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그녀는 맥주를 두 캔 더 꺼내와 하나는 예서 앞에 놓아주었다.
“민예서, 술 많이 늘었다? 전에는 한 캔도 채 못 마셨는데 이젠 얼굴만 빨개지지 물처럼 마시네?”
하하, 예서가 씁쓸하게 웃었다. 주량이 점점 늘어가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은 치킨과 샐러드를 현주 쪽으로 밀어주었다.
“왜? 그만 먹게? 다리 두 개 남은 거 공평하게 하나씩 끝내자.”
현주가 두툼한 닭 다리 하나를 예서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예쁘게 네일링 된 손 위로, 다른 큰 손이 겹쳐 보였다.
“현주야.”
아무래도 취한 것 같았다. 얼굴만 터질 듯 달아오른 게 아니라 머리에마저 열기가 번진 듯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필터 없이 혀가 절로 움직였다.
“내가 왜 선배한테 반했는지 알아? 아니… 내가 선배에게 반해 있었던 걸 언제 확실히 깨달았는지….”
혀는 꼬여있지 않았다. 취한 건 확실한데 이상할 정도로 목소리는 멀쩡했다.
“이거 때문이었어. …어이없지?”
닭 다리를 내려다보던 예서가 피식 웃었다. 스스로도 바보 같았다.
“맨 처음 둘이 밥 먹은 게 팬케이크하고 또 뭐더라… 맞아. 스패니시 오믈렛. 그리고 치킨…. 선배가 닭 다리가 제일 맛있으니까 많이 먹으라고 내 접시에 다 몰아줬거든.”
하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맞은편의 현주는 심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녀의 술주정을 만류하진 않았다.
“현주야, 그거… 알아?”
“…….”
“차라리 차갑고 못되기만 했다면… 그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선배는… 선배가 다정할 때는… 내 모든 것이었어.”
돌아가신 아빠, 냉정한 엄마,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쌍둥이 오빠, 그 모두를 대신할 수 있을 만큼 다정하고 따뜻한 보호자였다.
“내가 정말 힘들 때마다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달려와 준 사람이 선배였어.”
현주의 어깨 너머, 창밖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보였다. 엄마와 다투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던 겨울밤도 오늘처럼 추웠다. 한밤중에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고 길 잃은 미아처럼 갈 데도 없었을 때, 선배는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와 함께 있어 주었다.
그리고 그날 호텔에서 처음 서로를 안았다. 그녀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결국은 처음을 나누게 되었다.
내가 먼저 나서서. 늘 그랬듯 내가 아쉬워서….
“그래. 너 노트북에 악성코드였나? 그거 깔려서 고생했을 때 주혁 선배가 친척 결혼식 때문에 미국 가려다 공항에서 바로 돌아섰다며. 성준 선배가 예전에 그러더라. 너 진짜 엄청 좋아하고 아끼는 게 눈에 보였다고….”
현주가 한숨으로 말끝을 흐렸다.
“어휴, 그럼 뭐해. 결국 안 맞아서 이별했잖아. 더는 생각하지 마. 다른 거, 즐거운 생각 하면서 마시라구.”
예서가 맥주 캔을 내려놓았다. 간신히 누르고 있던 눈물이 왈칵 터져버렸다. 흐윽, 기어이 얼굴을 두 손에 묻은 채 어깨를 하염없이 들썩였다. 목이 메다 못해 숨 쉬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하아, 현주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주섬주섬 휴지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울지 말라고 무리해서 달래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그저 곁에 있으면서 실컷 울게끔 가만히 들어주는 게 최선이라 믿었다.
“나 진짜 모자란 것 같아. 선배가… 잘해준 것만 생각나. 다정했던 순간들만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현주가 차를 끓이려는 듯 티포트에 물을 올리곤 한숨을 폭 쉬었다.
“예서야. 너… 혹시 선배랑 다시 잘해 볼 마음이 있어?”
예서가 고개를 들었다. 현주는 뭔가 말할 듯 말 듯, 애매모호한 눈빛이었다.
“그럴 가능성, 조금이라도 있냐구.”
“아니.”
예서는 고개를 저었다.
“선배랑 나는 안 돼. 그럴 가능성… 전혀 없어.”
눈물이 손등 위로 뚝 떨어졌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는 정수리 위로 현주가 혀를 찼다.
“그래. 실컷 울고 다 털어내 버려.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참는다 했다….”
다시 한참을 흐느끼던 예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 만난다고 들었어. 물론 그것 때문에 가능성이 없다고 한 건 아니지만….”
송유영이 보여주는 사진도 보았고,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 같지는 않았다. 맞선인지 데이트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결국은 둘 중 하나일 터였다.
“누가? 주혁 선배가?”
