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몇 분 후 이경은은 끼익, 비명처럼 처연하게 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봄이 한창인데도 신당은 여전히 을씨년스럽고 온기 하나 없었다. 본래 귀신이 자리한 곳은 늘 한겨울처럼 춥다 했던가.
“보살님…”
“어서 오게. 몸이 많이 안 좋았나 봐? 좀 야위었네.”
홍련 보살은 기다렸다는 듯 이경은을 맞았다. 연꽃 선녀는 수술 후 예후가 좋지 않아 2월 중 퇴원해 현재는 강원도에서 요양 중이라 했다.
“어느 정도 기력을 찾으시면 돌아오실 거야.”
“…우리 정우 새 이름은 언제쯤 완성될까요?”
이경은은 힘없이 그것부터 물었다. 움푹 들어간 눈두덩은 퀭했고 뺨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병원으로 향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아, 겨울 동안 실컷 묵혀뒀다 일주일 전에야 의뢰했잖아. 제일 좋은 이름을 점지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려. 보름 정도 더 잡아야 돼. 그나저나 왜 이렇게 얼굴이 안 좋아? 집에 다른 우환이 생긴 게로구만. 어디 보자….”
보살은 포효하듯 부채를 크게 펼쳤다. 촛불이 훅 꺼지면서 사위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아직 남은 등불만이 보살과 이경은의 낯을 요요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상하네. 아들 뒤로 웬 여자가 보여. 흠… 생긴 게 낯선데?”
“어머나!”
이경은이 손뼉을 탁 쳤다. 눈빛에 대뜸 생기가 도는 게 아까까지 시름시름 앓던 게 거짓말 같았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딱 맞추신대요? 연꽃 선녀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이번에 우리 정우가 한국 들어왔는데 글쎄 어디서 미국 튀기 고아를 데려와 가지고…. 내가 못살아요, 정말!”
이경은은 타국에서 그저 열심히 공부만 하던 순진무구한 아들이 얼굴만 반반한 혼혈아의 꼬임에 넘어가 급기야 한국까지 데려왔다는 그간의 상황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혜련은 처음 듣는 얘기인 척, 중간중간 혀를 차며 그녀의 긴 울먹임과 하소연이 끝날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글쎄, 정우가 뭐라는지 아세요? 공부는 잠시 접고 둘이 결혼을 해야겠다는 거예요! 당분간 한국에 자리를 잡겠다는데 아우, 내가 진짜 헛살았지. 헛살았어…”
“허. 그것참…”
혜련은 이경은이 준비해 온 한국 이름 최소라의 사진과 생년월일을 꼼꼼히 살폈다. 인형처럼 생긴 사진 속 혼혈 여자는 민정우와 나란히 웃고 있었다.
“보살님, 어떻게 해야 이 화상을 우리 정우에게서 좀 떼어놓을 수 있을까요? 네? 부적이든 뭐든 그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좀 도와주세요!”
“잠깐만. 이거…”
혜련이 한 손을 들어 이경은을 제지했다.
“이미 늦었어. 둘이 못 떨어져. 뭔가가… 있네.”
민정우와 최소라의 이국적인 얼굴 사이로 가느다란 실 같은 게 보였다. 아하, 이것까진 몰랐는데. 애가 들어섰군.
“혹시 아들 씨를 뱄어?”
“…벌써 배가 남산만 하게 불렀어요.”
“그럼 둘을 어떻게 떼어놔? 이 소라란 처자, 생긴 건 유순하니 얌전해 보여도 기가 보통이 아냐. 자네가 못 이겨.”
“네에?”
이경은의 안색이 일시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대답 대신 울상을 지으며 못 살아, 못 살아, 연신 한숨만 푹푹 쉬었다.
“아니, 그렇게만 말씀하시지 말고요! 혹시 애가 떨어질 부적이나 다른 거라도,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보살님!”
