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예서의 눈에 다시금 뭔가가 차올랐다. 한주혁은 차분하게 다시 일격을 가했다.
“나마저 없으면 너한테 누가 있다고. 뭐가 남았냔 말이야.”
그녀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감한 시선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눈이었다. 허를 찔려 화가 났는지, 다시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경악스러운 그의 말에 잠시 넋을 놓기라도 한 건지. 정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작 넋을 놓을 뻔한 건 그였다. 두려움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상대가 매달릴 때마다 냉정한 겉모습을 보이는 건 늘 자신이었다. 지금처럼 민예서인 적은 없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뭔가가 확실히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느슨하게 말아쥔 손에서 식은땀이 날 때였다.
“한주혁 씨 말이 맞아요.”
민예서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선배’라는 호칭은 버린 채였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본부장님, 죄송합니다.”
김 비서의 정중한 재촉이 두꺼운 문 너머로 흘러들었다.
“오릭스 파마슈티컬스 합병 건으로 15분 안에는 출발하셔야 합니다. 5분 뒤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멀어지는 발소리에 이어 민예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이제 아무도 없어요. 가족도, 잠깐 찾아왔던 아이도, 그렇게 사랑했던 선배도….”
잠시 말개졌던 눈이 이내 초점을 되찾았다. 늘 온기가 흐르던 목소리는 똑 부러질 듯 차갑고 단호했다.
“아이와 함께, 그 사람도 완전히 잃었으니까요. 그 사람은….”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의료진이었다. 민예서는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기 직전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나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선배는, 이제 어디에도 없어요.”
가슴 어딘가에서 툭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얼음이 쩍, 갈라지는 소리인 것도 같았다. 지진이 난 것처럼 발아래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두 발을 바닥에 대고 똑바로 서 있는데도 그랬다.
“저… 보호자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수술 부위가 괜찮으신지 살펴봐야 하니 잠시 나가주시겠어요?”
간호사의 정중한 음성이 이명처럼 아득하게 울렸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는 간호사가 한 번 더 요청하고 나서야 돌아섰다. 어떻게 병실을 나와 대기 중인 차까지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세단 옆에 서 있던 김 비서가 여상하게 뒷문을 열어주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모양이었다. 김 비서가 의문을 표한 건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장님. 본부장님?”
“네.”
그가 고개 들어 운전석을 응시했다. 늘 담담하던 비서의 미간에 석연찮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휴대폰이 계속 울리는데 받지 않으셔서….”
그제야 차 안에 낮게 깔린 휴대폰 벨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주혁은 휴대폰을 집어 들어 액정에 눈길을 주었다.
거래처의 바이어였다.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대화에 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김 비서도 안심한 듯 다시 운전에만 집중했다. 하긴 잠시 멍한 것도 무리가 아닐 터였다. 해외 제약기업과의 협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어젯밤은 한숨도 못 자고 보호자용 라운지에서 일을 했으니.
한 번쯤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게 정상이었다. 아무리 철두철미한 본부장이라도 결국 체력의 한계가 있는 사람 아닌가.
***
이경은은 거실 식탁에 앉아 비상금 통장과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공과금 및 지출 기록부를 펼쳤다. 한숨과 함께 계산기를 두드리던 손이 멈추었다.
“어쩐다. 안 그래도 정우 개명비로 골치가 아픈데 세는 또 왜 올려달라는 거야. 참 내. 그동안 싸게 줬으면 앞으로도 좀 싸게 줄 것이지….”
-달랑 한 장이야. 명색이 약사가 그 정도도 없을 린 없고. 아, 그만한 돈 때문에 아들 팔자 고치는 걸 마다할 거야?
홍련 보살의 말이 귓전에 모기처럼 왱왱거렸다.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나왔다.
말이 한 장이지 천만 원이 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건너편에 세련된 대형 약국이 생겨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건물주가 1월부터 세도 올려받겠다고 연락을 해와서 골치가 아팠다.
“가만 있어 봐. 홍련 보살 말대로 정말 운이 바뀐 거라면… 그럼 굳이 결혼을 반대할 필요도 없잖아?”
정우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결혼을 시키는 게 옳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SG그룹의 후계자가 매부가 되는 건데! 정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집안과 연을 맺어야 한다.
“근데 그 어린 보살 말만 믿을 순 없잖아. 그동안 쭉 모셔 온 연꽃 선녀님 말도 들어봐야 할 텐데…. 대체 언제쯤 퇴원을 한담?”