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봤대. 어떤 여자랑 만나는 거….”
“뭐?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
다른 여자랑 만나고 있다면 저번 주 호텔에서 그렇게 미련을 뚝뚝 흘리지도 않았을 건데?
현주는 다 털어놓을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예서는 그녀가 놓아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곤 씁쓸하게 웃었다. 벌겋게 부은 눈 아래 그늘이 져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부유하고 세련된 사람이었대. 이제야 선배도 자기랑 어울리는… 격이 맞는 집안 사람과 교제하는 거겠지.”
“누가 봤대? 어디서?”
그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현주는 발신자를 보더니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진짜! 회사 실장님이야. 뭐 급한 일 생겼나 본데 잠깐만 통화하고 올게. 이건 내가 치울 테니까 넌 들어가서 쉬어.”
현주는 휴대폰을 귓가에 대며 방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여보세요, 네에, 실장님! 괜찮아요! 간드러진 목소리 사이로 어금니가 빠드득 갈리고 있었다.
현주가 실장의 요청에 따라 컴퓨터에 한참 앉아 있다 나왔을 때였다. 말끔히 정돈된 주방을 보자 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내가 치운다니까. 하여간 잠시라도 어질러져 있는 걸 못 보지.”
그녀는 복도 맨 끝의 방 앞에 다가서서 노크를 하려다 손을 멈췄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려고 했지만 괜히 속을 들쑤시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현주는 수초간 방문 앞에 서 있다가 결국 돌아섰다. 역시 지난주 호텔에서의 일도 함구하는 게 최선 같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부유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여자였다고? 이상하다. 호텔에서 봤던 선배는 분명 아직도 예서를….
깎은 듯한 이목구비,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매무새였지만 어딘가 병자 같았다. 수심 어린 눈빛은 피폐했고 온기나 평안함이라곤 전혀 엿보이지 않았었다.
그 새 맞선이라도 본 건가? 하하… 하긴 우리와는 애당초 다른 세계니까.
***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 이경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아들이 짧은 겨울방학을 맞아 1년 만에 집에 돌아와 있었다.
“정우야! 왜 그러고 앉아 있어? TV라도 틀지. 아 참, 외할머니 어디쯤 오셨나 전화는 드렸어?”
“어? 아, 맞다. 깜빡했어. 지금 전화 드릴게.”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던 정우가 허둥지둥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경은은 시장에서 사 온 떡갈비와 불고기를 다시 굽고 생선을 그릴 위에 올리면서 어딘가 이상한 아들을 흘깃 돌아보았다.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심심하다고 TV라도 켜놓든가 게임을 했을 텐데. 왜 저러지?
시차 때문에 피곤해서겠거니 했다. 잠시 후 모자가 식탁에 앉자마자 정우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경은은 윤미실이 도착하면 같이 먹으려고, 아들의 음식 시중만 열심히 들었다.
“많이 배고팠구나? 천천히 먹어.”
“응. 너무 맛있어서.”
“우리 아들 어째 좀 야위었네? 잘생긴 얼굴이 해쓱해졌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엄마. 사실은…. 아, 맞아. 예서는? 예서한텐 연락 안 했어? 아까 버스에서 전화했는데 번호가 바뀐 것 같던데.”
“응, 번호 바꿨어. 예서 이야기는 좀 있다 하자. 내가 걔 생각만 하면 복장이 터진다, 아주.혼자 잘났다고 집도 멋대로 멀리 이사 가고 번호도 바꾸고….”
“왜 그러는데.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그리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엄마, 예서한테 너무 그러지 마.”
정우는 모친이 손수 발라주는 생선 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동안 예서가 돈도 보내주고 그랬어….”
“뭐? 예서가?”
이경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따로 너한테 돈을 보내줬다고? 왜? 네가 달라고 했어?”
“으응….”
“아니, 내가 올해는 조금씩 더 부쳐줬잖아. 튜터비랑 물가랑 다 올랐다고 그래서. 그런데 왜? 아, 아니다. 하긴 엄마가 주는 걸로도 부족했겠지. 한창 먹고 싶은 거 많을 땐데.”
이경은은 이번에는 떡갈비를 먹기 좋게 잘라주었다. 정우가 늘 먹던 대로 그 위에 케첩도 뿌려주었다.
“동생이 오빠 멀리서 고생하는데 돈 좀 보태줄 수도 있는 거지, 뭐. 졸업도 했고 변변치는 않아도 저도 돈 버는데 뭐. 그저 엄마가 너 아주 원 없이 뒷바라지 못 해줘서 미안할 뿐이야. 그치만 너 어떻게 해서든 졸업만 하고 돌아오면 엄마가….”
“엄마. 나 실은 할 얘기가 있어.”
정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내내 모친의 눈치만 살피던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