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혹시 이별해 본 적… 있으세요?”
“예?”
“보통 이별하면 잊기까지 어느 정도 걸리나요? 후유증이 원래 이렇게 길고 심한 건가 해서….”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허망한 웃음이었다. 평소의 공적인 자리에선 엄두도 내지 않았을 헛소리가 연이어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그만 입을 다물라고 스스로를 나무라고 있었지만 혀는 말을 듣지 않았다.
“너무 지독한 것 같아요.”
“예서 씨…?”
“사실은 아까 쇼핑몰에서 작년에 헤어진 사람을 봤어요.”
“…….”
“정말 잠깐이었어요. 눈이 단 2초 정도 마주쳤을 뿐인데… 정말 그뿐이었어요. 그런데도 너무….”
정신 차려, 민예서. 지금 누구에게 무슨 얘길 늘어놓는 거야.
뒤늦게 이성이 돌아와 입술을 꽉 물었다. 맞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묵묵히 듣고만 있던 서규진이 입을 열었다.
“그 마음 알아요. 심장이 빨리 뛰고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고…. 작년이면 그리 오래전도 아닌데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그가 제 몫의 컵을 입가로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햇살에 뒤덮인 비행기가 창 너머로 보였다.
“저는 2년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
“그게 5년 전인데 헤어지고 첫해는 너무 힘들었죠. 미국 한인사회가 워낙 좁아서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치곤 했는데… 아주 죽을 맛이더라고요.”
“…….”
“막 2년 넘었을 때였나,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돌린다는 말을 듣고…. 그때 확실히 포기가 되고 정리가 됐던 것 같아요. 마침 공부 끝나고 한국에 들어와 사업한다고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그러셨군요.”
“첫사랑이었어요. 엄청 사랑했죠. 그 사람 없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결국 시간이 약이더라고요.”
담담하게 서술해서 더 쓸쓸하게 들렸다.
“그래서 예서 씨 심정, 이해할 수 있어요. 각자의 사정과 사연은 있는 법이지만 조금은… 그 마음을 알겠다고 해도 괜찮은 거겠죠?”
그가 쓰게 웃었다. 늘 밝던 이마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때 인파 속에서 김 PD의 얼굴이 보였다. 스태프들이 양손에 면세점 백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저희 왔어요! 어, 대표님도 여기 계셨군요. 이건 대표님 선물이에요. 그동안 너무 많이 얻어먹고 신세를 져서 저희끼리 돈 모아서 작은 거 하나 샀어요.”
“아니, 뭘 또 이런 걸!”
서규진이 혀를 크게 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의 그늘은 없던 일이라는 듯 지운 모습이었다. 두 손은 김 PD가 내민 백으로 뻗은 채였다.
“이러면 제가 또 넙죽 받죠. 하하하- 감사합니다!”
“PD님, 저는 왜 빼셨어요. 미리 말해주셨으면 저도 돈을 보탰을 텐데….”
“작가님은 일부러 뺐어요. 저번에 저희 밥도 사 주시고 생일선물도 일일이 다 챙겨 주시잖아요. 그래서… 여기! 작가님 것도 하나 샀죠. 립밤이에요.”
“어, 어쩌죠. 저는 전혀….”
“저희 거 사면서 작가님 것도 하나 산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보다 이거 좀 봐주세요. 가족 선물로 두 개 샀는데 어떤 게 엄마한테 드리기에 더 나을까요?”
분위기는 이내 화기애애하게 바뀌었고 그 기류는 비행기 안에서도 쭉 이어졌다. 예서의 두통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마침내 스태프들도 하나씩 잠이 들고 조용해졌을 때였다.
기내 화장실에 다녀와 자리에 앉으니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예서 씨. 울적한 마음 빨리 털어버리고 기운 내길 바라요. 앞으로는 늘 좋은 일만 있을 테니 힘내시고요.]
반사적으로 좀 떨어진 그의 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규진은 자리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안대를 쓰고 있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예서는 격려해줘서 고맙다고 답문을 써야 하나 망설이다 한국에 도착하면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그녀도 잠시 눈을 붙이려고 머리를 기대고 무릎담요를 펼쳤다.
눈을 감자 싱가포르에서의 즐거웠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와 보타닉 가든, 칠리크랩과 바쿠테, 센토사섬에서 먹은 말레이시아 음식, 케이블카를 타면서 본 환상적인 뷰…. 온통 꿈같은 기억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공항에서….
