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서규진의 평판은 담당자들 사이에서도 꽤 좋은 편이었다. 한 번도 부정적인 얘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상황에 따라 이 PD님 맛집 리스트 중 픽할 거라, 아무래도 대표님이 저희 쪽으로 오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그럼요! 그리고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법카니까 부담 없이 장소 고르셔도 된다고 전해 주세요.”
“아아… 네.”
스태프들의 환한 미소가 눈에 선했다. 예서는 로비에서 그와 헤어지고 룸으로 향했다. 하지만 객실로 바로 들어가진 않았다.
엘리베이터 옆으로 난 창 너머, 마리나베이의 화려한 야경이 보였다.
-와, 작품 드라마로 대박 터지고 잘돼서 다음에 여기 올 땐 저 호텔에 묵었으면 좋겠어요!
스태프 중 한 명이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사진을 찍던 게 떠올랐다. 인산인해를 이룬 현지인과 관광객 무리 너머, 가든스 베이 슈퍼트리와 거대한 연꽃 모양의 뮤지엄 건물도 보였다. 흡사 동화 속 세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거대한 유리감이 느껴졌다.
좋은 일로 초청받아 이렇게 근사한 호텔에 투숙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늘 사진에서나 봤던 아름다운 풍경, 그림 같은 경관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저기 어딘가 있을 스태프들과 합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단지 유리창 하나를 가운데 두고 있을 뿐인데도, 바깥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일들과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오래전부터 이뤘던 꿈을 이루었다. 누군가에겐 허무맹랑하고 보잘것없는 일일지 모르나, 그녀에겐 엄청난 성과였고 이제 막 내딛는 한 걸음이었다.
그런데도 기쁘지가 않았다. 정확히는 기쁜데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덧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 이유를 알았다. 너무도 잘 알았다.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이겨낼 수 있을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낯선 이국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은 먹먹함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선배를 잊을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몰려오는 절망을 감당할 수 없었다. 소리 없이 격렬하게 밀어닥치는 먹먹함 앞에, 이렇게 무릎 꿇고 몸부림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침에 국내외 뉴스를 체크할 때마다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출장 동향이나 업무적인 성과에 대한 기사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건 그의 가장 사적인 부분이었다. 정확히는 혼담에 대한 억측과 근거 있는 소문, 혹은 기정사실이었다.
-자기, 이 사람 알아? SG바이오 본부장. 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잖아. 그저께 S호텔 아리아케에서 D바이오파마 장녀와 맞선 봤대.
-그래? 와, SG와 D바이오 조합이면 완전 최강 아냐. 결국 지들끼리 다 해 먹는 세상이네.
-그러게. 결국은 결혼하겠지?
싱가포르에 도착 전, 공항 카페에서 스태프를 기다리던 중 옆자리 커플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음료 주문도 못 하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사지가 마비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해서든 뇌리에서 떨쳐내려 애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지독하게 심신을 옥죄어 오는 듯했다.
예서는 창가 앞에 주저앉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길 반복했다. 자꾸만 중력을 무시하려는 사지에도 바짝 힘을 주려 애썼다.
차라리 사고라도 나서 선배에 대한 기억만 잃는다면….
제발 그러길 바랐다. 한주혁이란 존재만 통째로 사라지면, 적어도 숨은 제대로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지리멸렬한 겨울이 지나고 어디에나 봄이 있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주혁은 말짱한 정신으로 하늘 위에 있었다. 일정이 막판에 변경되어 뉴델리에서 싱가포르로 바로 날아가고 있었다.
미칠 것 같았다. 일등석 좌석의 아늑함도, 방금 목을 축인 최고급 와인의 풍미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며칠째 불면증 환자처럼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데도 랩탑을 시야에서 치우고 눈을 감자마자 누군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얼굴은 업무 중에도 화면 어딘가에 떠 있었다. 늘 눈앞을 어른거리는 심상은 눈을 감으면 보다 명료해졌다. 떨치려 애쓰면 애쓸수록 더 집요하게 망막에 들러붙는 망령 같았다. 세상 누구보다 더 아름답고 매혹적인 저주가 따로 없었다.
‘나는 정말로 게르망트 부인을 사랑했다.’1)
민예서와 헤어지기 전, 아무런 감흥 없이 속독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한 독백이 떠올랐다. 프랑스 문학,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매우 심취해 있던 한 글로벌 제약사 수장과의 미팅을 앞두고 평소 브리핑 서류를 읽듯 무덤덤하게 훑어 나갔을 때였다.
‘내가 신에게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은, 그녀에게 온갖 중상모략을 퍼부어 그녀를 파산하게 하고 실추시킨 뒤 나로부터 그녀를 갈라놓는 모든 특권을 빼앗아 살 집도, 인사를 허락하는 이도 하나 없게 된 그녀가 스스로 내 도움을 간청하러 오는 것이었다.’2)
인물의 감정과 의식의 흐름, 어떤 것에도 공감하지 못했지만 그 단락만은 유일하게 인상적이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던 짝사랑의 대상이 어느 날 가진 것을 모조리 잃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다니. 상상만 해도 짜릿한 일이 아닌가.
