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87)화 (88/124)

<87화>

민예서가 가족과 소원해 내심 기쁘기도 했었다. 모친의 만행과 그 배경에는 피가 거꾸로 솟구쳤지만, 확실히 절연시킬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도 했으니까.

만약 그녀가 모친과 쌍둥이 오빠와 끈끈하고 돈독한 사이였다면. 그럼 그 애를 집에 보낼 때마다 얼마나 속이 뒤틀렸을지.

넌 오로지 나만 봐야 돼- 늘 그걸 당연시 여겼다. 가족, 친구, 소설, 그녀의 꿈, 모두가 결국 방해물에 불과했다. 어떤 것도 그보다 중요해선 안 되고 우선시 될 수 없었다.

그가 마련해 줄 평안, 바라는 건 뭐든 갖고 누릴 수 있는 부와 권력 속에서 그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오직 그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내가 바란 건 단지 그 하나뿐이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버렸지.

-아이와 함께, 그 사람도 완전히 잃었으니까요. 그 사람은….

민예서의 마지막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내가 나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선배는, 이제 어디에도 없어요.

씨발.

그가 제 머리칼을 틀어쥐었던 손을 놓았다. 고개를 들자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바깥 풍경이 창 너머로 보였다. 주혁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시선을 다시 떨궜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크리스탈 오브제를 집어 들어 창을 향해 던진 후였다. 정확히는 창에 비친 제 낯짝을 향해 가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둔탁한 소리만 날 뿐 창은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산산이 부서져 조각 난 것은 창에 부딪친 장식품이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이었다.

***

퇴원 후 짐을 정리해 둥지를 튼 곳은 경기도 K시의 호수와 공원으로 둘러싸인 대단지 아파트였다. 새집을 알아볼 시간과 심적인 여유가 없던 차에, 얼마 전 귀국한 현주와 연락이 닿아 그녀의 집에 살게 되었다.

송현주는 채린, 새은, 미주와 함께 제일 친했던 대학 동기이기도 했다. 4년 전 그녀는 계획대로 학교를 자퇴하고 파리 디자인스쿨로 유학을 떠났고, 졸업 후 현지 잡지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다 한국 지사로 발령이 난 김에 영구 귀국을 한 차였다.

“어때? 서울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지? 베드타운이라 고속도로만 30분 정도 타면 금방이야.”

현주는 예서의 방 정리를 도우며 수다를 늘어놓았다. 부모님은 일찌감치 귀농하시고 언니는 결혼해서 멀리 가는 바람에 당분간 큰 집에서 홀로 지낼 줄 알았건만, 그녀랑 지내게 돼서 무척 기쁜 것 같았다.

“응.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어. 서울 갈 때 출퇴근 시간만 피하면 될 것 같아.”

“그래, 어차피 거의 집에만 있을 거라 했으니까. 혹시 글 쓰느라 바쁜데 출판사 사람들 만나야 되면 집으로 불러도 돼. 경현이도 휴가 나오면 부르고. 나 회사 가 있는 동안 넌 실컷 글 쓰고 가끔 나가서 호숫가 공원도 산책하고, 나 야근 없이 칼퇴할 때는 같이 저녁 먹고 놀고! 생각만 해도 재밌겠….”

현주는 한껏 들떴다가 말끝을 흐렸다. 한주혁과의 결별, 지난주 유산까지 갑자기 뇌리에 떠오른 탓일 터였다. 예서는 무거워진 분위기가 더 가라앉기 전에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러게. 진짜 재밌을 것 같아.”

“아니지, 일단은 너 몸조리 잘하고 기운 차리는 거에만 신경 써야지…. 눈치 없게. 참.”

“아냐. 이렇게 너랑 지내게 돼서 진짜 좋아. 너무 고맙고…. 그러니까 월세는 그냥 받아 줘. 이제 상금 곧 입금되면 여유도 좀 생기니까.”

“꿈도 꾸지 마! 엄마도 받지 말랬어. 오래 살 것도 아니고 3월에 이사할 때까지만 있을 건데 뭐. 물론 더 오래 살면 나는 좋지만.”

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배달시킨 음식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현주는 부리나케 현관으로 달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식탁 위로 옮겼다.

“예서야, 빨리 와. 일단 먹고 마저 정리하자!”

“그래, 알았어.”

“크리스마스엔 채린이랑 새은이, 미주, 동환이 다 불러서 우리끼리 파티하자. 아, 새은이는 한창 연애 중이라 못 올 수도 있겠지? 동환이도 얼마 전에 소개팅했다던데 잘 됐나 모르겠다. 뭐, 올 수 있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되지.”

예서는 그녀의 컵에 물을 따라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주가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혼자였다면 꼬박 며칠은 멍하니 있으면서 폐인처럼 지냈을 것이다.

***

무의식 속으로 찾아온 그는 더 잔혹하고 거침이 없었다.

-나랑 왜 약혼했어요, 선배?

그리고 그녀는 더 어리석고 멍청했다.