평온했던 심장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예서는 다른 스태프들처럼 안대를 찾아 쓰곤 몸을 좌석에 더 깊숙이 묻었다. 가까스로 잠잠해졌던 두통이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
‘침묵은 힘이라고들 한다. 침묵은 다른 의미에서는 사랑받는 이들이 가진 무서운 힘을 뜻하기도 한다. 이 힘은 기다리는 이의 불안을 가중한다. …(중략) 감옥에서 침묵을 강요받은 자는 거의 미칠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침묵을 감수하는 일은 침묵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큰 형벌이다.’1)
그는 여전히 어느 문학작품 속에서의 ‘나’였다. 멀쩡한 가면을 쓰고 완벽한 사람 행세를 했지만 실상은 미친놈이나 다름없었다. 약에 절어 또 다른 자아에 자신을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주혁은 CDMO(Contract Development Organization), 위탁생산 기업의 생산기지 현황을 체크한 뒤 랩탑을 덮었다. 화면에서 나오던 빛마저 사라지자 서재는 어두운 터널처럼 변했다.
시간은 7시를 한참 넘겼고 저녁은 손도 대지 않았다. 점심부터 물 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뭘 집어넣으려 하면 위액이 역류했고, 죽이나 스프도 시궁창을 입 안에 처넣은 양 역겨워 구역질만 났다.
그는 무기력한 팔을 뻗어 스탠드 등을 켰다. 새카만 창 너머로 고적한 테라스 정원이 보였다. 그가 랩탑으로 급한 업무를 볼 때면 민예서가 흔들의자에 앉아 바라보길 좋아했던 공간이었다.
책상 위에는 사촌 한종한이 처방해 준 의약품 병들이 열 지어 있었다. 수십 개의 라틴어 리스트를 훑는 눈에 조소가 어렸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이젠 성분들이 제 이름처럼 낯이 익었다. 허구한 날 약물에 의존하게 된 미친 새끼가 하필 제약사에 몸을 담그고 있다니. 축복인지 더한 저주인지 모를 일이었다.
숨소리도 나지 않는 고적함 속에서 벨 소리가 메아리쳤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눈매에 살짝 균열이 갔다. 그는 일부러 전화가 끊길 때까지 기다렸다. 벨이 다시 울리고 나서도 한참 만에 통화에 응했다.
“네.”
-한 본부장. 나야. 예서 엄마.
“압니다. 말씀하시죠.”
어떤 형식적인 인사도 없이 싸늘한 목소리였다. 이경은은 조금 당황했는지 2초 정도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자네 제안, 많이 고민해 봤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서도 엄연히 내 자식이야. 사랑하는 마음은 다 똑같지만 그래도 더 짠하고 더 손이 가는 아픈 손가락은 있는 법이라네. 자네도 나중에 애들이 생기면 내 마음 이해하게 될 거야.
주혁은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극한까지 치닫는 분노를 누르느라 이가 악물렸다.
-자네 말대로 5년은 조용히 연락 안 하고 살기로 했네. 그런데 말이야, 예서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건 괜찮지? 내 쪽에서만 연락 끊고 그 애가 마음 풀려 먼저 전화를 하든, 집에 오든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되잖나. 그까짓 5년쯤이야 뭐 후딱 지나갈 거고, 원래 연락을 잘하는 성격도 아니었으니.
“…….”
-그래서 말인데 그때 자네가 말했던 우리 정우 유학비용이랑 약국 건물을….
“민정우는 작년 12월에 일시 휴학하고 귀국한 걸로 압니다만.”
-뭐? 그, 그걸 어떻….
“건물은 이미 매도했습니다. 제가 그 제안을 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예서에게 연락하셨더군요.”
상대방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경악한 듯 가느다란 숨소리만 흘러들 따름이었다.
“설사 연락하지 않으셨다 해도 제가 양도해드리겠다고 한 시기는 5년 후였습니다. 5년 동안 확실히 절연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조건이었고요. ”
-저, 저기. 한 본부장….
“제 제안에 응할 생각이 없으신 걸로 받아들이고 얼마 전에 매도했습니다. 건물주가 바뀐 걸 모르셨나 보군요.”
-아니, 그럼 그게… 얼마 전에 중개인이 말한 새 임대인이… 자네가 아니었던 건가?
“…….”
-저기, 하, 한 본부장.
낭패감에 이경은이 말까지 더듬었다. 이러나저러나 늘 약사님, 약사님, 사람들이 대접해 주는 은근한 특권의식으로 도도하던 어조가 잔뜩 수그러져 있었다.
“돈 필요하십니까?”
-뭐…?
“건물은 이미 넘어갔지만 한 번 더 기회를 드릴 의향이 없지는 않습니다. 예서가 온전히 제 의지로 먼저 돌아오기 전까지는 연락하지 마십시오. 영원히.”
-뭐, 뭐라고?
“앞으로 다시 5년. 그동안 약속을 이행하는지 지켜보고 적당히 필요하신 만큼 드려도 될지, 고려해보겠습니다. 당장 급전이 필요하신 게 아니면 그 정도는 감내하셔야죠.”
-자, 자네….
휴대폰 너머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예서와 닮은 윤곽이 떠오르자 화가 더 치밀어올랐다.
각주
1)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2, 5권, 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