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가을이 어느덧 문턱에 와 있었다. 조수민은 과일 봉지를 들고 정우 약국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온 김에 옛 직장에도 들렀지만 약국 주인은 자리에 없었다. 새로운 직원은 이 약사가 막 댁으로 갔다고 알려주었다.
-어, 수민 씨! 집으로 와. 미리 전화 못 해서 미안해.
오랜만에 듣는 이경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등 뒤로는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정우 아이구나. 세상에. 동네 사람들에게서 들었을 땐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정우가 결혼을 하다니. 혼인신고만 하고 식은 안 올렸다지만….
건너편 마트 사장 부부의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었다.
-이제 겨우 7주던가? 그 정도 됐을걸? 아이고, 아주 핏덩이야. 근데 이 약사 앞에서는 애기 얘기 꺼내지도 못해. 어찌나 화를 내고 역정을 내는지.
-그럴 만도 하지, 뭐. 그동안 이 약사가 아들내미한테 투자한 게 얼마야? 근데 유학 가서 공부는 뒷전이고 배부른 외국인 마누라를 데려와 저렇게 애까지 생겼으니 얼마나 하늘이 무너지겠냐고. 이 약사 평소 아들 아들 하는 거 보면 며느리 욕심도 많았을 텐데. 그 혼혈 애기 엄마가 돈이 있어 보이진 않잖아.
-그것도 과욕이죠.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남자가 뭐라도 번듯한 능력이 있어야 그만한 아내를 얻는 거지 정우 걔는 인물만 훤하고 영 쓸모가 없잖아요. 지금도 휴학인가 뭔가 해서 대학 졸업장 하나 없어서 저 역 앞 호텔에 알바 자리 하나 간신히 얻은 모양이던데.
-그러게, 어릴 때부터 그저 지 엄마 치맛바람에 폭 싸여 자라 가지고. 진짜 제대로 자란 건 그 집 딸내미였는데 말이야. 요즘 통 안 보이데?
“애가 애 아버지가 됐네, 세상에.”
아파트로 향하는 수민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잘 되길 바라며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아들이 결국 저렇게 되었다니. 반면, 행여나 잘 될까 봐 기죽이고 눌렀던 천덕꾸러기 딸은 근 1년 만에 소설이 만화도 되고 드라마도 되면서 작가로 자리 잡아 이듬해 수도권의 소형 아파트를 매수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물론 데뷔한 지가 1년일 뿐, 예서가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 건 중학생 때부터 10년 가까운 시간이었다. 누구도 그 애의 성공을 단발성 성과나 어쩌다 얻어걸린 운으로 치부할 순 없을 것이다.
“약사님, 저 왔어요. 어머…!”
현관문을 열어 준 이 약사 어깨 너머, 이국적인 얼굴을 한 여자가 보였다. 인형처럼 예쁜 엄마를 꼭 닮은 갓난아기는 고사리 같은 손을 꼭 말아쥔 채 포대기 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여자는 그녀에게 인사한 뒤 아기를 재우려는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 약사는 거실 테이블에 차를 올려놓으며 수민을 맞았다. 며느리를 소개 시킬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건지, 그럴 생각 자체가 없는지 방금 들어간 여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어서 앉아. 이게 몇 년 만이야, 세상에.”
“잘… 지내셨어요?”
안부를 묻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이 약사는 한눈에 봐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말도 마. 잘 지내긴 개뿔….”
그녀는 근심과 수심에 싸인 채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털어놓았다. 30분 전 마트 사람들에게 다 들은 이야기였지만 수민은 애써 처음 듣는 척,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럼 정우는 휴학하고 당분간 한국에서 일을 할 계획인 거예요?”
“공부가 너무 싫대. 아, 나도 모르겠어. 정말 속상해서…. 마음 같아서는 다 내쫓아버리고 안 보고 살고 싶은데. 하아….”
수민은 차를 한 모금 넘기곤 다시 침묵을 깼다.
“애기는… 아, 이름이 지우예요?”
수민의 시선이 테이블 아래 놓인 뜨개질감으로 향했다. 앙증맞은 민트색 모자 위에는 Jiwoo Min, 작은 글자가 수 놓여 있었다.
“예쁜 이름이네요. 민지우.”
