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초년 운은 개똥 같은데 가만 보자… 30대부터 중년, 말년 운이 부귀영화 그 자체네.”
본인의 재능도 재능이었지만, 뭣보다 배우자 사주가 기가 막혔다. 이 정도로 귀인인 팔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몸은 사기꾼이 아냐. 어쨌든 결혼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은 거 아니겠어? 부적값 정도는 껌이지.
***
처음엔 잘못 본 거라 여겼다. 주혁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는 환각까지 보이다니 점점 상태가 좆같이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지그시 이 악물고 터널처럼 긴 아케이드 복도를 가로질렀다. 홍보팀 수행원과 비서진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일견 느리고 여유로워 보였지만 보폭이 넓어 걸음이 꽤 빨랐다.
하지만 환각이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었다. 맞은편 아케이드 레일을 타고 이쪽으로 넘어오는 무리 중에 민예서가 있었다. 젊은 남자와 세 명의 여자들도 함께였다.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이틀 전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OTT 미팅에 그녀도 참석한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
민예서를 향한 스토킹은 며칠에 한 번꼴로 철회와 재개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적을 낱낱이 파악하는 짓을 이제는 그만두겠다 결심하기 무섭게, 얼마 못 가 다시 근황을 보고하라 정정 지시를 내리곤 했다. 미친 짓거리였다.
옆에 선 남자가 뭐라고 말하자 민예서가 환하게 웃었다. 햇살처럼 맑은 미소에 눈이 부셨다. 동시에 심장이 뻐근해지며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시선이 부딪친 순간 민예서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옆에 선 남자가 다시 뭐라 말하자 시선을 그쪽으로 되돌렸다. 잠시 사라졌던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살의가 솟구쳤다. 눈길이 그로부터 떠나기 무섭게, 그것도 다른 새끼를 향해 급격히 변하는 얼굴에 분노가 일었다.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어 이가 갈렸다. 동시에 당장이라도 붙잡고 애원하고 싶어서 손끝이 덜덜 떨렸다.
남자가 벨 소리가 나는 휴대폰을 품에서 꺼내며 일행에게 양해를 구했다. 여자들은 그들과 거리를 둔 채 통화에 열중하는 남자 대신, 민예서를 둘러싸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윽고 맞은편 사람들이 가까워질 때였다. 석연찮은 시선을 느꼈는지 민예서를 둘러싼 동행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마침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레일 사이를 요란하게 지나가는 바람에, 여자들은 그를 보지 못했다.
주혁의 눈은 갑자기 생긴 인파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민예서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얼굴은 정면을 향한 채 동행의 물음에 답변하면서도, 단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담담하다 못해 서늘한 낯이었다.
그러고는 동행 여자에게 대각선 쪽 상점을 가리켜 보이며 그로부터 거리를 더 벌렸다.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역병이 옮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민예서는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처음 멀리서 눈이 맞닿았을 때, 괴물을 목격한 것처럼 소리 없이 경악하던 그 눈빛 이후로 둘의 시선이 다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본부장님.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불편하신….”
어느새 걸음걸이가 느려졌는지 옆에 선 김 비서가 그를 살피다 말을 멈췄다. 그도 늦게서야 저만치 가고 있는 민예서를 본 모양이었다.
주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그때 뒤통수로 남자의 부름이 들려왔다.
“예서 씨! 같이 가요, 통화 다 했어요. 근데 방금 누가 T샵 쇼핑백을 들고 가길래 거기 폐점한 거 아니냐고 하니까 저쪽으로 점포를 옮겼다네요. 그래서 저도 지금 거기 가보려는 참이에요.”
“오, 그래요? 그럼 작가님이랑 대표님은 먼저 가세요. 저희는 여기 옷 좀 둘러볼게요.”
“그럴까요? 그럼 20분 뒤 아예 센트럴 광장에서 봅시다. 가시죠, 예서 씨.”
주혁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긴 아케이드 너머로 사라져가는 민예서가 보였다. 조금 전의 남자도 함께였다. 그때 두 사람 옆을 달려가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민예서가 그중 하나와 세게 부딪쳐 휘청거리자 남자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해 잡아 주었다.
민예서의 재킷 소매와 팔꿈치, 등과 허리가 그 남자의 손과 닿는 순간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두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머리통만 용광로에 처박힌 것처럼 뜨겁고 홧홧했다. 피가 거꾸로 솟다 못해 혈관 내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님. 본부장님.”
흐린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김 비서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옆으로는 수행원이 비호하듯 그를 벽처럼 둘러쌌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김 비서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AUG 측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혁은 대답 없이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날 선 동공은 초점 없이 공허했다.
