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밥 다 먹었으니까 거실에 가서 얘기 좀 해, 엄마.”
“왜 그래? 너 또 학점을….”
“학교 얘기 아니야. 일단… 가서 앉아.”
거실에 나란히 앉을 때까지만 해도 이경은은 꿈에도 몰랐다. 어딘지 심상치 않은 아들의 분위기에도 기껏해야 공부하기 힘들어 죽겠다는 어리광이겠거니 여겼다. 혹은 너무 과한 사치품, 이를테면 차를 뽑아달라는 이야기라든가.
예서가 결혼하면 차든 뭐든 원하는 건 다 해 줄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다시 예서에게 연락 좀 해 봐야겠어.
“엄마, 나 사실은… 한국에 누구랑 같이 왔어.”
“뭐? 미국인 친구 데려왔어? 그럼 같이 오지 왜.”
“국적이 미국이긴 한데… 동유럽이랑 한국인 혼혈이야. 어머니가 한국인.”
“그래? 하긴 미국은 워낙 인종이 다양하니까. 집에 한번 초대해. 네 친구면 엄마가 밥이라도 해줘야지.”
“엄마, 실은….”
정우는 마침내 결심한 듯 머뭇머뭇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간략하게 얘기를 마치는 동안, 이경은은 몇 번이나 뒷목을 잡고 넘어갈 뻔했다.
“뭐? 뭐라고…?”
“…….”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엄마한테 장난치는 거지? 응? 빨리 바른대로 말해!”
“사실이야, 엄마. 엄마도 많이 놀랐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아아악! 이경은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명을 내질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럴까. 이경은은 분을 못 이기고 다짜고짜 아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못살아, 내가 못 살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에!”
태어나서 아들에게 손댄 역사가 없던 그녀였다. 25년 동안 한 번도 맞은 적 없는 정우도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경은은 그의 어깨를 움켜쥔 채 거칠게 흔들고 머리채를 휘어잡다 못해 사정없이 등짝을 내리치는 등 발악에 가까운 몸짓을 이어 나갔다.
“차라리 죽어! 나가 죽으라고! 아악!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어떻게…!”
“어, 엄마! 엄마, 제발 진정 좀 해보라고!”
정우는 정신없이 맞으면서도 낯선 모친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진정을 시켜보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눈이 뒤집힌 채였다.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던 그의 얼굴도 벌게졌다.
“아야, 이거 놓으라고오! 씨발!”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니들 아빠 그렇게 가고 두 번이나 사기당해 재산 날려, 너 유학 보내려고 등골 빠지게 생고생하고, 그 대가가 겨우 이거였니? 응?”
아흑, 이경은은 악다구니를 치다 급기야 제 가슴을 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 안은 곡성에, 그만 좀 하라며 소리치는 고함에, 완전히 아비규환이 되어 버렸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윤미실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자마자 기겁했다. 거실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세밑까지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단단히 무장을 하고 한파 속 산책을 나갔을 때였다.
예서는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받지는 않았다. 혹시 잘못 연락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런 실수를 할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모르는 일이니까.
벨은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울렸다. 결국 망설이던 끝에 통화에 응했다.
“김 비서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불쑥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정중한 어투에 그녀도 차분히 응대했다.
-다름이 아니라 한남동에 남아 있던 소지품을 돌려드리려고 합니다. 저도 유 대리에게 상자째 받아서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침 수원 쪽에 있어서 지금 댁에 계시면 가져다드릴 수 있거든요.
“네? 어떤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아닐 테니 그냥 버려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바쁘신데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지시가 있으셨기에 제가 임의로 처리하는 건 어렵습니다.
난처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예서는 잠시간 입술만 달싹였다. 본부장이란 말에 가슴에 한기가 밀려왔다. 그냥 버려달라, 재차 말하고 싶었지만 김 비서를 더 이상 곤란하게 할 수도 없었다.
“네. 그럼… 괜찮으시다면 호수 공원 앞 카페에서 잠시 뵐게요.”
통화를 끊고 산책로 끝에 자리한 카페로 향했다. 별일 아니라 여겼다. 그저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상자를 받아 돌아서면 그뿐이다.
늘 담백하고 친절했던 김 비서를 보는 것 자체는 싫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상사인 ‘본부장’이 아니라면. 그럼 이렇게 그와 만날 일 자체가 없을 테니 온전히 편할 수도 없었다.
