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94)화 (95/124)

<94화>

“…또? 아까 밥 먹었잖아.”

“애기가 배고프대. 치킨 시켜주면 안 돼? 아니면 족발!”

하아, 민정우가 마른세수를 하며 앉은 채로 발을 쾅 굴렀다.

“그만 좀 먹어라. 아까도 시장에서 닭강정에 만두를 몇 판을 먹었어, 어? 아무리 애를 뱄다지만 하루에 몇 끼를 먹는 거야….”

“What? 저, 정우. 너 지금 애 앞에서 소리 질렀어?”

소피아 최, 한국 이름 최소라가 흠칫 놀라 벌벌 떨었다. 이국적인 두 눈이 잔뜩 격앙되며 몸도 움츠러들었다.

“이제 날 사랑 안 해? 내, 내 몸이 변했다고 마음이 변한 거야? 응?”

소라가 억울한 듯 울먹이기 시작했다. 긴 갈색 머리가 폭포처럼 후드득 어깨 위로 떨어졌다.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인형처럼 예뻤고, 두 손으로 감싸 안는 배가 아니면 임산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여전히 늘씬했다.

“소라야. 왜 또 울어…. 소리 질러서 미안해.”

정우는 바깥 상황을 좀 보고 와서 치킨이든 뭐든 시켜주겠다고 달래곤 슬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거실과 주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다용도실로 가보니 외조모 윤미실이 바닥에 앉아 밤을 까고 있었다.

“할머니. 엄마는…?”

“말도 마라. 누아갖꼬 아무것도 안 먹고 울기만 하는데 내도 복장 터진다마.”

“할머니.”

정우가 그 옆에 주저앉아 머뭇머뭇 운을 뗐다.

“나랑 소라, 당분간 할머니 집에 가 있으면 안 될까? 엄마가 저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나도 난데, 소라가 불편할 것 같아서 도저히 안 되겠어.”

“쯧쯔… 이래가 아들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카이. 느그 엄마, 니 때문에 저러고 있는데 가긴 어델 간다카노!”

“나 혼자면 괜찮은데 소라가….”

“마! 그놈의 소란지 고둥인지 다슬긴지! 니는 느그만 중허고 느그 엄마는 눈에 보이지도 않나! 하이고 마… 고마 주디 닫고 드가 있어라.”

“엄마도 걱정돼! 왜 안 되겠어. 그치만 소라, 지금 홑몸도 아니잖아. 일단 할머니는 여기서 엄마 좀 돌봐줘. 나랑 소라는 할머니 집에 가서 며칠만 있다가 다시 올게. 일주일 정도면 엄마도 맘 좀 풀렸을 거 아냐. 응? 소라가….”

“확! 쎄리 끄지라캤재!”

“아, 알았어! 왜 그래, 무섭게…!”

정우는 윤미실이 밤을 깎던 칼을 도마 위에 푹 찌르고 나서야 히잉, 방 안으로 다시 도망쳤다. 소라는 배고프다 징징대던 것도 잊은 듯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그는 기껏 잠든 여자가 깰까 싶어 숨을 죽였다. 차라리 자고 있을 때가 맘이 편했다. 앞으로를 생각하니 막막했다. 연신 머리를 벽에다 콩, 콩 박다가 흠칫 놀라 소라를 봤다가 다시 한숨을 쉬기만을 반복했다.

짜증 나네. 엄마가 저렇게까지 길길이 날뛸 줄은 몰랐는데. 아, 씨팔.

그가 뭘 하든 늘 절대적인 편이 되어주던 모친이 저 정도로 극렬하게 반대할 줄은 미처 몰랐다.

어차피 결혼은 해야 되는데 요즘 혼전임신이 뭐가 대수라고.

소라의 배경이 모친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긴 할 것이다.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한국에 오기 전부터 최소라라는 한국 이름까지 짓고, 3년 동안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한 소피아 카터는 태어나자마자 생모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버려 미국으로 입양된 고아였다.

당시 생모가 남긴 쪽지를 통해 그녀가 동유럽계로 추정되는 남자와 여행 중 만났다가 헤어진 뒤 소피아를 낳은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었다. 얄궂게도, 소피아의 생모도 고아원 출신이라 한국에 연고자가 전혀 없었다.

-어디서 저런 걸 데려와서! 절대 안 돼! 나가! 나가라고! 네가 뭔데 우리 아들 인생을 망쳐놔! 당장 꺼져!

뒷목을 잡다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이경은이 떠오르자 다시 한숨이 나왔다.

나도 소라랑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라고.

하지만 소라와 헤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배 속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그런 가능성은 단 1%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

영화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첫 데뷔작이 전무후무한 매출을 올려서 유명세를 타다 못해 전 국민이 소설 제목을 알게 되는,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힐 정도의 반향은 없었다.

하지만 여러 반가운 제안이 들어오고, 국내외 관련 행사에 러브콜을 받을 만큼 꽤 좋은 성과를 거두긴 했다. 웹툰이 나오기도 전, 연재가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영상화 제안이 들어온 게 가장 고무적이었다.