“이쁘긴 뭐가 이뻐. 쯧. 아들만 됐어도 내 속이 조금은 덜 썩어들었을 텐데…. 아들이라더니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그러면 내가 지들을 받아줄까 봐…!”
“…….”
“날 더 추워지기 전에 어떻게든 이혼을 시켜야 하는데… 아이고, 내 팔자야.”
이경은은 가슴을 탕탕 치면서도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전에 며느리를 하도 구박하는 통에, 임부가 남산만 한 배를 해서 가출했다던가.
결국 정우가 난리를 치고 동네 우세스럽게 큰 소동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데려와 그 이후로는 적당히 말을 가리며 살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밉다, 밉다 해도 아들과 안 보고 살 순 없었을 테니.
그때 문이 열리고 최소라가 주방으로 향했다. 뭔가 사각사각 소리가 나길 잠시, 그녀는 수민이 사 온 사과와 감, 쿠키, 약과 등을 접시에 예쁘게 담아서 내왔다. 그래도 시모 손님인데 인사도 하고 대접을 해야 한다는 마음인 듯했다. 플레이팅만 봐도 야무진 손끝과 센스가 한눈에 보였다.
“어머, 무슨 애프터눈 티세트 같네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성함이….”
“아니에요. 손님이 사 오셨는데 당연히 제가 감사하죠. 한국 이름은 소라예요, 최소라. 그냥 지우 엄마라고 부르셔도 돼요.”
여자는 싹싹하고 다소곳하게 말했다. 한국어가 꽤 유창한 데다 예쁜 얼굴과는 별개로 누구나 호감을 가질 법한 태도였다. 수민이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 약사가 중간에서 선을 그었다.
“애썼다. 이만 들어가 봐. 우리끼리 얘기하게.”
“어머니. 손님 오셨는데 죄송하지만 지우 좀 봐주세요. 과일 깎은 김에 정우 씨에게도 가져다주려고요. 오늘 야근한다 그랬거든요. 오는 길에 미용실에서 머리도 자르고 올게요.”
“뭐? 나도 약국 들어가 봐야 되는데 나한테 애를 맡기면 어떡해!”
“약국에는 혜영 씨 있잖아요. 아이 우유도 먹었고 기저귀도 새로 갈았으니까 힘드신 거 없을 거예요. 한번 자면 잘 안 깨잖아요. 한 시간 안에 올게요.”
“아, 몰라! 니 딸 니가 알아서 해. 난 손님 가시면 바로 약국 갈 거니까.”
“어머니.”
조곤조곤 말하던 소라의 목소리가 한순간 변했다. 양 뺨도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제 딸도 맞지만 정우 씨 딸이고 어머니 손녀예요. 우리 지우가 아들이었어도 그렇게 못되게 하셨을 거예요?”
“뭐? 아니, 너 지금 손님 앞에서 어디 감히….”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어머니?”
최소라의 눈빛이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수민은 안 되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달랬다.
“저, 괜찮으시다면 제가 볼게요. 저는 아이가 없지만 옛날에 조카들 자주 봐 줘서 어느 정도는 돌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
“아니, 수민 씨가 왜….”
이 약사가 난처한 듯 혀를 찼지만 수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맘 놓고 천천히 다녀오세요. 당장 급한 일도 없고, 한 시간 정도는 있을 수 있어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어머니.”
그제야 최소라는 코를 훌쩍이며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이경은은 가슴을 탕탕 치며 한숨을 뱉어냈다.
“수민 씨, 방금 봤지? 쟤가 저런다니까? 무슨 말만 하면 저렇게 눈 똑바로 뜨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데, 내가 무슨 시집살이를 시킨다고. 참 내.”
아이고, 못살아.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이 약사의 한탄은 그 후로도 한참 계속되다가 갓난아기가 깨어나 한바탕 울어댈 때 정점을 찍었다. 수민이 열심히 안고 얼러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경은이 마지못해 아기를 받아 안자 그제야 울음이 잦아들었다. 아무리 미우니 고우니 해도 제 할머니 품인 건 아는 것 같았다. 아이를 간신히 다시 재우고 거실로 나왔을 때 이경은은 머리가 산발이 되다 못해 초췌해져 있었다.
“내가 진짜 못 살겠다니까. 당장 갈라서게 무슨 수를 쓰든가 해야지 싶다가도, 애기는 또 누가 건사하나 생각하면…. 차라리 손 안 가게 다 키워놓고 정우 맘이 돌아섰으면, 한다니까.”
