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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04)화 (105/124)

<104화>

“언니의 자식… 조카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석우 씨의 아들이기 때문이군요.”

그 말에 류혜수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스카프로 입을 가리고 시선을 내려뜨린 얼굴은 공허한 흙빛이었다. 더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요.”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문질렀다.

“석우 씨가 남긴 유일한… 그 사람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은 존재니까요.”

“…….”

“남이 뭐라든 상관없어요.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에겐 떳떳했으니까. 석우 씨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어요. 차라리 언니가 그 사람 대신 날 찔렀다면… 그래서 석우 씨가 살 수만 있었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었을 거예요.”

예서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치솟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아무리 제 사랑을 정당한 것이었다 포장하고 미화해도 설득될 의향은 없었다. 이기적이고 치졸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남겨진 사람만 고통스럽게 만들었군요. 죄 없는 어린 조카만….”

본인들의 이기심에 충실했던 결과로.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던 것 같았다. 예서는 돌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저에게 어떤 공감이나 이해를 바라지는 말아주세요.”

“…….”

“이제 용건이 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귀에도 지독하게 냉랭하게 들렸다. 하지만 일부러라도 상냥한 말투를 쥐어짤 수가 없었다. 분노가 심장에 불씨를 지피며 열기를 더해갔다. 도저히 제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선배가 모든 걸 다 기억해 냈는데도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며 이모 행세를 하려 들다니. 그들 둘 때문에 한 가정이 산산조각 나다 못해 그런 비극으로 치달았다. 그 때문에 선배는 불시에 부모를 둘 다 잃고 그런 끔찍한 장면을 뇌리에 담은 채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제게 원하시는 게 뭔가요?”

“주혁이가 굉장히 힘들어한다고 들었어요. 정신과 상담에다 약을 먹고 있다고.”

이미 원미란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예서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류혜수가 스카프로 눈가의 얼룩을 문지른 뒤 목을 가다듬었다.

“아직 민예서 씨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거겠죠. 그래서 부탁하러 온 거예요. 둘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정말로 없는 거라면, 주혁이가 민예서 씨를 완전히 끊어낼 수 있게 선을 그어주세요.”

“네…?”

“날 뭐라 욕하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난 주혁이를 정말 아끼고 그 애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여자 문제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고 흔들리는 게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예서는 당황스럽다 못해 뻔뻔스러운 요구에 말을 잊었다. 다시 이해하고 시작할 수 없겠느냐던 그의 백모, 원미란과 완전히 상반된 소망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주혁의 내면을 그렇게 망가뜨리고 뒤틀리게 만든 장본인이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게 믿을 수 없어서였다. 예서는 자꾸만 떨려오는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저와 선배는 이미 끝났어요. 그러니 그런 말씀은 선배에게 직접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혁이, 지금 입원 중이에요.”

그 말에 혀를 깨물 뻔했다.

“과로와 영양실조, 이석증까지 있다는데… 이미 그 집 어른들이 알아듣게 얘기했겠죠. 내가 말한다고 될 것 같았으면 어떻게든 만나주지도 않는 애 앞에 찾아가 간청이라도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이렇게 민예서 씨한테까지 온 거 아니겠어요?”

“…….”

“곧 출국이라 그 전에 어떻게든 마지막 부탁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온 거예요.”

“…….”

“민예서 씨.”

“저, 교제하는 사람 있습니다.”

서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라리 그와 좀 더 만나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 자신뿐 아니라, 선배를 확실히 포기시키기 위해서라도.

“좋은 사람이에요. 선배 큰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시니 곧 선배에게도 전달이 되지 않을까요?”

서규진의 마음을 이렇게 이용할 순 없었다. 입에서 뱉은 이상 현실로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제, 진지하게 다시 시작할 마음을 먹어야 하는 건 한주혁 이전에 그녀였다.

“선배 큰어머니께서도 아까 다녀가셨거든요.”

“아, 그랬…군요. 다행이에요.”

류혜수가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이 젖은 눈 위로 맺혀 있었다.

“그러니 이제 더는… 이런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예서는 재킷과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날 자세를 취했다.

“다시는 뵙게 될 일, 없기를 바라겠습니다. 앞으로 연락도 삼가해 주세요.”

쌀쌀맞은 말투에 놀란 듯 류혜수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예서는 주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서는 곧바로 출구를 향했다. 건물을 완전히 나설 때까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눈가가 뜨뜻하게 젖어 들기 시작한 건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홀로 탔을 때였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선배와 다시 함께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이미 정해진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과는 별개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가여워 가슴이 아팠다. 믿기 힘든 끔찍한 과거사, 그가 받았을 충격과 오랜 세월 끌어안고 버텨냈을 상처를 생각하면 심장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

-김 비서. 민예서 근황 보고는 이제 중단하세요. 더는 필요 없습니다.

퇴원하던 날, 김승건 비서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 큰어머니 말씀대로 이제는 포기하고 벗어나는 게 옳았다. 닥터 한의 조언대로 이제는 서로를 자유롭게 놓아줘야 할 때였다.

