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까 비가 왔는데… 갑자기 여덟 살 때 기억이 났어요.”
아래로 늘어뜨린 시선이 오른쪽 손목 안쪽에 머물렀다.
“계곡에 소풍을 갔는데 폭우가 심하게 몰아쳐서 제일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있을 때였어요. 그때 제 또래의 남자아이가 떨어질 뻔했는데 제가 잡고 있느라 팔이 빠질 것처럼 힘들었어요. 다행히 구조대가 와서 다들 무사했죠.”
오래전 단둘이 팬케이크 집에서 처음으로 식사하던 중, 그가 흉터에 대해 물었을 때 이미 했던 얘기였다. 하지만 그때는 모친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었다.
“다른 애들은… 엄마랑 아빠가 달려와서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끌어안고 보듬어주거나 울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날 때렸어요. 정우 허약한데 잘 보고 있었어야지 다른 집 애 붙들고 뭐 하고 있냐고.”
한주혁이 거칠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예서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는 좀 서러웠지만 결국 내가 잘못한 거라 여겼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엄마는 처음부터 나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였는데…. 나는 괜찮은지, 다친 데는 없는지, 한 번도 살피거나 묻지 않으셨거든요. 그걸 지금에야 깨달은 거죠.”
저도 모르게 손목 안쪽의 흉터를 매만지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빗줄기를 보는 동안 고등학교 때 일도 떠올랐어요. 하필 수학여행지에서 큰 폭발 사고가 나서 속보가 계속 떴지만, 다행히 우리 숙소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무 일도 없었죠. 그래도 같은 반 친구들에겐 계속 부모님들 전화가 오더라고요. 가족과 통화하지 않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예서야.”
“그때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엄마는 약국 일로 늘 바쁘니까 전화할 짬이 없으셨던 거겠지…. 으레 별일 없겠거니 생각하셨겠지…. 그렇게만 여겼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
“만약 정우 수학여행지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도 엄마가 가만히 있었을까? 몇 번을 가정해봐도, 그럴 리 없다는 답만 나왔어요.”
만에 하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면 먼 거리를 무릅쓰고 달려갔을 것이다. 그게 모친이기에. 그만큼 애틋하고 끈끈한 모자(母子)이기에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다.
“선배와의 일도 그런 것 같아요.”
그제야 예서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초점이 또렷한 눈은 올곧고 맑았다. 멍하거나 흐린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알던 민예서인데도 지독하게 낯설었다.
“선배에게 내내 휘둘려왔어요. 내가 더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어. 내가 부족해서 그래. 내가 좀 더 애쓰고 노력하면…. 고비가 올 때마다 늘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버텨왔어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서 사랑받는 딸이 되려면 내가 더 노력해야 돼. 분명히 정우보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까 엄마가 나는 그렇게 대하시는 걸 거야- 그렇게 믿었던 것처럼요.”
“예서야, 잠깐만.”
“만약 사랑이가 있었다면 선배의 손을 다시 잡았을지도 모르죠.”
아무리 끝내기로 굳건히 마음을 먹었어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그럼 완전히 끝내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사랑이는 없으니까….”
다시 목이 메어와 수초간 숨을 멈췄다. 이 상태에서 울음을 토해냈다간 이성을 잃고 오열하다 그에게 매달릴지도 몰랐다. 이 무자비한 슬픔을 도저히 홀로 감내할 수 없어서 그의 다정한, 아니, 다정한 가면에 의지해버릴 것만 같았다.
절대 해선 안 될 짓거리였다. 이제는 사랑에 눈이 멀어 흐려졌던 시야가 완전히 걷히며 한주혁을 제대로 볼 수 있기에. 온전한 밑바닥은 아니라도, 적어도 수면 아래 감춰진 몸통의 형체는 똑똑히 보였다.
“이제 왜… 선배가 소설을 전혀 읽지 않는지 알았어요.”
허구의 픽션. 허무맹랑하고 감상적이며 쓸모없는 이야기. 또 다른 현실에 있을 듯한 가공의 인물들이 고난과 역경, 때로는 환희를 맛보는 희로애락 자체에 공감할 수 없어서였다.
-회피형 애착 유형은 독립심과 자아가 아주 강하고 감정적으로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아요. 타인과의 인간관계에 나름대로의 선을 긋고 거리를 두기 때문에, 자신이 정해둔 기준 이상으로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본능적으로 그 상대방을 선 밖으로 밀어내 버리는 거죠.
언제였지. 4년 전 그에게 처음 고백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았던 날 같았다.
TV에서 흘러나오던 정신과 전문의의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오래전의 그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건 비단 그 전문의가 최근까지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선배는 타인을 진심으로 보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교감하는 방법을 몰라요.”