‘…비참한 처지의 공작부인이 사정이 바뀌어 힘 있는 부자가 된 내게 구걸하러 온다는, 한낱 공허한 말과 몸짓에 지나지 않는…(중략)’3)
정말로 그렇게 만들어 버릴까.
픽션 속 ‘나’와는 달리 그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동시에 아무런 힘도 없었다.
민예서를 어떻게 망칠 수 있겠나. 그녀가 계약한 플랫폼은 물론, 미래에도 엮일 가능성이 있는 곳까지 죄다 망하게 만들고 매수라도 할 건가?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너무 많은 시간과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보다는 아무도 모르는 외딴곳에 데려가 가둬두는 게 훨씬 빠르고 간편한 방법일 터였다. 민예서는 결국 제 앞에 두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싹싹 빌 것이다. 제발 여기서 내보내 달라며 애원하고 매달리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절박함은 이내 그를 향한 분노와 미움, 혐오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게 민예서니까.
그가 제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는 그런 성격이었다. 한없이 참고 견디다 한번 돌아서면 다시는 여지를 주지 않는 사람.
그는 유부녀의 뒤나 졸졸 쫓아다니며 망상에 젖어 있던 프루스트의 ‘나’와는 달랐다. 하지만 공통점은 확실히 있었다.
‘나’가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동선과 일정을 낱낱이 파악해 스토커처럼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처럼, 그 역시 민예서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같이 보고받고 있었다. 직접 뒤쫓지 않는다는 것만 다를 뿐.
주혁은 상체를 일으켜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갤러리 안에는 민예서의 근황이 날짜별로 정리된 폴더가 있었다. 사진을 처음부터 하나씩 넘기는 손길은 서류를 펼칠 때처럼 덤덤했다. 스스로가 광적인 편집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자각마저 없었다.
숨쉬기가 어려워 제 왼쪽 가슴팍을 여러 번 내려쳤다. 그런 뒤 다시 몸을 눕히고 어두운 기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추락해 바다 어딘가 처박혀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해가 바뀐 뒤 수차례 반복된 비행 중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죽지는 않고 잠깐만 실종이 되기를 바랐다. 좀 망가지더라도 회복 불능 상태에만 빠지지 않으면.
손이 어느새 가슴 위를 더듬다 쥐어뜯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비명을 내지를 것 같았다.
불치병 선고를 받은 환자들 심경이 분노, 절망, 부정, 그러다 결국 체념과 포기로 변한다고 했던가. 그는 여전히 분노와 절망, 그리고 부정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체념으로 넘어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기류 속에서 비행기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민예서. 네가 어떻게 나를….
수십 번, 수백 번을 곱씹고 자문했던 말이 뇌리를 독니처럼 내리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날 더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지?
***
혜련은 중문 너머 또 다른 방에서 뒹굴거리며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전화가 걸려 오자 몸을 바로 세웠다.
“어, 여보세요.”
신당에서 보살 옷을 입고 손님을 맞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어조였다. 또래 20대 여자들처럼 발랄하면서도 조금은 되바라진 목소리였다.
“알았어요. 일단 정우 약국네는 그런 사정이 있고. 다음은 거기지? 찜질방 김 사장네. 그 집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잘 탐문해 와요. 그럼 수고!”
통화를 끊기도 전에 바깥의 주 실장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혜련아. 이 약사 올 시간 다 됐어. 어서 준비해.]
그녀는 재빨리 화장을 고치고 흰 소복 같은 한복을 걸쳤다. 일명 연꽃 선녀 차연화의 숨겨진 딸, 양혜련은 단 5분 만에 신내림을 받은 역술가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이제 홍련 보살이 된 그녀는 준비됐다는 문자를 주 실장에게 보낸 뒤 신당 한가운데 자리 잡고 앉았다.
옷장 문 안쪽에는 열 개 정도의 이름과 부수적인 사항들이 빽빽이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VIP라기엔 뭐하고 굳이 말하자면 ‘남편 오입질이나 자식 일로 골머리를 썩이는 문제가 있어서 적당히 조련하고 달래어 최대한 뽑아 먹어야 하는 맹신자 호구’ 명단이었다.
그녀가 신내림을 받은 건 거짓이 아니었다. 귀신과 교접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보이고 파악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소위 호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미래까지 얼추 짜 맞출 순 없다. 과거와 현재를 대략 끼워 맞추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호구들은 특별한 케어를 요했다. 그래서 예약일 전에 각 집안 사정을 사전 탐색해 정보를 얻는 건 필수불가결한 투자였다. 열 중에 하나쯤은 걸려라, 허황된 예언을 대강 내지르던 모친, 연꽃 선녀의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지금은 세상이 변했거든. 뿌린 대로 거두리라- 적당한 투자가 필요하단 말이지.
혜련은 거울을 집어 들어 눈썹 선이 제대로 평행을 이루는지 한 번 더 점검한 뒤에야, 그날의 마지막 손님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각주
1)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2, 5권, 109쪽
2)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2, 5권, 109쪽
3)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2, 5권, 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