서로가 살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할 테니까.

결국 그 희생자가 하나에서 둘이 될까 봐 두려웠다. 상상할 수 있는, 하지만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사태일 것이다.

10월로 넘어간 가을 하늘은 무척 쾌청하고 맑았다. 주혁은 격주 토요일마다 얼굴을 비추는 총수 2세 간담회를 막 마치고, 중요한 협상 논의가 예정된 그룹 소유 S호텔로 향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퇴원한 이후로도 일견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SG바이오의 한 본부장으로서 멀쩡한 척 회사 일을 해 나가고 있었다.

신규 계약을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따내고, 신약 개발과 임상시험 성과를 속히 내라고 연구소와 제휴 업체를 채찍질하며, 주주총회에서 털끝만큼의 지적질도 받지 않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부단히 움직였다.

수시로 복용하는 약 덕분이었다. 하지만 면역치가 증가하면 그 효과도 결국은 바닥을 보이게 될 터였다.

복용량을 늘리면 늘릴수록 위험이 배가되었지만 당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위는 늘 비어 있었고 잠들기 전에는 술이 심신을 흠뻑 젖게 했지만 누구도 만류할 수 없었다.

누구도 그가 서서히 파멸로 치닫는 상황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제동을 걸었다간 그가 벌여놓은 커다란 판이 대체자 없이 흔들릴 수 있기에, 한 회장 부부는 물론 최측근 친지 주주와 임원 중 누구도 섣불리 그를 막지 못했다.

뭔가 확실히 브레이크를 걸 만한 게 있어야 했다. 그리고 백모 원미란은 그 브레이크를 작동시킬 뭔가를 가져왔다.

-오늘 TS 브랜드 론칭 쇼케이스에 둘이 왔더라.

어젯밤 원미란은 주혁에게 사진을 전송한 뒤 전화를 걸어왔다.

-알고 보니 결혼할 사람이 요즘 꽤 주가를 올리는 제작사 대표였어. 수석 디자이너 초대를 받아 동반한 모양이야. 다행히 워낙 큰 행사라 나랑 마주칠 일은 없었다만… 한눈에 봐도 너무 잘 어울리더구나. 본사를 미국으로 옮긴다는 것 같던데 결혼하면 미국으로 가지 않을까? 대표란 사람이 원래 거기 교포니까.

주혁은 일부러 첨부된 사진을 보지 않고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어떻게든 그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으려는 백부와 백모의 노력이 가상했지만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새벽에 휴대폰을 켰을 때 또다시 원미란의 문자가 와 있었다.

[주혁아. 이젠 정신 차릴 거지? 완전히 포기할 수 있는 거지? 응?]

날이 밝자마자 이번엔 한 회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원래 제 일정이었던 골프 일정 때문에 이른 오전부터 각국 바이어들과 필드에 나가 있었다.

-어, 한 본. 다음 주 주말에 시간 좀 내야겠다. JC물산 전영길 사장 알지? JC그룹 장남. 그 집 차녀가 이번에 한국 들어온다더라. 한번 좀 만나봐라. 응?

“일정이 있습니다.”

-그럼 비서진 통해서 날짜 좀 맞춰봐.

“연말까진 어려울 듯합니다. 미국에서 곧 화상 회의 콜이 올 예정이라 이만 끊겠습니다.”

-야! 주혁아! 이제 그만 좀 정신 차려, 이 녀석아! 너 지금 계속 망가져 가는 거, 언제까지 우리 식구만 알 거 같냐. 응? 그러다 너 중요한 순간에 사고 내면 완전히 골로 가는 거라고! 주주들 중 우리 편만 있을 거 같아? 너 고꾸라지길 바라는 치들이 얼마나 많은 줄 모르냐고!

주혁은 이만 가봐야겠다며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서서히 망가지는 몸 상태는 몸의 주인인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

어쩌다 보니 약속 시간보다 15분 빨리 도착해 버렸다. 호텔 직원은 그녀를 비스트로 테라스석으로 안내해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서규진도 곧 도착할 거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2주 전 플로리다에서 돌아온 이후로도 둘 사이는 변한 게 없었다. 플랫폼 담당자들에게 돌린 것과 똑같은 현지 선물을 건넸을 뿐 그는 아무 언질이 없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모친과 나누던 전화 통화를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여러 번 곱씹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이야기가 맞았는데.

다시 예전처럼 연락을 하고 만나는 동안, 예서는 불안과 안도라는 상충된 감정 한가운데에 있었다. 양가적인 감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먼저 운을 떼면 처음 생각대로 이 관계를 종결지어야 할지, 혹은 원미란과 류혜수에게 한 말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게 좋을지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이 바뀌었다. 우연히 들은 얘기로는, 스튜디오 측에서는 이미 공식적으로 교제하는 것으로 인지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했다.

“예서 씨!”

그때 테라스로 다가오는 서규진의 목소리에 예서의 고민도 거기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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