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일주일만 시간을 줘요. 여기 정리하고, 지금 하는 일도 마무리를 해야 돼요.”
예서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원고작업이나 연재 준비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구구절절 말해봤자 상대방에겐 시시하고 무가치한 얘기일 따름이다.
“알았어요. 선배 말대로… 다시 생각해볼게요. 서울 올라가서 다시 의논할 테니까 선배 먼저… 올라가요.”
“미리 경고하는데 도망갈 생각, 하지도 마. 소용없다는 것쯤은 알겠지만.”
한주혁이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그는 어느새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수습하고 다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성을 잃고 날뛰었던 게 거짓말처럼 절제된 모습이었다.
“안 해요. 안 할 테니까 가요, 이제.”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 항구에서 배를 타고 외딴섬에 들어가 꽁꽁 숨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미국의 고모 집도 있다.
“바쁘잖아요, 선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너 혼자 여기 남겨둘 순 없어.”
그의 눈이 낡아빠진 집안 곳곳을 빠르게 훑었다.
“짐 정리는 천천히 하더라도 잠은 시내 호텔에서 자. 식사는 룸서비스로 하면 될 테니까. 내일 여비서 한 명 서울에서 내려보낼 테니까 일단 호텔로 가자.”
“아뇨. 그… 비서란 분이 내려오면 그때 갈게요.”
낭패였다. 사람을 붙여두고 올라가겠다니. 이렇게 된 바에는 최대한 빨리 그를 서울로 보내놓고, 비서가 오기 전에 몸을 숨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호텔에 들어가는 즉시 운신에 제약이 생길 건 뻔했다.
“내 말 들어. 일어나.”
한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맥없이 앉아 있는 예서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이렇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혼자서 무슨….”
그가 그녀에게 다가서려 하자 예서가 한쪽 손으로 벽을 짚고 허리를 움직였다. 아직도 뻐근한 다리 사이 감각을 무시하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배에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
그 순간 예서의 눈이 커졌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스커트 자락 아래서 시작해 한쪽 다리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발목을 타고 흐르는 피가 순식간에 양말 속까지 파고들었다.
“아, 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숨구멍이 꽉 틀어막힌 것처럼 색색,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온몸의 땀구멍이 공포로 가득 차는 느낌이 이럴까.
“예서야!”
강한 힘이 그녀를 단번에 안아 올렸다. 한주혁은 피가 묻든 말든 아랑곳 않고 예서를 안아 든 채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고는 세단 앞에 서 있던 김 비서에게 바로 명령했다.
“병원으로 가죠.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김 비서는 혼비백산한 눈을 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여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곧장 운전석에 가 앉았다. 예서가 한주혁의 품에 안겨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사, 사랑이 어떡해! 우리 사랑이… 흐흑…!”
울먹이던 흐느낌은 곧장 오열로 변했다. 예서는 주혁의 재킷 깃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껏 움켜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질식되어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사랑이, 어떡… 아아!”
“울지 마. 괜찮을 거야.”
한주혁이 예서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패닉에 빠진 그녀를 달래려고 애썼다. 차가 언제 출발했는지도 모르게 매끄럽게 질주하고 있었다. 예서는 그에게서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며 더 크게 울었다.
선배 때문이야. 사랑이가 잘못되면….
이마며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조차 가증스러웠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이제 와서 이런들 무슨 소용이라고 여기 발을 디딘 걸까. 멋대로 찾아와 멋대로 안으려 들고 결국 사랑이마저….
물어뜯듯 주혁의 옷깃을 틀어쥐던 손에서 어느덧 힘이 빠져나갔다. 숨넘어가게 울던 흐느낌이 잦아들며 의식이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눈이 감기며 블랙홀처럼 새카만 허공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냐, 선배 때문이 아니라….
본능적인 뭔가가 격통을 비집고 밀려왔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생리 불순, 최근의 간헐적인 자궁 쪽 둔통과 복통이 새삼 상기되었다. 모두 다 한주혁의 갑작스러운 등장과는 하등 관계없던 증상이었다.
“예서야, 진정해.”
다 괜찮을 거야. 앞으로는 내가….
한주혁의 황량한 눈동자, 재차 달래는 속삭임이 이어지는 동안 예서의 의식이 점차 검게 물든 도화지처럼 변해갔다.
선배, 제발…! 제발 서둘러줘요. 부탁이야….
혼절 직전까지 사랑이의 안녕을 바라는 간절함 때문인지, 다른 쪽 손은 주먹을 꼭 말아쥔 그대로였다.
