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89)화 (90/124)

<89화>

다만 그 예감은 라운지 카페 구석에 자리한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적중했다. 한주혁은 커피가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도 내내 침묵만 지키며 숨통을 조이다, 현주가 참다못해 운을 떼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저기 선배? 저, 차도 거의 다 마셨고…. 무슨 용건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M지 에디터로 일하나 봐. 힘들진 않고?”

“아, 아직 정식은 아니고 어시스턴트예요.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재밌고 보람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 호텔도 SG 소유였지. 파리 본사 주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여기 그랜드 홀을 대관해 왔다던가.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아요. 하하.”

다시금 정적이 흘렀다. 선배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그렇게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예서와 그렇게 헤어지고 잘 지낼 턱이 없었다. 그 증거가 지금 눈앞에 있지 않은가.

맞은편의 얼굴은 마네킹처럼 차갑고 핏기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현주는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빈 찻잔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시방석에 앉은 듯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었다.

하이힐 발꿈치가 저절로 들리며 긴장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명품 협찬사에서 빌려 입은 판초며, 무거운 귀걸이, 시계와 모자까지 죄다 벗어 던지고 싶었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선배, 죄송하지만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약속이 있는데 아무래도 늦을 것 같네요. 차 감사히 잘 마셨….”

“약속 장소까지 기사 편에 데려다줄게.”

“네? 아니, 저, 그게….”

사실 약속은 없었다. 이대로 집에 가서 예서가 지금쯤 만들고 있을 닭볶음탕이랑 알배추찜을 먹는 게 계획이었다.

“예서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현주가 움찔했다.

“예서는 잘 지내나 해서.”

“…….”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20분 가까이 침묵 고문을 가하다 이제야 본론을 꺼내다니.

현주의 두 눈에 경계심이 실렸다. 예서가 제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굳이 묻지도 않았다. 학교 때는 피부로 느끼지 못했을 뿐, 맘만 먹으면 뭐든 알아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아닌가.

“네, 잘 지내요.”

정확히는 잘 지내려고 굉장히 애쓰고 있지만.

“다른 용건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갈게요.”

“…….”

“그럼 이만….”

“무슨 일 있으면 알려줄 수 있을까.”

예서에게- 생략된 부분은 귀에 자연히 들렸다. 한주혁은 명함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SG바이오 글로벌 전략기획본부장이란 타이틀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가 없이 부탁하는 건 아냐.”

현주가 침을 꼴깍 삼켰다. 동시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제 직장인 M사의 최고위 상사, 한국 지사장이 그의 사촌 누나인 박연지와 절친이란 건 잘 알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한주혁의 인맥과 영향력이라면… 꽤 유용한 콩고물이 떨어질 터였다.

“사양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주의 얼굴이 싸늘했다. 예서와 그 사이의 모든 내막을 다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예서가 그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고 지금도 이겨내려 노력하는지, 그것만은 너무도 잘 알았다.

“저는 선배님의 후배이기 전에 예서의 친구니까요. 그럼, 차 잘 마셨습니다.”

그대로 돌아서서 로비를 나왔다. 콩고물이 탐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한주혁 정도 거물과 엮이면 콩고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황금 고물이 줄줄 떨어지겠지.

“그래도 싫어.”

광역버스 정류장까지 갈 택시를 잡는데 몸서리가 쳐졌다.

“예서도 예서지만. …무서워.”

으흣, 등줄기에 다시 소름이 돋았다. 예서가 아니라도, 그와 엮이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번듯한 외모, 배경과 후광을 생각하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말이 필요 없이 그와 친분을 쌓는 편이 엄청난 이득이다. 하지만 그래도 싫었다.

완벽한 수려함 속, 과연 사람일까 싶을 만큼 차디찬 시선. 지극히 차분한데도 어딘가 돌아버린 듯한 눈빛이 섬뜩했다. 모골이 송연했다.

그래. 아무리 봐도 예서와는 어울리지 않아. 예서는 그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좋은 사람 만나야 돼. 돈이나 배경은 그보다 못하더라도.

오늘 그와 맞닥뜨린 일도 예서에겐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르고 잊으려고 애쓰는 판에, 알아봤자 좋을 게 없다.