아니, 먼저 예서에게 연락을 해야겠지. 제 외할머니랑 얘기한 걸 다 들어 버렸으니 좀 달래고…. 원체 마음이 약한 애니까 구슬리는 건 걱정 없었다. 문제는 한주혁이다.
정우 졸업까지 들 유학 비용, 그리고 5년간 확실히 절연한 채 지낸 게 확인되면 약국 건물이라 했었지. 그가 예서와 절연하는 대가로 제안한 것들이 뇌리에 반딧불처럼 반짝 켜졌다.
물론 그 두 가지만 해도 엄청난 돈이다. 하지만 상대는 SG그룹을 등에 업은 사위였다. 제대로 장모 대접을 받게 되면 그까짓 코딱지만 한 건물이 대수겠는가.
“게다가 SG 사돈이 되면 정우 결혼 자리도 꽤 괜찮은 집안으로 소개받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정우가 제 아빠 닮아서 인물이 얼마나 훤칠한가.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순진하고 착한 애고. 어떻게든 졸업시켜 학벌만 만들어놓으면 나무랄 데 없는 신붓감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아무래도 예서를 잘 달래야겠어.”
이경은의 눈이 열의로 반짝였다. 예서만 마음 풀고 제 친정엄마와 오빠를 어필한다면. 그럼 한주혁도 별수 있을까. 그렇게 예서한테 푹 빠져 있는데.
물론 예비 사위가 예쁘지는 않았다. 정우와 비교돼서 배알 꼴리는 건 둘째치고, 그녀를 대하던 태도를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어쨌거나 장모 될 어른에게 그 안하무인에 싸가지 없고 오만방자한 태도라니.
“그래도 어쩌겠어. 돈 앞에 장사 있나. 며느리도 아니고,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백년손님인데. 이왕 줄 거, 최소 10층짜리 번듯한 거면 좋겠는데….”
이경은은 혀를 차며 휴대폰 연락처 화면을 슬슬 넘겼다. 그때 ‘연꽃 선녀님’이라 저장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선녀님의 신당을 관리하는 직원의 연락처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정우 개명도 정식으로 요청할 겸 다시 한번 가봐야지.
***
-제발요! 더는 하지 말아요. 아이가….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불쾌감이 보다 정확할 터였다. 민예서와 그, 둘 사이에 뭔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는 사실에 거부감부터 덜컥 들었다.
그다음에 든 생각은 안도감이었다. 민예서 말마따나, 아무런 법적인 구속력도 없는 둘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그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민예서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민예서와 아이, 두 생명의 안전을 이 악물고 빌었다. 처음에 밀려왔던 생경한 불쾌감과 거부감은 거짓말처럼 잊은 채였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는 더 자라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민예서의 몸에서 분리되어 떠나갔다. 동시에 민예서는 그로부터 완전히 등 돌릴 자유를 손에 쥐게 되었다.
-더는 한주혁 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리고 또 뭐라고 했었지.
주혁은 텅 빈 오피스 한가운데 굳은 채로 앉아 있었다. 해 질 무렵까지 이어졌던 회의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제는 다 알았어요, 선배. 모두 다….
민예서가 다 알아버렸다. 지금까지 그가 꽁꽁 감춰왔던 비열한 속내를.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숨 쉬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본능적인 생존 의식 자체가 고통이었다.
오로지 그라는 존재가 민예서의 삶에서 최우선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녀가 우선순위가 아닌 것처럼 굴었다. 무슨 짓을 해도 그를 놓지 못하는 민예서를 보기 위해 일부러 상처 주고, 막다른 곳까지 밀어붙이다 못해 밑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향한 마음을 거두지 않을 거란 사실을 거듭 증명받기 위해서.
상처받아 아파하고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면서도,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못하고 매달리며 우는 얼굴은 그에게 환희 그 자체였었다.
민예서 주위의 모든 사람을 질투했다. 최인하와 동기들, 친구들, 친언니처럼 잘해주는 옛 약국 직원까지. 심지어 소설에 몰두하는 것조차 싫었다.
그 여자가 한주혁 외 다른 것에 집중하고 전념하는 자체가 거슬렸으니까.
하. 입술 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느새 두 손은 머리칼을 그러쥐고 있었다.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데도 손에서 힘을 풀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