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아니, 어디 대기업이라도 다니면 월급도 꽤 될 테니 좀 빌려줄 수 있잖아.”
수민이 수저를 내려놓고 입매를 굳혔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며 정도 같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약사님. 아까 그러셨죠. 애기 엄마가 차라리 아예 착하거나 아예 못 되거나, 둘 중 하나면 속이 시원할 텐데 어쩔 땐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헷갈린다고요.”
제 귀에도 쌀쌀맞게 들리는 음성에 이경은이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수민은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약사님이 예서에게 딱 그러셨어요.”
“뭐? 그게 무슨…. 아니, 지금 예서 얘기가 왜 나와?”
“약사님이 예서에게 그렇게 대하셔서 예서가 진작에 독하게 돌아서지 못하고 계속 끌려다녔던 거란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수민은 물잔을 빠르게 비우곤 말을 이었다.
“이제 예서 좀 힘들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약사님. 남의 집 일이지만 오랫동안 예서를 봐온 입장에서 이제는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고 싶네요.”
“뭐? 뭘….”
“저도 어릴 적부터 늘 아들, 아들, 하는 집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시골집이라 더 했고요. 오빠들은 제대로 결혼하려면 작은 거라도 집이 있어야 한다며 돈 보태주실 동안 저는 반지하나 원룸만 전전하는데도 나 몰라라 하셨어요. 혼자 사는데 이만하면 됐지, 원룸이 어때서? 볕이 아예 안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반지하가 어때서? 엄마, 아빠, 할머니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학을 뗐죠.”
“…….”
“제가 밖에선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정말 많이 울었어요. 서운하다 못해 부모님과 연 끊고 싶었던 적, 한두 번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말이에요, 약사님.”
수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가방도 집어 들었다.
“그래도 제가 공인중개사 자격증 따고 뒤늦게 제 앞가림하게 되니까 다들 잘했다, 대견하다고 축하해 주시더라고요. 적어도 잘돼서 못마땅해하거나, 더 잘되면 어떡하나 그러지는 않으셨어요.”
“…….”
“예서와 연락하고 싶으시면 약사님이 직접 하세요. 저에게 부탁하지 마시고요.”
“아니, 수민 씨. 나한테 왜….”
“죄송해요. 모처럼 뵙게 됐는데 건방진 말씀을 드렸네요. 식사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 말을 끝으로, 수민은 휭하니 현관으로 향했다. 등 뒤로 이경은이 당황해서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파트 건물을 완전히 나갈 때까지 한 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9월로 넘어간 지 보름이 흘렀다. 오랜만에 외출한 예서는 카페 창 너머로 바삐 오가는 인파와 거리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규진의 이른 퇴근까지는 아직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는 오전 근무만 끝내고 예서와 점심을 든 뒤 공항으로 갈 예정이었다. 늦은 여름휴가 겸 추석 연휴를 미국의 부모님 집에서 보내고 2주 뒤 돌아올 계획이라 했었다.
그때 계단 아래 1층 입구로 들어서는 서규진이 보였다. 예서는 일어나 손을 들어 보이려 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서규진이 통화 중이었기에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는 생각이었다. 그는 예서를 보지 못한 듯했다.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소개시켜 드릴게요. 나처럼 어디 묶여 있지 않아서 일정에 제약이 없는 사람이니까 얘기만 잘 되면 연말에 데리고 갈까 해요. 맞아요, 작가예요.”
톤을 한껏 낮췄는데도 서규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신경이 온통 그의 통화로 쏠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가서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아니, 아직. 지금은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서 고백은 미국 다녀와서 하려고요. 엄마 조언 먼저 좀 듣고…. 하하.”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렘과는 거리가 먼 박동이었다. 막연히 느껴왔던 서규진의 감정을 귀로 똑똑히 확인하는 기분은 이상하게도 무덤덤했다.
담담함 뒤로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정말 좋았을 거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순수하게 친구로만 서로를 생각했다면 좀 더 오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불현듯, 스스로가 너무 이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된 이상 더는 서규진과 이대로 지낼 수는 없었다. 상대방의 감정을 기만하고 이용하는 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았다.
“예서 씨. 아까부터 안색이 조금 안 좋은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컨디션이 별로예요?”
“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당장이라도 말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결국 그의 귀국 이후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가족과 연휴를 보내러 가는 여정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10월 1일 돌아오시는 거죠?”
“네. 긴 것 같지만 막상 도착하면 휘리릭 지나가더라고요. 거기서도 하루의 절반은 재택근무라 그런지…. 이럴 때만은 월급쟁이가 맘 편하구나 싶어요.”
