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93)화 (94/124)

<93화>

“저는 누구와도 다시 시작할 마음이 없어요.”

-나는 누구와도 사귈 생각이 없어.

4년 전 언제였지. 두 번째 고백을 했을 때였던가? 그가 최인하와 가까이 지내는 것 자체를 걸고넘어졌던 날이었다. 그녀를 좋아한다면서도 사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른 새끼에게 바로 갈아타서 친하게 지내는 꼴은 못 봐주겠다고 했었지.

“선배와는 달리, 저는 상관없어요. 선배가 다른 사람 누구에게 가든.”

한주혁의 얼굴이 대리석처럼 굳었다. 그 역시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예전에 뱉었던 말을 4년이 흐른 지금,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었다.

“저는 그때의 선배와 달리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한 이유가 있어요.”

호칭이 어느새 다시 ‘선배’로 돌아와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튀어나왔다.

“더는 선배를 좋아하지 않아서예요.”

“차라리….”

한주혁이 그녀를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대로 한 발짝만 더 오면 서로의 몸이 맞닿을 것 같았다.

“차라리 소리치고 울고, 때려. 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그따위 거짓말은 집어치우고.”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오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타이를 더 느슨하게 당기는 손등의 핏줄이 파랗게 불거져 있었다. 다분히 위협적인 태도였지만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울지 않기 위해,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느라 머리가 부서질 것처럼 아플 뿐이었다.

“…그럴 이유가 없어요. 거짓말도 아니고요.”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돼.”

“…….”

“멋대로 날 흔들고, 매달리고, 붙들지 말았어야지.”

“선배도 계속 날 보고 있었어요.”

예서가 침착하게 반박했다.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혼란스러웠어요. 결국 먼저 다가왔던 건 선배예요.”

안 돼. 울지 마.

눈물을 참느라 혀를 꽉 깨물었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먼저 펜을 준 것도, 같이 밥을 먹자고 한 것도… 계속 내게 다가왔던 건 선배였어요.”

떡볶이를 단둘이 먹은 걸 수다쟁이 동기가 보는 바람에, 일부러 다음날 나머지 조원들도 불러 동일한 메뉴를 사줬다는 말도 했었지. 혹여 과장된 소문이 퍼져 내게 귀찮은 시선이 따라붙을까 걱정이 되어서.

“먼저 다정하게 접근해 온 건 선배였다고요. 기억 안 나세요?”

“그래, 인정해.”

그가 거칠게 이마 위 머리를 쓸어올렸다. 두 눈 가득 불꽃이 튀고 있었다.

“결국은 너랑 사귀게 되었을 거야.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자꾸만 너에게 향하고 있었고, 제어할 수도 없었으니까. 아니, 제어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어.”

“…….”

“나도 처음부터 너한테 반해 있었거든. 미친놈처럼 빠져 있었으니까.”

아뇨, 선배. 선배는 나한테 반하지 않았어요. 그저 호기심이 동했거나 잠깐 갖고 싶었던 거였죠.

결국 약혼까지 할 정도로 감정이 발전하긴 했지만 결국은 그녀를 제 입맛대로 휘두르고 틀에 맞춰 소유하기만을 바랐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얘길 하는 게 아냐.”

“…….”

“내가 한 말, 과거에 너한테 한 언사, 모두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어. 공모전 수상도 했으니까 창작 일도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고.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미안해요, 선배. 계속 똑같은 얘기만 반복되는 거, 이젠 지쳤어요. 그만 가볼게요.”

“이럴 거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붙잡았어.”

사늘하게 가라앉은 어조에 예서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잡아줬냐고.”

“……?”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뭐라 반문하기 직전, 그가 한숨을 들이켰다.

“그래. 나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개새끼였어. 지금도 그래.”

짓씹듯 내뱉는 저음에, 예서는 묵묵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와 함께 있는 일분일초가 점점 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잡아줬냐는 추궁에 대한 의문 때문에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네 말대로야. 나는 소설을 읽어도 스토리에 이입도 할 수 없고 공감도 가지 않아. 뭐가 재미있고 슬픈지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 날 키워준 큰아버지, 큰어머니….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도 감정적인 교류를 할 수 없고.”

“…….”

“하지만 너에겐 달라. 너에게만은. …그걸 왜 모르지?”