“그래도 사람은 괜찮은 것 같은데요. 한국말도 아주 잘하고…. 어차피 이렇게 손녀도 생기셨는데 약사님도 그냥 품어주세요.”
“그럼 우리 정우는! 정우는 더 큰 일 할 앤데…. 아유, 됐어. 남의 일이니 그런 소리 쉽게 나오는 거지. 수민 씨도 나중에 결혼해서 애들 낳아 키워봐. 아 참 그건 그렇고….”
이경은은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뭔가 생각난 듯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
“수민 씨, 예서랑은 연락하고 지내지? 응?”
“네? 네. 어쩌다 가끔요.”
수민은 1년에 한두 번 연락하는 척 일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걔는 요즘 어떻게 살아? 소설 쓴다는 헛바람은 이제 슬슬 꺼졌을 거고. 어디 대기업에라도 들어가서 좀 자리 잡았대?”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적당한 회사 들어가서 잘 다니고 있지 않을까요?”
“저기, 수민 씨. 예서에게 연락해서 말이야… 나한테 전화 좀 해달라고 해 줘. 응?”
“네?”
괴상한 요구였다. 번호 바뀐 것도 아는 눈치던데, 예서가 통화를 계속 피하는 건가?
“예서랑 연락이 안 되세요? 약사님이 먼저 전화를 해 보시면….”
“아니, 걔가 먼저 연락해야 돼. 자세히 말하긴 그렇고,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아, 못 살아. 정말! 별 그지 같은…. 지가 재벌이면 재벌이지 운 좋게 금수저로 태어난 주제에!”
이경은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어차피 약국에 손님도 없는 모양이니 이왕 온 거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상을 차렸다.
갑자기 왔는데도 손님 방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식탁이 꽤 풍성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반찬이 이국적이었다. 채소와 돼지고기가 다양하게 들어간 스튜에다 칠리 미트볼, 서양식 샐러드 같은 것도 있었다.
“며느리가 다 했나 봐요. 엄청… 맛있는데요?”
“요리는 곧잘 하더라고. 정우가 잘 먹으니까 그냥 내버려 두고 있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지, 가뜩이나 꼴 보기 싫은데 밥까지 안 하고 게으름 피우고 있었어 봐. 그 꼴을 어떻게 보겠어.”
“여기 밑반찬은 시장 거고… 두부조림이랑 달걀찜은 약사님이 하셨어요?”
“그것도 그 화상이 했어. 서양식 반찬 느끼해서 도저히 못 먹겠다고 하니까 어디 컴퓨터 보고 배워서 하더라고.”
“그래요? 이것도 간이 딱 맞는데요?”
수민이 내심 혀를 내두르며 맞은편의 이경은을 바라보았다.
“약사님, 웬만하면 좀 더 지켜보세요. 그래도 며느리 노릇 잘 해보겠다고 약사님 반찬도 따로 만들잖아요. 이만하면 아기 엄마도 엄청 노력하는 것 같은데….”
“애가 참 아리까리해. 어떨 때는 이렇게 넙죽 엎드려 잘하는 것 같다가도, 아까 봐봐- 애를 왜 안 봐주냐, 아들이었어도 그랬겠냐, 눈 부릅뜨고 따지는 것 보라고. 애가 보통 여우가 아냐. 사람을 은근히 휘어잡고 후리려고 한다니까? 차라리 아예 착하거나, 아예 못되거나, 둘 중 하나면 속이 시원할 텐데 어떨 때는 저렇게 낙낙하니 생각해주는 척 굴어서 헷갈리고 더 짜증이 나.”
식사가 얼추 끝났을 때 이 약사는 다시 예서를 언급하며 수민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다시 한번 부탁할게, 수민 씨. 예서한테 연락해서 나한테 전화 좀 해달라고 해 주라. 응? 약국 세도 오른 데다가 군식구들이 늘어서 갈수록 돈도 쪼들리는데 한주혁이… 아니, 예서가 좀 거들어줬으면 해서.”
“네…?”
수민이 저도 모르게 표정을 달리했다. 소설작가로 꽤 잘살고 있단 말, 안 하길 잘했구나. 진짜 기가 막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