허허, 혜련은 꺼진 초 심지에 불을 붙이고 부채를 다시 펼쳐 들었다. 머릿속으론 얼마짜리 부적을 어떤 명목으로 떠안길까 골몰하기 바빴다. 그때 옆에 꺼내놓은 민예서의 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혜련이 쯧, 혀를 찼다.
“그런 말 하면 못써. 그 집에 손이 귀해. 이거 봐.”
귀신처럼 기른 손톱이 사진 속 민예서의 얼굴을 톡, 건드렸다.
“하나가 가니 또 하나가 들어선 거잖아. 신령님의 보살핌이니 감사히 생각해야지.”
“네? 그게 무슨….”
“얼마 전에 애 하나 떨어졌잖아. 여기, 딸 사주 보니까 둘째 자궁에 살(殺)이 들었던 흔적이 보여. 전에 전화로 말했던, 그 결혼한다 만다 했던 남자 씨 아니야?”
“네…?”
이경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예서가 유산을 했다고? 설마 한 본부장 아이를?
“모르고 있었나 보군. 아무튼 아들네는 안 돼. 일단 애 태어나기 전까지는 둘이 한 몸처럼 찰싹 들러붙어 죽고 못 살 거야. 강제로 그래봤자 역효과만 나. 이 물건 쫓아내면 아들도 같이 나갈 거야.”
“아이고, 내가 못 살아- 그럼 어떡해요? 네? 아니, 조심하지 왜 애까지 들어서게 해서!”
“어쩌겠어. 신체 건강한 남녀가 그럼 손만 잡고 있나? 옛말에 봄 보지가 쇠 저를 녹이고 가을 좆이 쇠판을 뚫는다는 말도 있는데.”
“네…? 보… 예에?”
“봄에는 여자의 정욕이, 가을에는 남자의 정욕이 상승한다는 뜻이야. 자네 아들이 가을에 많이 외로웠나 보지. 아무튼!”
혜련은 부채를 살살 흔들며 잔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아무래도 화살을 둘째로 돌려야겠다 싶었다. 지금 별 볼 일 없는 첫째 아들이 문제가 아니다. 정보통에 의하면, 둘째 딸과 결혼 얘기가 오간다던 남자가 대단한 집안의 장남인 것 같았다.
끝까지 호구로 잘 붙들어 매려면 그쪽에 올인하게 방향을 틀어야 돼. 근데 진짜 유산한 거면 어쩐다?
“일단, 아이가 나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 이 물건이 애를 낳으면 애만 두고 쫓아내도 안 늦으니깐.”
“그, 그럼 혼인신고도 최대한 미뤄야 되겠네요? 태어날 애가 남자라니깐 헤어져도 애는 꼭 우리가 맡을 거거든요.”
“그래. 근데 지금 결혼 쪽으론 둘째가 더 문제야.”
혜련이 초를 하나 더 켰다. 그림자가 진 허연 얼굴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잘 들어! 자네 아들은 말이야, 이제 둘째 딸이 하기에 달렸어. 일단 둘째 결혼은 꼭 시켜야 돼. 그래야 자네 아들도 일이 잘 풀린단 말이지.”
“하, 하지만… 벌써 헤어졌다는데 어쩐대요.”
“사위 좆을 보니 손주를 볼까 싶다- 그렇게 꼬인 걸 이제부터 풀어야 돼.”
“네에? 사, 사위 조, 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설마 예서가 한 본부장과 결혼해도 둘 사이에 2세가 힘들 거란 소린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거 없어. 자네 딸과 사윗감을 말하는 게 아니니까. 어떤 일의 시작부터 그릇된 걸 의미하는 속담이잖아.”
“네에? 그런 이상한 속담은 처음 듣는데….”
“쌍둥이 사주가 틀어졌을 때 엄… 아니, 연꽃 선녀님에게 바로 왔어야 됐는데. 요 몇 년간 바쁘다고 통 못 왔잖아. 진작에 왔었으면 그릇된 쪽으로 계속 가지 않고 제때 방향을 잘 틀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어.”
