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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88)화 (89/124)

<88화>

-한 본부장, 너한테 아주 푹 빠져 있잖니. 결혼이 뭐 별거니? 어차피 결혼해도 다투면서 서로 맞춰가는 거니까 어지간하면 지금부터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그래야지!

“네….”

예서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애써 담담하게 쥐어짜는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그 말씀이 맞긴 하죠. 제가 선배와 결혼하면 결국 정우에게도 좋을 거고요.”

-아유, 그러니까! 내 말이!

은근슬쩍 눈치 보던 모친이 미끼를 덥석 물고는 환하게 웃었다.

-어디 유학생이 한둘이니? 내로라하는 명문대도 아니고, 정우 졸업하고 한국 들어와도 근근이 취직도 못 할 것 같아서 벌써부터 걱정인데 SG그룹 정도면 자회사니 계열사니 얼마나 자리가 많겠어….

뒤늦게 한 줌의 염치라도 돌아왔는지, 이경은은 말끝을 흐렸다. 예서가 그 틈을 비집고 입을 열었다. 숨이 자꾸 차올라 호흡을 조절하기 힘이 들었다.

“늘 가시던 점집을 다른 데로 바꾸셨어요?”

-뭐?

“그 역술인은 저랑 정우 운세를 다르게 얘기하던가요? 이번엔 제가 선배와 결혼을 해야 정우에게 좋다고… 그렇게 말하던가요?”

휴대폰 너머로는 침묵만 흘렀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꼴깍, 들린 것도 같았다. 침묵이 곧 긍정이란 상황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엄마.”

-아니야! 너, 그거 오해….

“제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아세요?”

-뭐? 왜. 너 무슨 일 있어?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별일은 없는지 한 번이라도 궁금해하신 적 있으세요?”

선배와 결별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결국 이렇게 되고, 사랑이마저 보내게 되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몸과 마음 다 무너질 대로 무너졌지만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제 상황은 전혀 모르시겠죠.

“정우에게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해서 그러시듯, 한 번이라도 제 안부가 걱정된 적 있으세요…?”

공모전 수상이란 기쁜 일도 생겼지만, 제가 잘될수록 정우에게 좋지 않다 믿는 엄마에겐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어요. 가족인데도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제 마음이 어땠을 것 같으세요?

-아니, 얘는 갑자기 왜 울고 그래?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모친의 당황스러운 음성을 듣고서야 예서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울 너머 보이는 얼굴이 터질 듯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엉망진창, 형편없는 몰골이다. 예서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한주혁 씨와 정말로 끝났어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이, 완전히.”

그의 아이를 가졌다가 유산했다는 말까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기댈 수도, 아픔을 공유할 수도 없는 모친이다.

“그러니 헛된 기대는 갖지 마세요.”

그래도 혈육이라서. 낳아주고 키워준 친엄마기에 차마 완전히 절연까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줄기 남은 마음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저에게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예서야! 아니, 너 왜….

“저 이제 엄마 딸, 안 하고 싶어요.”

흐느낌은 잦아들고 목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졌다.

“엄마 딸인 게 너무 힘들어서… 괴로워서 이제 그만하려고요.”

휴대폰 너머에선 아무 말도 없었다. 예서는 침묵을 찢고 담담하게 말했다.

“건강히 잘 지내시길 바랄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끝냈다. 몇 분 뒤 다시 진동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더는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휘둘릴 수 없었다.

[작가님, 좋은 아침입니다!]

곧이어 예정대로 편집 담당자의 문자가 도착했다.

[어제 말씀드렸던 대로 지금 통화 괜찮으실까요?]

정신 차리자, 민예서.

예서는 휴지로 얼굴을 닦고 휴대폰을 다시 쥐었다.

지금은 일에 집중할 때야.

지금은 몸과 마음 모두 정처 없이 떠돌고 있지만 언젠가는 어딘가에 안착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때는 모친과 한주혁, 두 사람의 잔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으리라 믿었다.

***

이경은은 끊어진 휴대폰을 멍하니 보다가 혀를 크게 찼다.

“아니, 얘가 왜 이래? 뭐 안 좋은 일이 있나? 왜 나한테 화를 내고 난리야.”

그러고는 다시 예서의 번호를 눌렀다. 두 번 다시 해 봤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

“누구랑 통화를 하길래 이렇게 오래 한담….”

이경은은 휴대폰을 던지듯 소파에 내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남처럼 싸늘한 태도며 말투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연꽃 선녀는 아직 회복 중이라 퇴원이 요원한 듯했다. 하지만 수제자였다는 홍련 보살도 가만 보니 마냥 엉터리 같지만은 않았다. 제 과거사도 속속들이 잘 알고, 홈페이지에 예약이 꽉꽉 차 있는 걸 보면 나름대로 용한 게 틀림없다.

