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자네, 어떻게 나한테 이래? 결혼할 거라며! 헤어지는 거 아니라면서? 그럼 결국 내가 자네 장모가 될 텐데 나중에 내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이러나?”
“…….”
-그때는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얼굴 똑바로 보고 눈 맞추려고?”
“궁금하군요. 약사님은 지금까지 예서 얼굴 어떻게 똑바로 보며 살아오셨는지.”
이경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말이 없었다. 하지만 호흡은 현저히 거칠어지고 있었다.
“제가 예서였다면 오래전에 가족과 연 끊었을 겁니다.”
-뭐, 뭐라고…?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주혁은 마지막 일침을 가하곤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소파에 폐인처럼 눕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신과 전문의 한종한이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왜 이렇게 컴컴해.”
그는 이맛살을 잔뜩 구기고 불을 켰다. 주혁은 소파에 누워 한쪽 팔로 시야를 가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인사말도 건네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한종한은 이미 익숙한 듯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정신과 전문의 Dr. 한의 진료가 5년 만에 재개되었다. 한종한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담자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있었다.
주혁은 상담보다는 입원을 하는 게 더 적절해 보일 만큼 극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보름 전보다 더 피폐해진 낯빛에 한종한은 내심 혀를 찼다.
“이해가 안 돼요.”
무감하게 근황을 나누던 중 주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소파에 누운 채였다.
“사람은 모두 다 다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방식도 같을 수가 없죠. 그런데 왜.”
왜 민예서는 그의 방식을 이해해줄 수 없었을까. 당시에는 그게 그녀를 위한 최선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녀가 제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쉽지만 다시 맞춰가면 그뿐이다.
그는 분명 과거의 제 독선과 오판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대체 뭐가 더 문제란 거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네가 최선이라 믿었던 애정의 방식 자체가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근본부터 어긋나 있었던 거야.”
한종한은 눈에 띄게 야윈 사촌의 얼굴 앞에서도 냉철하게 말을 이었다. 다소 모진 독설도 서슴지 않기로 마음먹은 차였다. 지금 그는 사촌이 아닌 정신과 의사로서 여기 와 있었다.
“진정한 애정은 상대방이 그 중심에 있어.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거지. 진심으로 그 사람 자체를 걱정하고, 염려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거야.”
하지만 넌 그렇지 않았지.
한종한은 뒷말을 삼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도 그걸 느낄 수 있어.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는 어떤 갈등이 있어도 결국 해결점을 찾고, 극복하고, 그러면서 관계가 확고히 굳어지게 되지.”
“그래서.”
주혁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완강했어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입니다.”
“…….”
“방법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면 그 애를 다시 되찾을 수 있는지.”
“한 본.”
한종한이 맨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제 그만 놓아줘. 이미 떠난 사람을 되찾을 순 없어.”
의학적 소견에 자꾸만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타인이라면 오롯이 냉정할 수 있겠지만 주혁에겐 그럴 수가 없다.
“힘들겠지만 다들 이런 경험을 거치면서 나아지는 거야. 그러면서 새롭게 또 누군가를 만나고 다시 시작하고, 또 헤어지기도 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연애는 더더욱.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고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최후의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눈앞의 남자는 민예서 외 누구와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을 듯했다. 민예서가 아니면 죽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러진 않겠지. 지금이야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아무리 뻔한 말이라도 그게 사실이었다. 15년 가까이 되는 정신과 상담 경력 동안, 시간의 흐름만큼 명확한 약은 없었다. 더딘 만큼 효과는 너무도 확실하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만 꺼져달란 소리였다. 한종한은 한숨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점에서 그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처방전밖에 없었다.
주혁은 문이 닫히자마자 리모컨을 들어 실내 등을 모조리 껐다. 그리고는 소파에 다시 누웠다. 마비된 것처럼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육신이 시체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썩어 문드러져 바스러지고, 뼛가루가 심해처럼 닿지도 않을 바닥 깊이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무런 의욕도 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사방이 컴컴한 공간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앞과 뒤인지 구별도 가지 않았다.
꿈속의 그는 방향 없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낯선 이국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은 먹먹함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민예서는 이미 떠난 사람이었다. 한종한의 말대로,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너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따위 헛소망은 이제 접어둬야 할 때였다.
어떻게 하면 널… 포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널 되찾을 수 있을까- 기존의 물음을 바꿨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이제 꿈속에서도 똑바로 누워 있었다. 탈진 끝에 의식을 놓기 직전처럼 손끝 하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발 좀 누가 알려주길 바랐다. 어떻게 하면 이미 떠나간 민예서를 포기할 수 있는지.
뭘 해도 헛수고였다. 자진해서 연이은 출장을 다니며 비행기에서 살다시피 했고, 내일 당장 회사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미친놈처럼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이제 그만 놓아줘.
