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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05)화 (106/124)

<105화>

“빨리 왔네요? 저도 10분이나 일찍 도착한 건데.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두 시간 뒤 김 PD가 차 가지고 온다 그랬죠? 사무실에서 연재 현황 논의할 게 있다고.”

“네. 마침 근처에 점심 약속 겸 외근 일정이 있대요.”

두 사람은 애프터눈 티세트를 앞에 두고 지난 일주일간의 근황을 나눴다. 화기애애한 식사 중 차가 한 번 더 서빙될 때였다. 테라스 너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둘러 다가오는 기색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한주혁이 비서진을 이끌고 대각선 방향의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미처 눈길을 거둘 틈도 없었다. 순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깊숙이 얽혀들었다.

단지 눈이 맞닿았을 뿐인데도 등줄기에 전율이 감돌고 뒤통수가 찌릿했다. 예서는 재빨리 머리를 돌리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황망히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때 서규진이 다가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괜찮아요?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는데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그냥 손 좀 씻으려고요.”

염려 섞인 표정에 예서는 일부러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지 않으면 얼굴이 일그러질 것만 같았다. 그제야 서규진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예서는 심호흡을 길게 하며 화장실로 들어섰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반년 전 싱가포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못 본 척 평정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가만있지 못했을까.

어째서. 대체 왜.

추석 전, 시간 차를 두고 그녀를 찾아왔던 원미란과 류혜수의 말 때문이었을까. 정신과 약을 다시 먹고 상담을 재개한 데다 과로와 영양실조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그 소식 때문에…?

다시 테이블로 돌아온 예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홍차 리필을 요청했다. 그러고는 맞은편의 서규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밝은 미소를 마주하면 그녀의 입가에도 절로 웃음이 맺혔다.

“아이스크림 트레이도 왔었는데 예서 씨 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지금 가져올까요?”

“같이 가요. 무슨 맛인지 직접 보고 고르게요.”

아이스크림 바를 맛볼 동안 김 PD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침 비스트로 런치 시간도 끝나가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주혁은 협상 대상인 I바이오파마사와 열띤 논의가 오고 가던 비즈니스 라운지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등 뒤에서 김 비서가 뭐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귀에 들리지 않았다.

“본부장님.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제 선에서 최대한 알아서 해 보겠습니다. 금액이 제시된 시점에서 이렇게 갑자기 나와 버리시면, 저쪽에서는 일부러 거래를 어렵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김 비서가 들어가서 다시 잘 얘기하세요. 아까 말한 대로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각났을 뿐이라고.”

그는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한 걸음도 늦추지 않았다. 오해를 하든, 거래가 틀어지든 안중에도 없었다.

회의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두 남녀의 잔상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동안 급속히 복용량을 늘려온 약 때문인지, 극한까지 다다른 광기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모를 일이지. 어쩌면 이미 미쳐 버렸는지도.

그는 비스트로의 테라스 구역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아까 민예서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찾았다. 하지만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때 김 비서의 어깨 너머, 호텔 입구로 나란히 향하는 민예서와 서규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뇌가 하얗게 바래는 것 같았다. 너른 보폭이 다시 둘을 쫓았을 때였다. 민예서가 회전문 앞에 도착한 한 여자의 차에 막 올라탔다. 그 뒤의 또 다른 차 운전석에 탄 서규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주혁도 곧장 제 차로 다가가 운전석에 앉았다. 주혁은 평소 업무용으로 쓰는 검은색 세단이 아닌 스틸 블루 빛깔의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그룹 소유의 S호텔에는 언제든 탈 수 있도록 주혁의 개인 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본부장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뇨.”

그는 차창을 반쯤 내리고 시동을 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김 비서는 돌아가서 회의 중단시키고 나머지 논의는 다시 날 정해 연락 주겠다고 하세요. 결렬되면 그걸로 끝인 거고.”

“본부….”

차가 바퀴를 거칠게 긁으며 움직였다. 대로로 들어선 차체는 소월로에서 목표물을 손쉽게 따라잡았다.

하지만 추월하진 않고 뒤를 바짝 쫓다가, 옆으로 바짝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하며 앞차를 노골적으로 도발해 댔다. 흡사 약 올리는 형국에 앞차의 운전자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미친 새끼.

헛웃음이 흘렀다. 10년 가까운 운전 경력 중 교통법규 한번을 어겨본 적이 없었다. 딱지 떼 본 기록도 전무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미친 짓거리란 말인가.

주혁은 액셀을 더 세게 밟으며 앞차와의 거리를 더 좁혔다가 뒤로 빠졌다. 그랬다가 있는 힘껏 후미를 박아버릴 기세로 아슬아슬하게 달라붙었다. 옆에 차량이 없을 때는 어김없이 옆으로 다가와 운전석의 서규진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곡예가 따로 없었다.

“이봐요!”

서규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차창을 내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장난해요?”

원래의 유하던 인상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가만히 잘 가다가 갑자기 도로에서 이 무슨 좆같은 작태란 말인가.

“왜 이러세요? 나 압니까? 예?”