세상이 뒤집히는 정도는 아니라도 적어도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는 한 것 같았다. 그 새로운 세계는 예서에게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리고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해가 바뀌고 4월도 중순으로 접어들 무렵, 예서는 플랫폼 관계자들과 인천공항에서 합류해 비행기에 함께 올랐다. 그녀의 소설, <신성불가침 영역(Shrine)>의 드라마화 제작을 맡은 스튜디오 블루피크(Blue Peak)가 싱가포르에서 개최될 글로벌 OTT 기업 킥오프 미팅에 초대된 까닭이었다.

“작가님! 잠깐만 괜찮으세요?”

비행기에서 내려 다 같이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뒤 먼저 룸으로 향할 때였다. 낯설고도 익숙한 음색에 예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였더라…? 작가님이라 부르는 걸 보면 스튜디오 쪽 사람일 텐데.

“많이 피곤하지 않으시면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제야 생각이 났다. 훤칠한 키, 부드러운 음색처럼 선한 인상의 남자는 스튜디오 블루피크의 대표, 서규진이었다. 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있을 미팅에 대해 뭔가 논의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네. 대표님.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서규진은 싱긋 웃으며 그녀를 라운지 바(Bar)로 이끌었다. 자리로 안내받아 가던 중, 다른 손님의 부주의로 크게 부딪칠 뻔했지만 그는 오히려 상대에게 사과하며 선뜻 물러났다.

서빙 직원들에게도 깍듯이 예를 지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사적이고도 겸손한 몸가짐이 배어 있는 남자였다.

[현재 OTT 포화상태라고 하지만 사실은 더 많은 신규 플랫폼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질의 우리 콘텐츠가 세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다양한 기회가 늘고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의 언론사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부친의 제작사인 스튜디오 D에 뛰어들어 바닥부터 배워온 지 어언 10년째, 이제는 버젓이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부친의 스튜디오까지 계열사로 합병했다던가.

[내년에는 북미는 물론, 일본 쪽과도 협업을 논의 중입니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갈 글로벌 협력사와 OTT를 더 늘리면서 자사도 더 확장하고, 대한민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한 콘텐츠도 적극 발굴할 계획입니다.]

긍정적인 에너지와 야심에 차 있던 얼굴이 맞은편의 엷은 미소 위로 겹쳐 보였다. 서규진은 그녀에게 차를 권하며 여정이 힘들진 않았는지, 얼마 전 감기에 걸렸다고 들은 것 같은데 건강은 괜찮은지, 컨디션을 세심하게 살폈다.

“네, 다 나았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작가님을 잘 챙기는 것도 저희 일인걸요.”

그가 시원시원 말을 이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는 상대방이 누구든 쉬이 제 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온기가 있었다. 으레 사업가라면 냉정한 이미지인 줄만 알았는데.

순간 뇌리에 누군가의 잔상이 떠올랐다. 예서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인상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는지 맞은편의 서규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차가 좀 쓴가요? 다른 차로 다시 주문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예서는 엷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제야 서규진도 안심했는지 다시 운을 뗐다.

“계속 고사하셨는데 동행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초대받으신 김에 작가님도 M 플랫폼에 직접 인사하시고 미팅에도 참여해 보면 좋으실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그쪽에서 작가님 차기작이랑 다른 예정작들 영상화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떠볼 것 같아요.”

느낌이 아주 좋다며 서규진이 어조를 살짝 낮췄다.

“그래도 확답은 줄 수 없죠. 다른 업체들 계약조건도 들어봐야 하니까요.”

“네. 그렇긴 하죠. M 쪽에서 파트너십 체결 제안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아무쪼록 얘기가 잘 돼서 좋은 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은 한참 더 얘기를 나누다 바를 나왔다. 20분만 얘기하자던 게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워낙 언변이 좋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못 느끼기도 했지만, 그가 그녀의 소설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많은 질문을 한 까닭이었다. 단지 제작사 대표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독자로서의 호기심이 더 강했던 대화였다.

“작가님 쉬셔야 하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말이 많아서….”

“아니에요. 저도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작가님.”

예서가 다시 돌아보았다. 그가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경 너머 서글서글한 눈매가 반달처럼 접혀 있었다.

“내일 미팅 이후로도 관광 겸 사흘 정도 더 있으실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네. 이왕 온 김에 담당자님과 스태프분들도 휴가를 내셨다고 해서 같이 돌아보기로 했어요.”

“저도 일정상 며칠 더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저희 쪽 직원들은 모레 한국으로 돌아가 봐야 돼서 저 혼자 달랑 남게 됩니다.”

“네, 그러시군요.”

“네.”

“……?”

예서가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리자 서규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상대방까지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유쾌한 웃음이었다.

“제가 사실 혼자 밥 먹는 걸 싫어해서요. 뭐 아침이나 점심 정도는 간단히 일하면서 때울 수 있지만 저녁은 아무래도 좀…. 이 먼 타국에서 어디 어슬렁어슬렁 들어가 혼자 청승맞게 먹는 게 도저히 엄두가 안 나네요.”

“…….”

“방에서 혼자 컵라면을 먹자니 그건 그것대로 너무 처량할 것 같고. 그래서 말인데요, 저녁은 저도 좀 끼워주시면 안 될까요? 사흘 중 적어도 이틀은….”

“아아. 네, 그렇게 하세요.”

예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사 대표면 한 팀이나 다름없으니 다른 스태프들도 흔쾌히 수락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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