그녀가 힘든 건 싫었다. 민예서의 모든 것을 오롯이 가지고 싶었고, 통제하려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오직 저 하나만을 바라보고, 모든 희로애락을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느끼길 원했다.

“모르는 게 아니라….”

예서가 이 끝에 긁힌 혀를 간신히 움직였다.

“선배의 방식에 응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

“제 기준에서 그건 사랑이 아니니까요.”

비틀린 소유욕, 그저 곁에 붙들어두고 멋대로 조종하려는 이기심과 자기애일 따름이었다. 예서는 가방을 어깨에 메곤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눈앞에 바위처럼 선 그의 옆을 지나쳐야만 했다.

“선배를 정말 사랑했어요. 내 모든 걸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막상 줄 것도 없었던 주제에, 뭐든 다 주고 싶었어요. 선배가 원하는 대로 나 자신을 다 맞추고자 했어요.”

“…….”

“하지만 결국 여기까지였어요. 이젠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예서가 그의 가슴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키 차이 때문에 늘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 선배를 사랑하지 않아요.”

들릴 듯 말 듯, 속삭임이 이어졌다.

“몇 번이고 되풀이 말해 줄 수 있어요.”

뭔가를 단언하는데 반드시 언성을 높일 필요는 없었다. 예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초연하게 말을 맺었다.

“다시는 선… 한주혁 씨와 만날 일 없기를 바라요.”

그의 옆을 스쳐 가는 단 몇 초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북소리 같던 박동이 가슴을 타고 올라와 골을 울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시야가 멍했다.

잠긴 출구 앞에 서자 김 비서가 잠깐 머뭇거리다 문을 열어 주었다. 예서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도로로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님! 손님!”

고개를 들자 기사가 고개 돌려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디 가시는지 말씀을 해 주셔야죠.”

“네? 네… R아파트 2단지….”

기사는 단지 안에 들어설 때까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얼마나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지, 내리고 나서도 아파트 건물 안에 들어갈 때까지 불안하게 지켜보는 것 같았다.

***

-나는 이제 선배를 사랑하지 않아요.

주혁은 텅 빈 카페 한가운데 선 채 민예서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다시는 선… 한주혁 씨와 만날 일 없기를 바라요.

그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한마디. 그와 다시 만날 일이 없길 바란다는 또 다른 한마디. 단 두 마디가 그를 죽일 듯 독처럼 파고들었다.

등에 차디찬 냉기가 와닿았다. 맞은편 유리 거울 너머,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벽에 기대선 제 모습이 보였다. 선 채로 죽어가는 심신 불구 같았다. 혹은 이미 경직되기 시작한 시신이거나.

핏발 선 시선이 민예서가 사라진 출구를 망연히 향했다. 손이 멋대로 품속을 뒤져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한 개비 꺼내 물고, 불을 붙이고,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공기 중에 내뱉는 일련의 행위가 기계처럼 관성을 따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민예서를 끌고 와 어딘가에 감금시켜 둘 수도 있었다.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고 철저히 구속함으로써 몸이라도 제 곁에 강제로 묶어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항복을 끌어낼 순 없으리라. 그녀가 이제 한주혁의 본질을 깨달아 버린 것처럼, 그 역시 민예서의 또 다른 면모를 통감한 후였다.

민예서에게 강압적인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억지로 가두고, 다치게 하거나 망가뜨려도 절대 굴하지 않을 테니. 다시는 그가 전부였던 그때로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그 말간 눈 가득, 그를 미처 다 담을 수 없어 했던 시절.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마저 애틋했던 그날은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정신이 들었을 땐 민예서가 머물렀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야가 먹먹했다. 눈을 뜨고 있기조차 괴로워 두 손을 눈두덩에 댄 채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발밑이 무너지며 바닥없는 무저갱 속으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그가 잃은 것이 너무도 컸다. 어쩌면 남은 것 하나 없이, 죄다 잃었을지도 몰랐다.

***

모두가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신년을 고대하는 연말, 정우 약국 모자(母子)의 아파트는 초상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외조모 윤미실은 한숨을 푹푹 쉬며 다 늙은 딸의 죽 시중을 들기 바빴다. 그 원흉인 민정우는 멍하니 방에 들어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볼록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연신 그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정우. 나 배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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