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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90)화 (91/124)

<90화>

안타까운 듯 혀를 차는 송유영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낯설지 않았다. 한주혁과 헤어지길 오매불망 바라던 모친의 시선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하긴 처음부터 우리랑은 레벨이 다른 사람이었으니. 선배도 진짜 대단해. SG그룹 후계자란 걸 어떻게 그 정도로 꽁꽁 숨겼는지. 학교에 차 한번 안 가져오고 명품도 하나 갖고 다니질 않았잖아. 그래도 사귈 동안에는 잘 해줬을 테니까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지, 뭐.”

위로하는 척 은근히 선을 넘는 송유영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주 S호텔에 VVIP 한정 패션 행사가 있어서 거기 갔는데 말이야.”

뷔페식당을 VVIP 행사로 고쳐 말하는 뻔뻔스러운 거짓 허세와 실제 목격담을 늘어놓는 목소리가 붕 떠 있었다.

“주혁 선배, 다른 여자랑 라운지 카페에서 맞선 보고 있더라. 처음엔 데이트인 줄 알았는데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딱 맞선 같았어. 엄청 부티 나고 세련됐더라구.”

송유영은 묻지도 않았는데 휴대폰 화면을 빠르게 뒤져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소파에 꼿꼿하게 앉은 한주혁의 옆선이 보였다. 맞은편 테이블 가장자리에는 모피 장갑을 낀 여자의 손이 보였다.

“여기 사진 봐봐. 여자는 손밖에 안 나왔지만 남자는 확실히 주혁 선배 맞지?”

“…….”

“너도 선배, 빨리 잊어버리고 더 좋은 사람 만나길 바라. 아 참, 나는 요즘 결혼까지 생각하고 만나는 남자가 있는데 G사 개발 엔지니어로 일하는….”

“이미 잊었어.”

예서는 혼자 호들갑 떨며 제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송유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럼.”

제 귀에도 낯설 만큼 냉랭한 목소리였다. 청계천을 건너 대로변으로 향하는 동안, 예서는 단 한 순간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몸을 굽히거나 고개를 떨구는 일도 없었다.

2층 버스에 몸을 싣고 정거장에 내릴 때만 해도 괜찮았다. 날이 추워 인적없는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그랬다.

눈물이 왈칵 터진 건,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서 바깥의 시선과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직후였다. 예서는 신발도 벗지 않고 문턱에 주저앉아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한 시간 전 송유영에게 거짓으로 단언했던 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 두 달이나 지났으니 괜찮을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5년이란 시간의 무게에 비하면, 두 달은 하릴없이 짧았다. 어떻게든 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결국은 헛된 노력이었다. 물거품일 따름이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더라는 말, 그 한마디만으로도 이렇게 무너지게 될 줄은.

***

-뭐든지 적당히 마음을 줘야 비극이 없는 법이야. 사람에겐 특히. 지나치게 깊이 빠져 버리면 반드시 불행이 뒤따르게 되어 있어. 네 부모처럼. 그리고 그 여자처럼.

참극이 일어나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머리 위로 서 집사의 속삭임이 울렸다. 서현영 특유의 섬유 탈취제 냄새도 났다.

-가엾은 것.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지 뭐니.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이 집에서 행복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야. 너도 포함해서….

냉소와 연민이 뒤섞인 음성이 공허하게 이어졌다.

-너도 멀쩡히는 못 살겠지. 기억이라도 잃지 않는 한. 그런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도 제대로 자랄 수가 있을까.

스탠드 등이 꺼지며 코튼 향이 서서히 멀어지려 할 때였다. 열 살인 그는 또래보다 성장이 부진한 왜소한 몸으로 서현영에게 곧장 다가갔다. 그녀를 방바닥에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는 동안, 손에는 서늘한 날붙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팔을 무작정 휘둘렀다.

찢어지는 비명에 이어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사람의 살점은 어이없을 만큼 무르고 약했다. 꿈인 줄 알아서 더 잔인하게 파헤치고 힘을 주었다.

그는 꿈속에서 살인자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서현영을 죽인 정신착란자가 되어, 제 눈에는 정작 보이지도 않는 칼날에 무자비한 힘을 실었다.

질식할 듯한 피 냄새 속에서 시야가 빙그르르 돌았다. 다음 순간 그는 며칠 전의 양평 별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죽일 거야, 이 더러운 연놈들! 너부터 죽어!

-주혁 엄마, 좀 진정해!

-진정? 진정하라고…? 다른 여자도 아니고… 처제랑 붙어먹은 짐승 새끼가 감히 뭐라고?

-그래서 이혼하자고 한 거잖아! 당신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조건으로.

-닥쳐… 닥치라고!

모친 류혜정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 들어 남편을 향해 던졌다. 묵직한 목각상은 그를 비켜나 천장 샹들리에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방은 순식간에 어두운 바다처럼 가라앉았다. 스탠드 등이 깜빡이며 빠르게 빛을 잃어갈 때, 류혜정의 손에 뭔가가 다시 잡혔다.

-안 돼!

그 순간, 문 뒤에 숨어 있던 류혜수가 방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하지 마! 석우 씨한테 그러지 마…!

-여보!

-언니, 내가 잘못했어! 차라리 날 죽여… 나한테….