주혁은 대답 대신 속도를 늦췄다. 다음 순간 차디찬 청색 차체는 다시 서규진의 차체 뒤로 돌아가 바짝 추격해왔다. 오후 햇살에 반사된 크림빛 차체에 속이 뒤집혔다.

민예서의 모습이 뇌리에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희고 매끄러운 얼굴, 가을 햇살을 차단한 파고라 아래 화사하게 빛나던 하얀 원피스, 일부러 공들인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한껏 차려입은 것처럼 흠잡을 데가 없던 모습을 떠올리자 핸들을 쥔 손에 바짝 힘이 실렸다.

개새끼.

정면의 뒤통수를 보자 다시 열이 확 올랐다. 불과 30분 전까지 민예서는 저 새끼와 함께 있었다. 게다가 결혼을 고려한 교제를 저 새끼와….

쿵, 몸이 확 앞으로 쏠리는 충격에 정신이 들었다. 보닛이 서규진의 차 후미와 맞물려 있었다. 서서히 후진하며 거리를 벌렸지만 앞차를 노려보는 시선은 그대로였다. 전신을 태울 듯한 분노에 잠식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의 차체가 아슬아슬하게 다시 서규진의 차 옆으로 붙었다. 당신 뭐야! 차창 너머로 거친 고함이 날아와 꽂혔다. 이제는 서규진도 악이 받힌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주혁의 차 뒤로 빠지더니 이번에는 뒤에서 들이받을 듯 근접해 왔다.

주혁이 재빨리 차체를 뒤로 빼고 상대방의 꽁무니를 잡으려 애썼다. 서규진을 다시 들이받을 기세로 거칠게 꼬리 물고 늘어졌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서규진도 지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혁을 거칠게 견제하며 여차하면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 뒤에 있던 경차에서 날아온 욕설이 바람처럼 귓전을 스쳤다.

“야, 이 개 씨발놈아!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떡해! 썅!”

불행인지 다행인지 경차는 도로를 쏜살같이 질주하며 작은 점처럼 사라져갔다. 평소 드라이브 코스로 이용되는 도로라 차량 통행이 지극히 적었다. 특히 지금은 오가는 차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로는 도로다. 이런 미친 질주를 계속하다간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질 터였다.

하지만 몸은 머리와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다. 그가 다시 돌진하는 순간, 서규진의 차가 삐걱거리며 방향을 바꿔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주혁의 이가 빠득 갈렸다. 빠져나가게 둘 생각은 먼지만큼도 없었다. 드라이빙 모드를 EB 오토에서 탑 스피드로 전환하기 직전, 서규진의 차가 코너 갓길에 멈춰 섰다.

주혁이 사납게 그 앞을 추월해 보란 듯이 서규진의 차 앞에서 멈췄다. 끼이익, 스키드 마크가 흉터처럼 땅을 할퀴며 마침내 광란의 질주가 끝을 맞았다. 그때 경차 한 대가 그들 옆에 멈춰 섰다.

“야, 이 개 씨발 좆방울 같은 것들아!”

아까 주혁에게 욕설을 날렸던 차주가 어찌나 화가 났던지 한 바퀴 빙 돌아온 모양이었다. 끝까지 내려간 차창 너머 중년 남자가 붉으락푸르락, 이마에 핏줄까지 선 채 침을 튀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야, 이, 가진 거라곤 꼴랑 외제 차밖에 없는 개좆따리 찌질한 새끼들아! 차 가지고 지랄 염병하려면 영암 서킷이나 처가서 서로 치고 박고 해! 옘병!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역병 같은 카푸어 새끼들 틈에 끼어 죽을 뻔했네. 이런 씹! 퉤!”

차는 카악, 거한 가래 소리와 함께 다시 가던 길을 떠났다. 주혁은 그에 아랑곳없이 차에서 내렸다. 뒤 차 운전석이 거칠게 열리며 서규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두 눈에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

규진은 눈을 부릅뜬 채 저보다 조금 더 큰 키의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살다 살다 이렇게 느닷없이 시비가 붙은 건 처음이다. 그것도 생판 모르는 남이랑. 그는 씨팔, 평소 하지 않던 욕까지 내뱉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당신, 도대체 뭡니까? 나 알아요?”

정체 모를 남자는 이마 위 머리칼을 흩뜨리며 제 앞으로 서슴없이 다가섰다. 놀랄 만큼 수려한 용모에, 건장한 체격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뭐지. 그럼 정말 아는 사이였나?

“당신 누구냐고!”

스튜디오가 자리를 잡기까지 각계각층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접했기에, 그중의 절반도 기억 저장고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타입을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는데. 이렇게 존재만으로도 엄청나게 위협적인 사람을.

“나?”

남자의 입매가 잔혹하게 일그러졌다. 사과는커녕 피식, 비소 짓는 태도에 규진이 미간을 좁혔다.

그제야 남자를 각종 기사에서 본 기억이 났다. 연예계 쪽이 아닌 경제 뉴스 쪽이었다. 그러고 보니 외모뿐 아니라 몸에 걸친 옷이며, 제 쪽 보닛이 망가진 차체를 보면 돈깨나 있는 부류 같았다.

“내가 누군지 알 건 없고, 이것만 확실히 알려주려고.”

남자가 짓씹듯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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