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죄송합니다….”
예서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린 채 입술만 달싹였다. 혼란스러운 동시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소식이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기를 원하긴 했지만 지금도 그렇게 힘들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아니, 나한테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둘이 좋아서 사귀다 헤어진 거를…. 그래도 말이죠, 무슨 일로 헤어졌는지도 모르고, 남녀 일은 당사자밖에 모르는 거라지만 만약 예서 씨도 주혁이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관장님. 저희는….”
예서가 면목이 없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더는 여지를 줄 수 없었다.
“저와 선배, 서로 맞지 않아 헤어졌어요. 그건 다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휴우, 손수건을 뚫고 나오는 한숨에 땅이 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포기할 마음은 없는지 원미란이 다시 입을 뗐다.
“그래도 예서 씨, 안 맞는다는 게 어떤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힘들어할 정도면 주혁이가 맞추겠다고 하지 않을….”
그때, 예서의 휴대폰이 그녀의 목소리를 가로막고 크게 울렸다. 서규진이었다. 지금쯤 공항에 도착했을 텐데 무슨 일일까.
일단은 받아봐야 할 것 같아 원미란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자리를 옮기려고 했지만, 하필 그들이 자리한 앞에 사람들이 몰려 서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규진 씨.”
엉겁결에 대표님 대신 이름이 튀어나왔다.
-예서 씨! 이제 게이트 들어갑니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잔소리 한 번만 하려고요.
쾌활한 목소리가 단말기를 뚫고 우렁차게 흘러나왔다.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 틈을 뚫고 나가보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저, 죄송해요. 잠깐만….”
-미안해요. 바쁠 때 전화했나 보네. 꼭 식사 잘 챙기고 잘 자면서 일하라고요. 그럼 도착하면 톡 보낼게요.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지만 꾹 참겠습니다!
마지막 말은 충동적으로 해 버린 듯 통화는 바로 끊겼다. 다시 자리에 앉는 예서의 시선이 원미란과 마주쳤다.
“혹시… 남자친구예요?”
“…….”
“맞군요.”
“아니에….”
예서가 부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 대표에겐 미안하지만 이 상황에선 원미란이 그렇게 믿는 게 낫지 않을까.
“하긴 예서 씨 같은 아가씨를 남자들이 가만둘 리가 없겠죠….”
이미 늦어버린 거구나. 우리 주혁이는 어쩌지. 원미란은 혼잣말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실망과 낭패감이 만면에 가득했다.
“결혼할 사이예요? 그러니까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이인지….”
예서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서규진에 대한 죄책감보다, 눈앞의 원 관장을 확실히 체념시키는 게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아, 그럼 내가 큰 실수를 한 거였네. 미안해요….”
“아니에요, 관장님.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원미란은 망연자실 몇 분 더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떴다. 남자친구와 잘 되어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렸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서는 그저 죄인이 된 것 같아 그녀를 태운 세단이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한주혁이 아직도 힘들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정신과 약까지 다시 복용하고 있을 줄은.
“저, 손님!”
그때 누군가 카페 출구로 나와 예서를 불러세웠다. 여자는 카페 로고가 박힌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아까 앉아 있던 자리에 이게 떨어져 있더라고요. 손님 거 맞으시죠?”
조그만 사진 속에는 화려한 유원지를 배경으로 젊은 시절의 원미란과 아이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원미란이 아까 지갑을 챙기다가 떨어뜨린 것 같았다. 예서는 카페 점원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그녀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 아이….”
그때 최근 번호를 찾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사진 속, 원미란과 닮은 여자아이 둘은 그녀의 딸인 것 같았다. 하지만 희고 말간 얼굴에 두꺼운 안경, 소녀들보다 훨씬 왜소한 몸집을 한 남자아이는 누굴까. 원 관장은 딸만 둘이었다.
혹시….?
그녀의 짐작이 맞았다. 사진을 뒤집자 ‘지아, 승아, 주혁. 디즈니랜드에서’라고 적힌 손글씨가 보였다. 동시에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었던 때가 떠올랐다.
-어릴 적엔 성장이 늦어서 정말 작고 왜소했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내가 제일 작았거든.