그녀는 붓끝에 먹을 묻혀 붉은 종이를 펼쳤다. 그러고는 일필휘지로 뭔가를 술술 쓰곤 종이를 접어 금줄로 묶은 다음 이경은에게 내밀었다.
“이건 아들 부부 침대 위에 걸어. 일단 손주가 잘 자라서 나와야 되니까. 하지만 명심해. 딸내미 결혼은 꼭 시켜야 돼. 알았지?”
“저기, 보살님. 실은….”
이경은이 아랫입술을 꼭 깨물다가 몇 달 전 한주혁과의 만남, 그리고 제안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SG그룹 후계자란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정우와 비교되는 마음에 새삼 또 배알이 꼴려서였다.
“그래. 어째 대단한 집 아들 같더구만. 둘째 관상에 보통 귀운이 깃든 게 아니더라니.”
혜련은 태연한 척하면서도 내심 쾌재를 질렀다. 아무리 작은 거라도 건물을 턱턱 사서 증여해줄 수 있을 정도면 보통 부자가 아니리라. 말인즉슨 이경은이 어떻게든 그 사윗감을 꽉 잡고, 자신은 이경은을 꽉 잡아 최대한 뽑아먹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뭐가 문제야? 안 만나는 척, 일단 돈과 건물은 챙겨야지. 그 사이에 둘째랑 화해해서 결혼하고, 그럼 사위도 아내 얼굴 봐서 장모에게 못 할 수 없고. 천륜을 어찌 이겨? 일거양득이지.”
“그렇죠? 그러니까요. 내 배 아파 낳은 딸인데 지가 어쩔 거야. 평생 날 안 보고 살 수 있겠어?”
“그 결혼 꼭 시켜! 그래야 자네 집안을 일으키고 가족 모두 잘 될 수 있어. 살짝 망조가 깃들 뻔하다가 둘째와 그 사윗감 덕분에 크게 비상할 운이야.”
“그, 그렇군요. 그럼 그 화상은요? 그 소란지 고둥인지도 결국은 쫓아낼 수 있을까요?”
“일단 애 나오기 전엔 내버려 둬. 아들이 좋다는데 어떡하겠어? 하지만 애가 생기면 운이 또 어떤 궤도로 바뀔지 모르니까 아들 일은 그때 가서 얘기하자고.”
“아, 알겠어요. 일단 혼인신고만은 못하게 막아놔야지. 휴우….”
“저들끼리 혼인신고 하면 뭐 방법이 있나?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둬. 요즘 이혼이 뭐 대수야? 20대 이혼도 옆집 건너 옆집일 정도로 흔해. 나… 흠. 음.”
나만 해도 가짜 박수무당이랑 석 달 살고 갈라섰는데 뭘.
혜련은 뒷말을 꾹 삼키고 이경은을 잘 달랬다. 전에 개명비도 받았으니 이번엔 부적값을 받지 않겠다는 선심도 베풀었다.
“딱 보름 있다가 와. 신령님이 아주 좋은 이름으로 빚어주실 테니.”
“감사합니다. 전 이제 보살님만 믿어요. 연꽃 선녀님이 돌아오셔도 홍련 보살님 계속 뵙고 싶은데 그럴 수 있겠죠?”
“그럼. 선녀님도 흐뭇해하실 걸세. 그럼 어서 가봐.”
혜련은 내내 근엄하고 매서운 눈빛을 유지하다 이경은이 문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금수저를 사위로 들이면 그깟 개명값, 부적값이 문제겠는가. 앞으로도 그녀를 전적으로 의지하게끔 최대한 잘 조련할 작정이었다. 불안과 근심이 뿌리내려 심신이 유약해진 중생, 그런 내방객의 돈주머니는 투명한 유리 지갑과도 같았다.
“그나저나 얘는 진짜 훨훨 나는 운이야. 애가 떨어진 건 확실해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지? 흠.”
혜련은 민예서의 사진을 다시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