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세요?”
-류혜수라고 해요. 주혁이 이모입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대면해 본 적 없던 한주혁의 혈연이었다. 세종시에 있는 그의 외조모 댁에 몇 번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이모님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한주혁도 그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한 적이 없었다.
“네… 안녕하세요.”
대체 무슨 일로 연락을 한 걸까. 혹시 방금 만났던 원미란과 같은 용건인 건….
-초면에 실례지만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편한 곳을 말해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무리 많아도 50대 초반일 여자의 음색에는 어딘가 메마른 구석이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원미란과는 완전히 다른 타입일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예서의 음색도 원미란을 대할 때보다 더 건조하게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신지 먼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전화로 할 말은 아니라서요.
“…….”
-우리 주혁이에 대한 얘기인 건 맞아요. 그 애가 아니라면… 내가 민예서 씨와 만날 일 자체가 없겠지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이미 헤어졌고 더는 그에 대해 드릴 말씀이….”
-길어야 30분이에요. 민예서 씨, 다시는 찾아올 일 없을 테니 딱 30분만 내주면 고맙겠어요.
“…….”
-내일 캐나다로 출국해요. 회사 토론토 지사로 이동하니 당분간 한국에 오긴 어려울 거예요.
예서가 피로감에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더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제가 막 외출에서 돌아온 참이고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서… 멀리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댁 근처로 갈게요. 위치 정해서 문자로 보내주면 도착했다고 연락할 테니 그동안 편하게 일하세요.
통화가 끝난 뒤에도 예서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한꺼번에 원미란과 류혜수 두 사람을 만난다니 우연치고는 너무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이 오면 곧바로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뒤 노트북을 켰다. 심란함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리고 깨달았다. 안경을 쓴 남자애를 어디서 보았는지 그제야 기억이 났다. 사진에 박힌 얼굴은 예서의 의식을 순식간에 18년 전 폭우가 몰아치던 계곡 한가운데로 돌려놓았다.
그 남자애였어. 선배가….
저도 모르게 오른쪽 손목을 돌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선을 그린 상흔이 시야에 들어왔다.
***
주혁은 김 비서가 가져온 서류철 첫 장을 펼쳤다. 영상 제작사, 스튜디오 블루피크 대표 서규진의 모든 것이 단 몇 장에 집약되어 있었다. 이미 전에도 본 것이라 새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4월부터 지금까지의 행적, 그중에서도 특정인과 함께 있는 사진이 여러 장 추가되어 있었다. 서규진의 사내에서는 이미 대표의 짝사랑을 잘 알고 응원하는 분위기인 모양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봤을 때만 해도 업무상 일행일 뿐이라 여겼다. 민예서가 넘어지기 직전 재빨리 잡아주던 몸짓, 시종일관 그녀 쪽을 보며 뭐라고 지껄이던 얼굴,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주혁은 사진 속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를 담담히 훑었다. 사람이 아닌 물건을 보듯 무감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사진을 틀어쥔 악력은 사납다 못해 섬뜩했다. 그는 손에서 힘을 빼고 엉망으로 구겨지고 찢긴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실제로 이 꼴로 만들어 줄까.
플로리다 네이플스는 살기 좋고 안전한 지역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각종 범죄에서 자유로운 미국 땅은 단 한 곳도 없다. 주간의 휴가 동안 불운한 사고로 죽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혹은, 교묘하게 판을 짜 사업체를 추락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은…?
보기 싫게 뒤틀린 남자의 얼굴을 보는 동안 시야가 흐려졌다. 미간이 일그러지며 한 쪽 귀로 찌를 듯한 동통이 일어났다. 이제는 면상이 구겨진 게 사진 속 남자인지, 그 자신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서규진만 없애버리면 예서가 내게 돌아올까.
주혁은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입에서는 스스로를 조롱하는 비소만 연신 터져 나왔다.
미친 새끼. 이제는 포기하고 잊기로 했잖아. 서규진을 짓밟는다고 해서 그 애가 돌아오진 않아.
민예서가 살아 있는 한 제2의 서규진은 언제든 생겨날 터였다. 그녀가 누군가를 최종적으로 택하기 전까지 몇 명의 서규진이 스쳐 갈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그때마다 상대방의 인생을 처참한 나락 아래 굴러떨어지게 할 건가?