한종한의 조언 중 유일하게 틀린 말이다. 그 쪽에서 민예서를 놓지 못하는 게 아니라, 민예서가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결국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럴 거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붙잡았어.
왜 나를 죽이려고 했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서슬 퍼런 추궁이었다.
-왜 잡아줬냐고.
혼란스러움, 그악스러운 대치에도 결국 그 의문은 해갈되지 않았다.
예서는 소파에 누운 채 잠시 눈을 깜빡였다. 오후 3시, 6월 말의 빗줄기가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여전히 자장가 같았다. 간밤에 원고를 교정하느라 네 시간밖에 못 잤더니 점심 후 졸려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한 시간이 넘어 있었다.
휴대폰을 더듬어 화면을 보니 현주에게 온 문자가 떠 있었다. 점심시간을 틈타 보낸 모양이었다.
[예서야. 이사하고 잘 지내? 너 없으니까 너무 심심하다. 괜찮으면 주말에 한 번 들를게. 엄마가 너 반찬 좀 갖다주라 그러셔. 엄마 아빠 다 계속 있으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기어이 나가더니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나 모르겠네.]
얼마 전 현주네 시골집이 수리에 들어가게 되어 귀농했던 부모님이 K시의 아파트로 일시 돌아와 머물게 되었다. 슬슬 서울로 다시 자립할 때가 된 것 같아 지금의 오피스텔을 계약하고 빈집에 입주한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잠깐 자느라 이제 봤어. 이따 저녁에 전화할게.]
소파에서 후다닥 일어나 얼굴을 씻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자 서규진이 보낸 대화창이 제일 먼저 그녀를 반겼다. 업무용으로만 쓰는 비즈니스 채팅 프로그램 중 서규진과의 대화만 사적인 것으로 변해 있었다.
[예서 씨. 내일 금요일 저녁 말인데 아까 저희 직원들에게 추천받은 맛집이에요. 여기 괜찮겠어요?]
예서는 링크를 클릭해보았다. 순간, 얼굴이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었다. 입가에 엷게 배어 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낯익은 캐주얼 레스토랑의 홀 풍경이 화면에 떠 있었다. 한주혁과 가끔 갔던 식당이었다. 그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지만 그녀가 좋아해서 일부러 갔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새삼 깨달았다.
그는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본인이 그러기로 작정한 면에서는 지독하게 사려 깊고 세심했다. 잔인할 정도로 그랬다.
[대표님.]
생각해 둔 다른 장소가 있다고 하면 서규진은 흔쾌히 거기로 가자고 할 터였다. 그 역시 한주혁 못지않게 다정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한주혁과는 달리,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인정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예서는 잠시 망설이다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제 마음이 바뀌기 전에 바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언제까지고 그를 의식하며 살아갈 순 없었다.
[저도 여기 좋은 것 같아요. 그럼 제가 두 명 예약해둘게요.]
[OK. 원고 작업으로 바쁠 텐데 예약은 내가 할게요. 그럼 수고!]
그는 6시 전까지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오전 8시나 9시부터 늦으면 저녁 6시까지, 일반 직장인의 근무 시간처럼 작업 일정을 정해둔 그녀의 루틴에 맞춰서였다.
예서는 머리를 헤드 레스트에 기댄 채 두 눈을 감았다. 작업 중이던 문서를 열었지만 키보드에 다시 손가락을 올리기까진 몇 분 더 걸렸다.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이후, 서규진과 사적인 만남을 이어간 지 두 달 남짓 지나 있었다. 부담 없이 가볍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지내보자는 그의 제안을 며칠간 고민 끝에 받아들였다. 아직은 스킨십도, 남녀 간의 설렘도, 아무것도 없었다.
-저희 둘 중 하나가 원하지 않을 때까지, 혹은 둘 중 하나가 누군가와 진지한 교제를 시작하기 전까지입니다. 그때까지 이대로 쭉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자는 거니까 염려 마세요.
물론 서규진에게는 단순한 친구 이상이 되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숨기고자 했던 감정이 가끔씩 사소한 몸짓과 무심한 말에 묻어날 때면 경각심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와 거리를 두지는 않았다.
서규진과 함께 있으면 편했다. 단둘이 있어도 아무런 긴장감도, 거북함도 없었다. 사촌 동생 경현과 비슷한 성격인 그는 재치가 넘치고 센스 있으면서도 적정선을 지켰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는 애독자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문을 거듭했다. 그를 이용하는 건 아닌지. 선배를 잊기 위해 서규진의 마음을 우롱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 여러 번 물었지만 답이 나온 적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기간을 정했다. 여름이 지나가기 전까지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있어 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