***

송유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옥외 난간 아래, 라운지 카페의 창가로 시선을 주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한주혁과 웬 여자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꽤 세련됐네?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몸에 두른 것도 하나같이….”

한주혁이야 경제지에 가끔 모습을 드러내니 낯설지가 않았다. 대학 때 과는 달라도 함께 팀 과제를 하기도 했으니. 그때는 약국 하는 부잣집 아들로만 알았는데 SG 그룹의 후계자였을 줄이야.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분했던지. 이럴 줄 알았다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접근했을 것이다. 그럼 그 촌스럽던 민예서에게 빼앗기는 일은 절대 없었겠지.

“아무리 봐도 선보는 분위긴데. 민예서랑은 결국 헤어진 거구나?”

피식, 코웃음이 새어 나왔다. 송유영은 혹시 몰라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 둘의 모습을 맞추고 버튼을 누르기 직전, 호텔 직원이 등 뒤로 다가섰다. 그 바람에 각도가 조금 빗나가고 말았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난간 밖에까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잠시 페인트칠을 하느라 펜스를 치워둔 것이었습니다.”

“아, 네.”

송유영은 직원을 위아래로 훑으며 도도히 뒤돌아섰다. 쾌재를 부르던 입매는 그대로였다. 그럼 그렇지. 민예서는 심심풀이로 만났을 뿐 정작 결혼은 격 맞는 집안 여자랑 하는 거지, 뭐.

슬슬 뷔페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휴일이라 모처럼 남자친구와 뷔페 약속을 잡은 차였다.

이번에 와인바 모임에서 만난 남자는 좀 답답하고 촌스러웠지만 씀씀이 하나만은 시원시원했다. 외모도 좀 아쉬웠지만 유능한 IT 개발자에다 집안은 골프장을 운영하는 알부자라 어지간하면 결혼까지 밀어붙일 심산이었다.

외모에 재력, 집안까지 다 갖춘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한주혁은 어디까지나 예외 중의 예외일 뿐.

아까 그 여자는 어느 집안 딸일까? 누가 됐든 한주혁이랑 결혼할 여자는 정말 좋겠다. 세상을 다 가진 거나 다름없을 거 아냐.

***

12월로 넘어가기 무섭게,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이 거리 곳곳에 보였다. 금요일 오후, 플랫폼 담당자와 미팅이 있어 오랜만에 서울에 나온 차였다.

오랜만에 복잡한 시내에 나와 정신이 조금 없었지만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가뭄에 콩 나듯 하는 외출은 어느새 관성에 젖어버린 일상 중 제일 큰 기분 전환이었다.

“그럼 다음엔 작가님 댁 근처에서 뵐게요.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에요.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좋았어요. 늘 집에 틀어박혀 노트북만 보고 있는데 이럴 때도 있어야죠.”

담당자와 미팅 겸 점심까지 마치고 헤어졌을 때였다. 청계천을 끼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누군가와 시선이 맞닿았다. 대각선 쪽에서 나란히 걷던 회사원 무리 중 한 여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머! 예서 아냐?”

송유영이 환한 미소를 띠고 코앞까지 다가왔다. 예서도 그녀를 알아보고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학기 중 단 한 번 팀 과제를 했을 뿐인데 저렇게 반가워하다니 좀 멋쩍었다.

“나 기억하지? 진짜 오랜만이다!”

“응. 정말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공모전 수상했다고 들었는데 필명이 뭐야? 어떤 작품인지 알려줘야 나도 사서 보고 응원도 하지! 한 명이라도 더 결제해 줘야 이득이잖아.”

“…미안하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나중에 기회 되면 알려줄게.”

다소 무례한 말에, 담담한 거절의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예전 같았다면 머뭇거리고, 쩔쩔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스스로의 변화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으니까.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봐주고, 존중하는 이들에게만 다정히 대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걸 더 일찍 깨달았다면 후회할 일도, 일방적인 상처를 받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만나서 반가웠어, 그럼 이만 가 볼….”

“너, 주혁 선배랑 헤어졌다며?”

예서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졸업하고도 쭉 만난다고 들었는데 결국 그렇게 됐구나.”

예서가 천천히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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