그럼 역시 개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쩐다. 비상금을 깨서 일단 정우 이름부터 바꿔주고 예서에게 다시… 아니, 한 본부장에게 연락하는 게 낫겠어.

5년 동안 절연한 척하면 정우 유학비며 건물이 통째로 굴러오는데 딱 5년만 참으면 될 일이다. 이경은은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어 예서의 번호를 찾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네. 계집애가 제 앞가림 잘하면서 사는 줄 알았더니 뭔 일이람…. 정우만으로도 골이 아파 죽겠는데.”

아무리 정이 안 가는 딸이라 해도 예서도 자식이었다. 매사에 정우보다 너무 앞서는 게 문제였지, 이제 그 운세도 바뀌었다면 더는 날 세우고 끌어내릴 이유도 없다.

예서의 번호를 다시 누르려 할 때였다. 정우의 미국 번호가 액정에 뜨며 요란하게 벨이 울렸다.

“에고, 우리 아들이네. 어, 정우야! 어디니? 밥은?”

-엄마.

“그래. 거기도 이제 많이 추워졌지?”

-응, 엄마. 나 다음 달에 잠깐 들어갈게. 12월 셋째 주 윈터 브레이크 시작하자마자 바로.

“응? 왜? 엄마야 네가 오면 당연히 좋지만 힘들지 않겠어? 2주 잠깐 있다 가야 되잖아.”

-일단 가서 얘기할게.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어…. 미안.

아들은 모친의 안부도 제대로 묻지 않고 허둥지둥 전화를 끊었다. 평소와는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게다가 힘들어 죽겠다, 엄마가 보고 싶다, 우는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이상하네. 한 번도 어리광을 빼먹는 법이 없었는데.

이경은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욕실로 향했다. 어쨌든 우는소리 안 하는 게 좋은 거지. 좀 서운하긴 해도.

“그럼 개명은 12월 중순까지 미뤄야겠네. 이왕 바꾸는 거 정우도 신당에 같이 데려가서 의견을 물어야지. 문제는 예서 그 기집앤데….”

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딸에게 다시 전화를 해 볼까 망설였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한주혁이 알아서 잘 달래서 마음을 돌려놓지 싶었다.

지가 아무리 잘나봤자지. 아무리 봐도 우리 예서 없이는 못 살겠던걸, 뭐.

***

11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 S호텔 올림퍼스 그랜드 홀을 가득 메운 인파는 5시가 되어서야 빠져나갔다.

현주는 상사와 함께 협력 업체 디지털 에디터들에게 모두 깍듯이 인사하고 행사장 자리가 정리되는 것까지 다 체크한 뒤에야 라운지로 향했다. 그녀가 속한 패션 잡지사 주관, VIP 초청 파티가 막 끝난 참이었다.

“아, 드디어 끝났다. 이제 협찬품 싹 다 반환하고 집에 가서 예서랑 저녁 먹고 푹 쉬어야지. 내일 대체 휴무니까 밀린 잠도 자고 실컷….”

“송현주.”

현주가 로비 계단으로 향하다 걸음을 우뚝 멈췄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저음이었다.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그랜드 피아노 뒤쪽을 보는 순간, 날카로운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 주혁… 선배?”

한주혁이 스타인웨이 뒤편, 발코니처럼 돌출된 난간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아 있었다. 그린 듯 수려한 얼굴은 깜짝 놀랄 만큼 대학 시절과 똑같았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정장 차림 때문인지 어딘가 더 위압적이고 오만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는 예전보다 더했다.

“선배도 여기 일이 있으셨나 봐요. 전 회사 행사 때문에 왔는데… 하하.”

그때는 SG 후계자인 걸 몰랐는데도 은근히 사람 주눅 들게 했는데. 지금은 진짜 장난이 아니네.

“오랜만이야.”

“그러게요. 그동안 소식 많이 들….”

현주는 아차차, 입을 다물었다. 예서의 얼굴이 뇌리에 곧바로 떠올랐다. 한주혁은 그녀가 정색하는 건 안중에도 없이 난간 아래를 흘깃 보았다.

“일 끝났으면 아래층에서 차 한잔할 수 있을까?”

“네…?”

“할 얘기가 있어서.”

“아. 그, 그러시죠.”

현주는 저도 모르게 동의해 버렸다. 그의 존재감에 무의식적으로 압도된 것 같았다. 한주혁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두 손을 빼고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작은 몸짓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일렁거렸다. 그가 예서의 얘기를 꺼낼 것 같아서 바짝 긴장된 까닭이었다.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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