서규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예서는 무거운 마음으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만에 하나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되더라도 영상화 작업에 차질이 생기거나 얼굴 붉힐 일은 없을 터였다. 중간에 플랫폼 업체가 있으니 서로 얼굴 보지 않아도 비즈니스적인 부분은 기존대로 잘 진행될 것이다.
그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의 작품도 작품이지만, 차기작의 영상화까지 얽혀 있는 서규진의 스튜디오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 때문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거나 피해를 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틈틈이 안부 톡 보낼게요. 물론 시차 맞춰서.”
“네. 다만… 제때 확인 못 하거나 답이 아주 늦어도 이해해 주세요.”
“그럼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린 한배를 탄 운명인데 당연히 이해하죠. 집필 작업이 뭣보다 제일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예서 씨 건강인 거 아시죠?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 잘 챙기면서 쓰셔야 합니다.”
서규진은 마지막까지 건강에 유의하라 당부하곤 공항으로 향했다. 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예서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도 서서히 걷혔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할 때였다. 휴대폰이 울려서 화면을 확인하자 ‘원미란 관장님’이 발신자란에 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번호를 바꾼 뒤에도 기존의 주소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새 번호를 모를 텐데 어떻게 연락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망설이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잠시 후 문자가 날아들었다.
[예서 씨. 나 원미란이에요. 주혁이 큰엄마. 혹시 오늘 시간 되면 나 좀 잠깐 만나줄 수 있을까요?]
예서가 오도카니 오피스텔 앞에 서 있는 동안 문자가 다시 이어졌다.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천천히 변환하느라 애쓰는 원미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주혁이와 헤어진 마당에 나랑 만나는 게 불편하겠지만 이렇게 부탁할게요. 꼭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원미란은 미안할 정도로 기뻐하며 그녀의 전화에 응했다.
예서는 엉겁결에 약속을 잡고 오피스텔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카페 앞에 원미란의 차가 도착해 있었다.
***
당연히 한주혁의 얘기일 터였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다소 매정하더라도 원미란의 전화를 무시하거나 차단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뿌리치질 못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를 대하는 원미란의 눈빛, 살짝 코맹맹이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일말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만한 여지를 준 셈이기에 원 관장을 탓할 수가 없었다.
“주혁이가 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어요.”
“네….?”
원미란의 고운 안색에 수심이 어렸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와 콧잔등을 매만지며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정신과 약이요. 상담 치료도 몇 달 전에 시작했는데 중단했어요. 호전돼서가 아니라… 일할 때 외에는 외부와 단절하기로 한 것 같아요. 식사도 거의 안 하는 눈치고, 아예 회사에서 살고 있다니까요?”
“…….”
“이젠 겉으로도 티가 나기 시작하는데 저러다 어느 날 픽 쓰러져 버릴 것 같아요. 회사에선 원래도 일에 미쳐 살았던 애라 그러려니 하겠지만, 우리야 속사정 뻔히 아니까….”
“…….”
“예서 씨. 나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어볼게요.”
예서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희망이 없어요? 우리 주혁이랑… 이대로 끝인 거예요?”
심장이 싸늘하게 굳으며 혀까지 경직되는 것 같았다. 그 역시 그녀를 잊고 잘 지낸다고 믿었었는데.
다섯 달 전, 싱가포르에서 마주쳤을 때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오래전 송유영으로부터 호텔에서 어떤 여자와 만나고 있더라는 목격담을 들은 이후로도, 몇몇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그와 혼담이 오가고 있는 것 같다는 추측성 기사를 수차례 본 적도 있었다.
“관장님, 저희는 이미 1년 전에… ”
“알아요. 알죠.”
“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이나…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닐까요.”
“나도 처음엔 그런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원미란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만나는 사람도 없고 맞선도 절대 안 보겠다, 요지부동이랍니다. 회사 일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무리를 해대서 아랫사람이 죽어나진 않을까, 직원들이 걱정되는 거 그거 하나고요.”
“…….”
“나도 참고 참다가 상태가 오죽 안 좋으니까 결국 어제 김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예서 씨 때문이 맞다고, 그게 사실이라고 했어요. 우리 주혁이 그 뭐지, 언더커버 인턴일 때부터 뒤에서 보좌해온 김승건 비서요.”
“…….”
“예서 씨. 진짜 가능성, 없어요? 응? 주혁이가 저렇게 힘들어하는 거 정말 처음 봐요. 저러다 무슨 일낼 것 같아서 조마조마하다니까요. 아니, 1년이 되면 뭐 해요. 바로 엊그제 헤어진 것처럼 저렇게 폐인이 되다시피 썩어들어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