***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폴란드 민요(Szymanowski, Variations on a Polish Folk Theme, Op.10) 선율이 귓가에 영롱한 구슬처럼 튀어 오르고 있었다. 간호사가 볼륨을 적당히 조절해줘 음률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계류유산 진단이 내려지고 소파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끝난 후로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 진통제와 영양제 투여를 연이어 받으며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깨어난 후에도 현기증이 가시지 않아 내내 멍하니 누워 있었다. 의사의 말이 귓전을 맴돌아 눈을 감아도 떨칠 수가 없었다.
-임신 중지 상태입니다. 산모님 몸이 좀 허약하시긴 했지만 계류 유산은 불시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자궁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너무 상심 말고 몸부터 추스르세요. 그런 다음 느긋하게 다시 임신 준비를 하시면 문제없습니다.
사랑이는 그렇게 배 속에서 5주간 머물다 떠났다. 이제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아기 없는 아기집이 담긴 초음파 사진이 다였다.
미안해. 사랑아. 엄마가 너무 부족해서… 튼튼하고 강하지 못해서 널 그렇게 보내고 말았어. 정말 미안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이미 쏟아낼 대로 쏟아내 더는 나올 눈물이 없을 텐데도 계속해서 쉼 없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반쯤 넋이 나가 그렇게 누워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서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제야 자신이 있는 병실이 이례적인 공간임을 깨달았다. 널찍한 1인용에다 호텔 객실처럼 고급스러운 침구, 인테리어가 아무리 봐도 평범한 병실은 아니었다. 환자복 위로는 지역에서 제일 큰 종합병원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대답이 없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당연히 간호사인 줄 알았던 예서는 손으로 눈가를 비비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문 앞에는 간호사가 아닌 한주혁이 서 있었다.
그는 등 뒤로 문을 닫고 천천히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회사에 출근할 것처럼, 혹은 막 퇴근한 것처럼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피로라곤 엿보이지 않는 낯빛이 서늘했다. 야윈 턱이 한층 더 가파른 선을 이루며, 날카로운 눈매와 그 안에 담긴 동공이 한없이 어두웠다. 그가 한 발짝씩 가까워질수록 예서의 심장 박동도 빨라지고 있었다.
“…괜찮아?”
“…….”
낮은 한숨에 이어 착 가라앉은 음색이 고적한 방 안을 울렸다.
“하루만 더 쉬었다가 내일 서울로 올라가자. 난 일이 있어서 지금 가야 되지만 비서들이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넌 가만히 있으면 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예서는 시선을 내린 채 여전히 말이 없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얼굴이 밀랍 인형처럼 파리했다. 흡사 몸만 여기 있을 뿐 정신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떠도는 사람 같았다.
“예서야.”
“그게 선배가 바라던 거였죠, 언제나.”
예서는 고개를 들지 않고 허벅지 위를 덮은 침구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몸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멋대로 움직이는 혀를 저지할 여력조차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선배만 바라보고 선배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것.”
“예서….”
“사랑이가 떠났어요. 왔을 때처럼 너무 갑자기.”
“…….”
“알아요. 선배 잘못이 아닌 거. 선배가 어제 불쑥 찾아오기 전부터 진행되어 온….”
차마 유산이란 단어를 내보낼 수 없는지 예서가 말을 멈췄다. 쥐어짜듯 간신히 잇는 목소리는 제 귀에도 낯설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선배를 원망하진 않아요. 서울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예서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 익숙한 형체가 있었다.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외양이었다.
셀 수 없이 만지고 보았던 사람이다. 잘 빚은 조각처럼 입체적인 이목구비, 자잘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가 모르는 구석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내면에 대해서도 더는 무지하지 않았다.
한때는 도무지 알 수 없어 힘이 들었다. 너무도 불투명해 혼란스러울 때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또렷이 보였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과거에는 한주혁이란 사람, 그 참모습에 대해 그토록 알고 싶어 안달을 내고 괴로워했었는데. 하지만 막상 알게 된 그의 본질은 지금껏 가려졌던 제 시야를 단번에 걷어내고, 사랑이란 감정 대신 진실을 바로 보게 만들었다.
“민예서.”
“선배. 그거 아세요? 얼마 전에 깨달았는데… 나는 굉장히 둔한 사람이었어요.”
“뭐…?”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그 당시에는 진실을 똑바로 보지 못했어요. 늘…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확한 상황을 깨닫게 되는데… 왜 그렇게 바보처럼 항상 늦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어요.”
“…….”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취급을 너무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처럼 받고 자라서 그런 것도 같아요.”
한주혁이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민예서였다. 파리한 안색, 메마르긴 해도 착 가라앉은 목소리, 어딜 봐도 흥분한 기색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주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