예서는 카페에 앉아 음료를 시키고 테이블에 자리했다. 좀 늦는가 싶어 휴대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1월부터의 정식 연재 일정을 살필 때였다.
카페 주인과 아르바이트생이 드문드문 손님이 있는 테이블마다 가서 진열장에 있던 쿠키며 마카롱 박스를 하나씩 건네고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처음엔 난색을 표하다 결국 수긍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둘씩 카페를 떠났다. 하지만 주인은 예서에겐 오지 않았다.
어느덧 카페에 남은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시감이 밀려왔다.
뭐지? 왜 나만 혼자….
예서가 주인의 눈치를 보다 그녀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입구로 막 들어서는 김 비서가 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그보다 한 뼘 더 큰 인영이 들어섰다.
설마.
예서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비서가 꾸벅 인사를 한 뒤 자그마한 상자를 건넸다. 열어보자 예상대로 머리핀과 낡은 스카프 등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결국 물건을 돌려준다는 건 핑계일 따름이었다.
“…죄송합니다.”
김 비서는 재빨리 사과를 해 보인 뒤 후문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느새 한주혁이 다가와 있었다.
“수원 공장에 들렀다가 본사 가던 길이었어.”
“…….”
“얘기 좀 해.”
눈앞의 남자는 늘 그녀의 뇌리 한구석에 머물던 그대로였다. 얼굴이 조금 야윈 것 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슈트 차림에, 위압적이고 오만한 한주혁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을 내세워 이런 식으로 들이닥치는 거… 너무 비겁한 것 같아요.”
예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견 차분해 보였지만 말아쥔 두 주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쿵, 쿵, 북소리처럼 울렸다. 두 달 반 만에 그와 마주하는 감정은 단 하나로 집약되었다. 다시 그 앞에서 흔들리거나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너한테 닿을 수가 없으니까.”
“…….”
“앉아. 저 문은 30분이 지나기 전엔 열리지 않을 거니까.”
얘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는 소리였다. 카페를 통째로 빌리다 못해 퇴로까지 철저히 막아놓다니. 역시 한주혁다웠다.
“더는 한주혁 씨와 할 얘기 없어요.”
예서는 그대로 서서 테이블 앞까지 다가선 그를 응시했다. 발가락이 곱아들며 전신에 오한이 일었다. 하지만 이 악물고 참았다. 그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어떻게든 태연하게 버텨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두 달 반이야.”
답답한 듯,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는 몸짓에 날이 서 있었다.
“슬슬 대화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
“그건 그쪽 혼자만의 생각이에요.”
그동안 선심 써서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는 듯한 오만함에 예서는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특유의 위압적인 태도에 당당해지려 애썼다. 이제는 주눅들 이유가 없었다.
“이제 와서 뭘 말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네 일에 대해 심하게 말했던 건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사과하는 태도라기에는 너무 담담했다. 아까보다 거만함이 한결 걷히긴 했지만 예서는 동요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 그 너머에 있다.
“네.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예서도 담담하게 답하곤 의자에 걸쳐둔 점퍼를 집어 들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하지만 출구 쪽으로 두 걸음 이상 나아가진 못했다. 한주혁의 거구가 시야를 단번에 막아섰다.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예서를 내려다보았다. 오연한 몸짓과는 달리, 두 눈 가득 파란이 일어났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응? 그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침음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말을 해. 뭐든 할 테니까.”
“…….”
“예서야.”
“한주혁 씨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내 의향을 존중해 주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긴장으로 목이 뻣뻣해 간신히 쥐어짰다. 꾹 말아쥔 주먹 안에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 강한 일침을 놓기로 했다. 그가 포기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게끔.
“예전에 그 말 기억해요? 뭐가 됐든 내 의향에 따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겠다던 말.”
-헤어지고 싶어? 여기서 멈추고 싶은지 네 의향을 묻는 거야.
그녀가 돌아섰을 때 등 뒤로 꽂혀왔던 물음은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만약 끝내고 싶다면, 네 의향에 따를게.
“지금 마지막으로 부탁할게요. 내 의향에 따라주세요.”
“…….”
“그리고….”
일부러 상처 줄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제는 그녀를 완전히 놓아주길 바랐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를 상처입힐 작정이었다. 결국은 둘 다 다시는 서로에게 상처 입을 일이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