-정말요? 지금 덩치를 생각하면 안 믿기는데….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올라가면서 갑자기 쑥쑥 크기 시작했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가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이 정도로 작았구나. 그런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사진 속 사내아이는 우윳빛 살결에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지금처럼 굵고 남성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확실히 지금의 이목구비 선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난 적이 없었다. 사진 속 그가 몇 살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접점이 있었을 가능성도 없다.
예서는 원미란의 번호를 한참 동안 바라봤지만 결국 연락하진 못했다. 만약 하나뿐인 사진이라면 언제고 돌려줘야 할 터였다. 하지만 조금 전 그녀가 한 말 때문에 지금은 도저히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
원미란은 귀갓길에 한주혁 본부장의 입원을 전달받고 차를 병원으로 돌렸다. 그룹 산하 의료센터 VIP 병동으로 향하는 내내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염려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진 거니 무리도 아니다.
“주혁아!”
원미란은 노크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남편 한 회장은 조카 대신 급한 업무를 떠안게 되어 병원엔 없었다. 김 비서가 중문 앞에 앉아 있다 황급히 일어났다.
“사모님. 오셨습니까.”
“김 비서가 고생이네요. 이젠 하다 하다 병원 수발까지 들게 생겼으니…. 어떻게 된 거예요?”
“회의 직후 갑자기 쓰러지셔서 바로 모셨습니다. 과로와 영양실조로 링거 수액을 맞으시고 지금은 조금 안정을 찾으신 상태입니다.”
“영양실조? 세상에… 이 시대에 영양실조라니 무슨 일이야.”
중문을 확 열어젖히는 손길이 곱지 않았다. 원미란은 침상에 앉아 랩탑에 시선을 박은 조카를 보며 혀를 찼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오실 필요까진 없었어요. 별일 아닙니다.”
주혁은 백모에게 무뚝뚝하게 말한 뒤 시선을 화면으로 되돌렸다. 원미란은 그런 모습에 이골이 났는지 다시 혀를 찼다. 민예서랑 한창 열애 중일 때는 그나마 여유 있고 유해 보였건만 지금은 안팎으로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일에 미친 폐인처럼 살 거니? 응? 내가 진짜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예서 그 아가씨 말이야…. 아, 아니다. 아니야, 아무것도.”
주혁이 고개를 들었다. 예서라는 이름에 노트북 속 세상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눈빛이었다.
“예서라뇨. 무슨 일입니까.”
“아냐. 아무것도. 잘못 말한 거야.”
“큰어머니.”
주혁이 랩탑을 던지듯 밀어놓고 침상에서 일어날 기색을 보였다. 그제야 원미란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 애, 이미 다른 사람과 교제 중이더라. 결혼할 사이인 것 같아.”
“…….”
“우연히 길에서 만났어. 그래서 잠시 얘기하다 알게 됐다.”
일부러 약속까지 잡아서 만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혁은 아무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미란은 조카가 동요하면 동요할수록 겉으로는 더 초연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 포기해. 더 이상 너 자신을 혹사시키지 말고, 스스로를 구석으로 내몰지 말라는 거야.”
“…….”
“그만 잊어. 너 이제 겨우 스물아홉이야. 앞으로 얼마든지….”
“큰어머니.”
그가 차분하게 원미란의 말을 잘랐다. 다시 랩탑을 집어 드는 손에 떨림은 없었다.
“좀 쉬어야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이만 들어가세요.”
원미란은 다시 혀를 찼다. 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는 않았다.
“그래. 쉬어라. 이왕 입원한 김에 며칠 더 쉬어.”
문을 닫기 직전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입원하나 마나 노트북으로 계속 일할 건 뻔하지만, 제발 밥이라도 제대로 챙겨 먹고. 응?”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원미란은 짧게 탄식하며 병실을 나갔다. 지금 당장 며칠 입원한다고 나아질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아이 소식을 전해줬으니 저 녀석도 이제 조금씩 내려놓지 않을까.
원미란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차에 올랐다.
***
그렇게 사진을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원룸 한가운데 우두망찰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라 받지 않았다. 만에 하나 업무 관계 일이라면 문자나 톡으로 다시 연락이 올 거라 믿었다. 예서는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을 확인하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너머 보이는 얼굴이 조명 아래 서늘해 보였다. 세면기 탭을 열고 손을 씻는 중에 다시 벨이 울렸다. 벨 소리는 양치를 하고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아까의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잠시 망설이다 결국은 통화에 응했다. 하지만 폰 너머는 고적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민예서 씨 맞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