 귓가에 대는 낯빛이 파리했다.
하지만 눈빛만은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야 정신이 든 것 같은 상사의 모습에 김 비서는 한숨을 삼켰다.
“접니다,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