“어렵게 성사된 자리입니다. 본부장님이 그동안 그 계약을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 옆에서 계속 모셔 왔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굴지의 글로벌 바이오텍 기업, AUG 바이오사이언스(AUG Biosciences)와 항암제 및 치매 신약에 대한 기술 이전 협업 계약을 체결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예정에도 없이 뉴델리 출장이 끝나자마자 바로 여기로 날아온 것은 인도에서의 마지막 밤, AUG 측의 최종 제안이 전달되어 서둘러 계약에 방점을 찍기 위해서였다.
김 비서의 말대로 중차대한 미팅이었다. 서울 본사가 무너졌다 해도 이 계약만은 반드시 성사시키고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본부장님.”
“…….”
주혁은 김 비서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민예서와 남자는 이제 점처럼 변해 있었다. 그 점은 이내 작은 폭포처럼 꾸며진 조각상 옆에서 방향을 틀어 완전히 사라졌다.
“가죠.”
그는 여상하게 뒤돌아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제야 수행원들도 다시 그의 뒤를 따랐다. 더 이상의 돌발상황은 없었다.
21층에 내려 AUG 본사가 있는 옆 건물과 이어진 공중 브릿지를 넘어가는 동안, 그리고 본격적으로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주혁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미국 북동부 악센트가 깃든 영어는 완벽했고 동작 하나마다 여유롭고 품위가 넘쳤다. 냉정하고 초연하면서도 격식을 갖추었고 하버드 동문인 부회장의 농담에는 적절히 응대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안했다. 김 비서는 초조한 속내를 애써 숨기며 고풍스러운 왕실 접견실처럼 꾸며진 회의실 구석에 서서 상사를 지켜보았다. 흡사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기 직전의 평온함 같았다.
그날 밤, 김 비서는 수행단을 통해 현지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구입했다. 한주혁이 몇 년간 끊어왔던 약을 다시 복용하게 된 까닭이었다.
***
이국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가 끝나고 모두 창이공항으로 이동했다. 일행이 면세점을 돌아볼 동안 예서는 잠시 혼자 쉬겠다며 라운지 카페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0분 만에 왁자지껄한 카페를 나와 게이트로 들어섰다. 다 같이 게이트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예서는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앉아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몇 시간 전 쇼핑몰 안에서 마주쳤던 남자의 잔상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한주혁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녀를 본 순간에는 놀란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극히 차분하게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그가 저를 계속 보고 있었는지, 시선은 그 너머의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한주혁과 다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열심히 딴청을 피우느라 머리가 안개에 휘감긴 듯 멍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다리가 계속 후들거려 버틸 수가 없었다. 사고회로가 그대로 정지되어 버린 듯했다. 서규진이 통화를 끝내고 다가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달려오던 한 아이와 부딪쳤을 땐 결국 넘어질 뻔했다. 서규진이 잡아줘서 얼떨결에 몸을 똑바로 세웠지만 신경은 온통 뒤에 가 있었다.
돌아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그가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 그녀 따윈 처음부터 보지도 않았던 것처럼 앞만 보고 계속 가고 있는지. 혹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예서 씨…?”
누군가의 부름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서규진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컵이 들려 있었다.
“어디 안 좋아요? 이런… 걱정돼서 찾아봤더니.”
“아, 아니에요. 그냥 머리가 조금 아파서… 그동안 너무 잘 놀았더니 피곤했나 봐요.”
“정말 괜찮겠어요? 공항 안에 의료센터 있으니까 참기 힘들면 지금이라도….”
“네, 아까 카페에서 두통약 먹었으니까 비행기 타면 바로 자려고요.”
“그래요…. 그럼 이거라도 마셔요. 예서 씨 찾으면 주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네요. 두통에 좋은 페퍼민트 티예요.”
그는 어느새 일행과 친해져 직급 다 내려놓고 모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저녁만 끼워달라던 처음과는 달리 점심에도 동참했다. 마지막 날인 오늘은 아예 호텔 체크아웃부터 그들과 하루 종일 일정을 함께 했다.
청일점으로 끼워줘서 고맙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PD와 스태프들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감사를 표했다. 그의 법인카드가 매번 식사와 차, 교통비를 죄다 부담한 데다 늘 재미있고 사려 깊은 서규진의 존재 자체를 꺼려할 리가 없었다.
“아직 보딩 전까지 시간 좀 있는데 그럼 캡슐호텔에라도….”
“약 효과가 이제 나는지 두통이 좀 가신 것 같아요. …여기 앉으세요.”
예서는 옆의 빈자리에 놓은 가방을 옮기며 애써 웃었다.
“대표님 덕분에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어요. 다들 즐거워하셨고요.”
“에이. 예서 씨도 편하게 이름 부르세요. 비행기에서 딱 내리는 순간부터 다시 대표님, 작가님, PD님, 에디터님 그렇게 돌아가겠지만 아직은 싱가포르 땅이니까….”
예서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창 너머 석양빛에 반사된 비행기 날개가 노랗게 반짝거렸다. 저 멀리 보이는 격납고 지붕도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표님.”
다시 습관적인 호칭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그가 답하기 전에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