아아악, 자지러지는 고함과 비명, 발을 구르며 뭔가가 요란하게 무너져 내리는 소음이 연이어 터졌다. 열 살의 몸을 한 주혁은 그때처럼 귀를 틀어막지 않았다. 대신 스탠드 등이 고장 난 기계처럼 연신 깜빡이는 방 안으로 서슴없이 들어섰다.

다시 역한 피비린내가 흘렀다. 이모 류혜수의 경악에 찬 울음이 귀를 찢으며 스탠드 등이 마지막 발악처럼 최후의 환한 빛을 내뿜었다. 그제야 바닥에 쓰러진 아버지, 피에 물든 그의 가슴팍이 보였다.

어머니의 손에는 여전히 피에 젖은 과도가 들려 있었다. 경련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선단이, 제 남편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여동생의 등을 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날붙이는 다시 뒤로 당겨지며 류혜정의 턱 아래로 향했다.

안 돼!

외마디 비명이 제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는 모친을 향해 주저 않고 뛰어들었다. 스물여덟의 주혁은 혼절하는 대신, 어머니의 자살을 말리려고 두 팔을 뻗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18년 전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류혜정은 바닥에 쓰러진 채 턱부터 목, 가슴, 허리까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발아래 카펫은 피바다가 되었고, 패닉에 빠진 류혜수의 비명이 고막을 연신 때렸다.

가족 중에서도 극소수에게만 알려진 살인의 진실은 기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어 있었다. 류혜정은 남편 한석우를 찌르고 그와 통정한 류혜수의 등에도 칼을 겨누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는 못했다. 여동생은 어릴 적부터 제일 가까운 친구이자 소중한 혈육이었다. 그래서 칼끝을 동생 대신 제 목에 꽂아 넣었다.

그 순간만큼은 당신의 친정 부모, 홀로 남겨질 아들은 떠오르지도 않았던 건가.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그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짐승만도 못한 남편에게 복수한 후련함과 비통함.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동생을 향한 분노. 끝까지 남편의 애정을 받지 못했던 아내로서의 자괴감. 결국 당신 자신마저 죽여서라도 그 막돼먹은 치정극의 막을 내리고 싶었던 염원.

그중 어떤 감정이 가장 컸을까. 물론 진심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와 알아봤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홀로 남겨진 채, 그저 이 무상하고 비루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지긋지긋한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특별한 열의나 목표 없이, 주어진 대로 꾸역꾸역 살아왔다. 공부와 일, 운동, 뭐가 됐든 반드시 제일 윗자리에 서야 한다는 믿음만이 그를 지탱해줄 수 있었다. 그래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사업상 딜(deal)도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어떻게든 성사시켰다.

뭐든 최고라도 되어야지. 부모 둘 다 정상이 아니었던 애새끼로 태어났으면.

모친 역시, 오랫동안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상담 치료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접한 뒤에야 모친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생전의 류혜정이 어린 그를 데리고 정신과란 정신과는 다 돌면서 검사받게 했던 병적인 강박증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배 속에 품었다 낳은 자기만 미친년인 줄 알았는데, 씨를 뿌린 인간도 미친 새끼였다니. 얼마나 경악했을까. 어머니의 충격과 두려움도 충분히 납득되었다.

지금까지 잘 감추며 사회에 적당히 융화해서 살아왔다. 재미는 없었지만 남들이 우러러보고 추켜세우며 때로는 어려워하는 관성에 젖어 든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애를 알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 있는 것 같았는데….

원했던 목표를 이뤘을 때 그제야 보람이 느껴졌고, 그동안 몰랐던 감정을 민예서를 통해 하나씩 깨달아 왔었다.

예서야.

주혁은 과거의 악몽 끝에 천천히 눈을 떴다. 예전처럼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땀에 흠뻑 젖어 있진 않았다. 대신 머리가, 몸이, 모든 것이 어제보다 더 무겁고 둔탁했다.

하루에 잠을 두 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오래전 스타트업 때나, 밭은 출장 일정일 때도 며칠씩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만 지금처럼 컨디션이 최악이진 않았다.

그를 담근 절망이 어제보다 몇 인치 더 올라온 것 같았다. 허리 위로, 복부를 지나 마침내 가슴으로, 오늘은 심장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듯했다. 매일 조금씩 더 깊어지다가 결국은 목 위로, 이마 위로, 기어이 머리끝까지 뒤덮고 수면 아래 그를 푹 잠식시키고 말 것이다.

예서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내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럴 것이다. 그 자신이 악마인 채로 민예서만 끌어안고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

일주일이 쏜살같이 흘렀다. 그날의 원고를 완료하고 현주를 기다리는데 술 생각이 간절했다.

결국 맥주를 한 모금 홀짝이는데 현주가 회사에서 귀가했다. 한 손에는 고소한 냄새를 폴폴 풍기는 종이상자가 들려 있었다.

“어? 너 혼자 까면 어떡해? 조금만 기다리지.”

“이제 막 시작했어. 샐러드 만들어둔 거 냉장고에서 꺼내올게.”

두 사람은 치킨과 맥주를 식탁에 한가득 펼쳐놓고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나눴다.

“그럼 경현이 내년에는 미국으로 휴가도 갈 수 있는 거야? 야, 해외 휴가도 가능한 줄은 몰랐네. 카투사는 확실히 다르… 음. 흠. 근데 너 왜 치즈볼은 안 먹냐. 말랑할 때 빨리 먹어.”

현주가 재빨리 음식으로 화제를 돌렸다. 한주혁도 카투사였다고 들은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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