-이런 유형은 심지어 상대방을 좋아해도 밀어 내는데, 관계가 깊어지고 친밀해지는 것 자체를 회피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반복되니 주위에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혼자 있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늘 외롭고 공허한 상태에 있는 거죠.
한주혁이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 역시 그녀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도 고백을 단칼에 거절했던 순간, 그때와 무의식적으로 겹쳐져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있던 것이다.
“그리고 늘 감정적인 우위에 서길 바랐죠.”
결국은 그녀와 사귀게 되었지만 그 후로도 상처받은 순간들은 지금도 흉터처럼 가슴 깊이 남아 있었다.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그에게 굽히고, 다시 돌아서고, 전전긍긍 매달리며 그에게 속절없이 휘말렸었지.
-누가 됐든, 우리 둘 중 하나가 끝내고 싶을 때 순순히 놓아주기로 하자.
-헤어지고 싶어?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에 따를 생각이야.
-민예서, 너. 지금 나가면 끝이야.
이제야 깨달았다. 한주혁은 그 역시 결별을 원하지 않는데도, 오롯이 그녀만을 을의 입장으로 몰아가려 한 것이다. 일부러. 아슬아슬 외줄 타기를 하면서도 절대 떨어질 리 없다는 확신 속에서 아주 안전하게.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가 절대 그를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언제 어느 때고 늘 갑으로 군림하는 스스로를 확인하고, 그녀의 굳건한 애정을 즐기면서.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바라는 SG그룹의 새 식구와 제 아내 위치에 어울리는 ‘민예서’로 만들기를 원했다. 원래의 그녀는 살짝 비틀고, 어떤 부분은 도려내고, 뜯겨나간 자리에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품들로 채우면서.
“이제는 다 알았어요, 선배. 모두 다….”
목소리가 기어이 갈라져 나왔다. 눈물을 삼키고 삼키다 못해, 아주 나이 든 여자의 음색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한주혁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일견 차분해 보였지만 어두운 안광이 어느 때보다 더 험악했다. 단번에 숨통을 틀어막는 특유의 섬뜩함, 분노와 동요가 소리 없이 뒤엉킨 위압감이었다.
하지만 예서에겐 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아이를 잃었다는 슬픔과 비참함, 그 외 수많은 감정의 무게 때문에 공포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우린 이제 끝났어요. 완전히.”
탁했던 목소리가 평소의 맑은 톤으로 돌아왔다.
“더는 한주혁 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말갛게 젖은 눈이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결국 한 가지 결말 외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
입을 여는 순간, 막혔던 숨이 소리 없는 기침처럼 확 터져 나왔다. 기도, 혹은 폐 어딘가가 잘못된 것처럼 무지근한 통증이 골까지 울리고 있었다.
“더는 한주혁 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민예서의 목소리는 공기를 타고 스며드는 독(毒)과도 같았다. 형체 없는 독이 제 심장에 비수처럼 꽂히며 혈관을 타고 퍼지고 있었다. 온몸이 서늘해지다 못해 차갑게 얼어붙어 혀가 움직이질 않았다. 독에 잠식된 듯 장기가 뒤틀리고 전신이 마비되는 기분이 이럴까.
“민예서.”
하지만 충격보다는 분노 쪽이 더 강했다. 그는 악문 잇새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 나갔다.
“함부로 단언하지 마. 내가 정말 돌아서면 어쩌려고 이래?”
피식, 실소가 흘렀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의 발로가 계속해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따위로 지껄이고, 앞으로 어쩌려고 이래?”
머리 한구석에선 그만하란 경종이 고장 난 벨처럼 울려댔다. 그런데도 혀가 말을 듣질 않았다.
“벌써 잊기라도 한 건가? 너한텐 나밖에 없는데. 민예서한테… 나 외에 누가 있는데?”
응? 낮게 되묻는 입술이 오만하게 비틀렸다.
“그 좆같은 가족은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존재들이고. 친구들은 가끔 얼굴 볼 때나 친구지, 결국 제각기 흩어질 타인들 아닌가? 그나마 연락하는 친척은 멀리 외국에 있지.”
민예서의 눈이 조금씩 다시 흐려졌다. 보기 싫게 명료하던 눈동자가 흔들리자 그제야 안도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래. 너는 그런 얼굴이 어울려. 나한테 울면서 매달릴 때의 너, 오직 나밖에 기댈 데가 없고 나만 눈에 보일 때의 네가 제일 너다운 모습이라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멀쩡한 제정신인 채 그를 밀어 낼 리가 없었다. 이제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개소리나 지껄이는 그녀는 민예서가 아니었다. 유산의 충격으로 잠시 정신이 나가 있었던 거다.
“설마 공모전 수상 한 번 했다고, 이제 장밋빛 미래만 펼쳐질 거라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다시 정정해. 헛소리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