주혁은 사진을 서류째 벽으로 내던지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동통이 점점 더 심해져서 숨 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심장 박동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북소리처럼 커지며 혈관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전신에 힘이 빠지며 몸이 침상 아래로 기울어졌다. 차디찬 바닥이 얇은 환자복을 뚫고 스며드는 감촉에 오한이 일었다. 그런데도 육체를 똑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그는 의료진이 정기체크 겸 들어와 바닥에 쓰러진 제 몸뚱어리를 발견할 때까지 그렇게 허수아비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
류혜수는 목소리 톤처럼 차가운 인상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날카로워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예서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 기다렸나요? 차가 많이 막혀서 늦었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예서도 꾸벅 인사해 보이곤 다시 앉았다. 대형 패션 회사의 기획 총괄 매니저 겸 부장 자리에까지 오른 류혜수는 50대 초반일 나이보다 더 젊어 보였고, 성공한 커리어 우먼답게 매우 세련된 차림새였다. 가장 트렌디한 4050, 제일 주목받는 비혼 커리어 우먼이란 골자로 어느 잡지에서 인터뷰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초면에 불쑥 미안합니다. 예전에 저희 어머니 세종 집에 몇 번 왔었다고 들었어요.”
“…네.”
친할머니처럼 살갑게 맞아주던 한주혁의 외조모가 떠올랐다. 낯을 가릴 줄 몰라 제 품에서 떨어지지 않던 강아지 희동이, 온기가 넘치던 한옥집과 풍성한 밥상, 녹빛 정원까지 모두가 어제 일처럼 눈에 선했다.
“할머니께서는….”
어르신은 잘 지내시는지 안부를 물으려 했지만 류혜수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때마다 난 없었죠. 출장이나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혁이가 일부러 내가 올 수 없는 날에 맞춰 민예서 씨를 본가에 초대했기 때문이에요.”
주혁이 이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느낌은 막연하고도 확실했다. 하지만 그 정확한 이유까진 몰랐다. 류혜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입가로 기울였다. 처음의 냉정한 표정이 걷힌 낯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주혁이는 나를 싫어해요. 아니… 증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죠.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자식이기 때문에.”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은 아니었다. 그만큼 죽은 언니와 가까운 사이였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아이가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시간이 많지 않아 최대한 간략하게 말할게요. 이건 주혁이와 나… 둘만 아는 이야기예요. 우리 어머니도 모르시고요.”
류혜수는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결심한 듯 과거의 일을 차분하게 서술해 나갔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얘기가 이어질수록 담담해지는 류혜수와는 반대로, 예서는 경악으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가 언니보다 먼저 석우 씨… 주혁이 아버지를 알았어요. 같은 대학 선후배였으니까요. 그때는 나 혼자 좋아하다 끝날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미국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언니와 혼담이 오가며 결혼 날짜까지 다 정해져 있었죠.”
그래서 마음을 접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전부터 서로 남녀로서 호감을 품고 있던 두 사람은 결국 선을 넘었고, 격화된 감정은 사회가 정한 윤리와 규범마저 방치하고 짓이겼다.
“네. 알아요. 다 변명일 뿐 나는 형부와 정을 통한 상간녀고… 석우 씨는 처제와 바람을 피운 파렴치한이란 걸. 하지만 우린 그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요. 석우 씨가 언니에게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이혼을 요청했지만 언니는 그에 응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결국 그날 밤의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류혜수가 간과했던 건, 언니 류혜정이 정략혼 상대였던 한석우를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주혁의 생모 류혜정이 결국 남편을 죽이고 제 목에 칼을 꽂았다는 부분에선 예서의 안색이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고작 열 살이었던 주혁이 방문 앞에서 모든 걸 목격했다는 데선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때는 방이 컴컴해서 못 봤을 거라 믿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 그 애가 날 괴물 보듯 보면서 피하기 시작할 때 깨달았죠.”
류혜수가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꼈다. 스카프로 입을 막고 가까스로 울음을 짓누르는 눈가가 터질 듯 붉었다. 처음 카페로 들어오며 마주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주혁이가 크면서 그때 기억이… 조금씩 살아난 것 같아요.”
예서는 테이블 위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되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제야 한주혁의 감정과 공감력 결여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1년 후… 그 계곡에서 나랑 만났던 거였구나.
-야, 눈 좀 떠 봐! 자면 어떡해!
아이는 처음에 손목이 잡혔을 때부터 이상할 정도로 힘이 없었다. 행여 떨어질까, 오히려 그녀 쪽에서 두 손을 꽉 부여잡고 버텼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계곡 아래로 떨어져 물에 빠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도 기억이 조금은 돌아왔던 걸까?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의지마저 박약했던 거였나.
“어떻게든 애썼어요. 그 애의 마음을 달래고 조금이라도 이해시키기 위해서….”
류혜수의 이어지는 말이 예서의 상념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주혁이를 정말 아끼고 사랑했거든요. 지금도 그렇고… 왜냐하면… 그 애는….”
류혜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예서가 대신 그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