-왜 그렇게 가끔씩… 싸늘하고 멀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뻔한 거 아냐. 잡아놓은 고기한테 먹이 주는 등신이 어딨어.

몸이 한기에 짓눌려 숨도 쉴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이제껏 알던 한주혁의 얼굴로 전혀 모르는 낯선 표정을 한 채 말을 이었다.

-너랑 왜 약혼했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입가에 맺힌 비소가 심장을 찔러왔다.

-버리긴 싫어서. 좀 피곤해도 남 주긴 아까워서 그랬어.

발아래가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꿈인지, 환각인지 구분도 안 가는 와중에 자꾸만 숨이 찼다. 그는 그녀를 멸시하듯 내려다보며 한 번 더 비수를 꽂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헛꿈이나 그만 꿔. 재능도 없는 일에 왜 계속 매달려?

예서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낯선 천장에 황망히 방을 둘러보고 나서야 현주의 언니가 쓰던 방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계는 막 7시가 넘어 있었다. 현주가 실컷 늦잠을 자는 주말 아침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하….”

꿈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도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예서는 부스스 일어나 축축하게 젖은 잠옷을 벗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힘이 들었다. 이런 게 이별 후유증이란 걸까. 뭘 봐도 그와 함께했던 순간이 절로 떠올라 숨을 멎게 했다.

차를 마셔도, 밥을 먹어도, 거울 너머 얼굴을 봐도, 심지어 옷을 벗고 입을 때도 그가 생각났다. 그와 함께 먹었던 음식, 같이 걸었던 길, 사랑을 나누던 순간들이 불시에 뇌리에 박혀 들어 미칠 것 같았다.

방금 전처럼 꿈에서는 더 잔인한 모습으로, 깨어 있을 때는 다정했던 순간들만이 멋대로 잠식해 들어와 정신을 지배해왔다.

-괜찮아. 원래 헤어지고 나서는 좋았던 기억만 자꾸 나는 거래. 나 파리에서 사귀었던 개새끼도 진짜 쓰레기였는데 한국 와서는 희한하게 착했던 모습만 떠오르더라고.

어제도 혼자 숨죽여 우는 걸 현주에게 들켰을 때 그녀가 한 말이었다.

-근데 결국 시간이 약이야. 뻔한 말 같지만 진짜 그렇더라. 그때는 죽을 것처럼 힘들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내가 왜 그렇게 목을 매고 그랬는지…. 아무튼 다 지나가게 되어 있어.

정말 그렇게 될까. 가슴을 짓누르는 이 아픔이 언젠가는 거짓말처럼, 처음부터 만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씻은 듯 가시게 되는 건지.

그렇다면 시간이 아주 빨리 흐르기를 바랐다. 그래서 비로소 망각의 자유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실에서 대강 씻고 현주가 깨지 않게끔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 타 방으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켜고 서랍을 열어 메모지를 꺼내는데 그 아래 작은 동전 지갑이 보였다. 초음파 사진을 보관해둔 지갑이었다.

예서는 사진을 꺼내 눈에 담았다. 어두운 동굴 같은 제 자궁 안은 난황도, 아기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사랑이가 찾아왔었다는 유일한 흔적이자 증명이었다.

다시 사진을 제 자리에 넣고 서랍을 닫는데 휴대폰이 지잉 울렸다. 그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주혁일 리는 없었다. 번호를 다시 바꾸진 않았지만 그의 번호는 퇴원 전부터 수신 차단을 걸어 놓았다.

액정에 뜬 번호를 본 순간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예서는 수초간 단말기를 빤히 내려다보다 통화에 응했다. 그래도 엄마라는 생각에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예서, 너. 번호는 왜 바꿨어? 아니, 바꾼 건 그렇다 치자. 그걸 왜 할머니에게만 알려드리고 나한텐 시치미 뚝 떼고 있어?

“…….”

-너, 혹시… 외할머니랑 나랑 얘기한 거 엿들은 거. 그것 때문이야? 한주혁이가 저번에 와서 그러더라. 네가 다 알았다고…. 그래서 서운해서 엄마한테 이러는 거니?

쓰디쓴 커피만 들어찬 속이 울렁거렸다. 예서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한주혁이 모친을 찾아가 그걸 말했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서야. 네가 얼마나 화가 나고 서운했을지 잘 알아. 하지만 말이다, 그거 이젠 다 옛날얘기야. 이제 더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제가 9시에 급한 일이 있어서요.”

탁상시계의 초침은 9시 2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9시 10분쯤 연재처 담당자와 통화할 예정이었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너랑 한주혁이 말이야.

모친은 잠시 뜸을 들이다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정말 헤어진 거야? 그쪽에선 예정대로 결혼하길 바라는 눈치던데.

“…….”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웬만하면 화해하고 파혼 물러서 결혼하는 게 어떨까 해서 말이야. 내가 그동안 반대해 놓고 갑자기 뒤집자니 면목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사윗감이 어디 있겠나 싶어서.

“네…?”

숨이 턱 막혔다. 낯설지 않은 예감에,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설마 이번에도 정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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