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두 눈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성급하게 몸을 겹치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봐도 아무런 태가 나지 않았다.
그가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손으로라도 확인하려는 순간, 예서가 그를 있는 힘껏 밀어 내고 앉은 채 뒷걸음질 쳤다. 잠깐이나마 결합이 되었던 다리 사이가 홧홧하게 끈적거려 허리를 일으키기 쉽지 않았다.
“너….”
그가 혀로 아랫입술을 핥으며 잇새로 내뱉었다.
“임신했어?”
“…….”
“설마, 알고도 파혼하자 그런 거야?”
“아니에요, 선배 아이. 선배와 아무….”
예서가 두 손으로 양팔을 감싸 안고 거세게 부정하다 말을 멈췄다. 그럴수록 더 진실이 드러날 뿐임을 스스로도 잘 알았다. 불과 한 달 전에 생긴 아이다. 그와 무관하다는 말은 헛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 아이를 가지고도… 아니, 오히려 그걸 알게 돼서? 그래서 여기 꽁꽁 숨어 혼자 낳으려고 한 거야?”
한주혁의 눈이 분노로 형형해지고 있었다. 예서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였다.
“내 아이예요. 선배랑 상관 없….”
“까불지 마!”
한쪽 주먹이 방바닥을 쿵, 내려치는 소리에 예서가 움찔 떨었다. 간담이 서늘한 나머지, 한 손이 무의식적으로 다시 복부에 가 닿았다.
“내가 상관이 없으면? 네가 나 말고 다른 새끼와 붙어먹어 그 새끼 애를 가졌다고?”
“…….”
“네가? 민예서가?”
한주혁의 음색이 평소처럼 다시 낮아지고 있었다. 오히려 방금 전 언성을 높였던 때보다 더 섬뜩하고 스산했다.
“지금 나더러 그걸 믿으라는 거야?”
비뚤게 호를 그린 입술 끝에는 불신과 조소만이 가득했다. 불꽃 튀는 눈을 마주하는 동안, 예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임신 사실을 들켜버린 이상 한주혁은 절대 속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다시 제 인생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
“선배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어요. 이 애는 내 아이고… 선배랑 난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래서. 이 외딴곳에 혼자 처박혀 있다가 애를 낳아 혼자 키울 거라고?”
“아뇨.”
예서가 입술을 짓씹듯 꼭 물고 있다 대꾸했다.
“처박혀 있는 거 아니에요. 여기서 잘 먹고 잘살면서 아이 낳을 거예요. 엄마 혼자 얼마든지 잘 키울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러다 또 모르죠. 좋은 사람 만나서….”
덜덜 떨리던 말이 이어질수록 어조가 단호하게 변해갔다. 제 귀에도 헛소리로 들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포기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선배보다 훨씬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나만의 가정을 가지….”
“입 다물어.”
한주혁이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뇌까렸다. 우물처럼 깊은 동공이 음산한 목소리만큼이나 어두웠다.
“끝까지 지껄이면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듣기 싫으면 이만 가세요.”
예서는 파르르 떨면서도 그를 노려보는 눈길만은 거두지 않았다.
“가요. 제발.”
“다시 시작해.”
한주혁은 쥐어뜯듯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숨을 골랐다. 격앙된 내면을 다스리기 힘이 드는지 너른 어깨가 희미하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자체에 면역이 없긴 할 터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만큼 제 의지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는 남자였다. 어떤 돌발 상황 앞에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는 타고난 냉정함도 있겠지만, 애당초 세상이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환경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한주혁의 삶 자체가 그랬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일단 서울부터 올라가자.”
“아니… 안 돼요. 그건.”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이제는 그의 밑바닥 진심을 다 알아버렸다. 그걸 안 이상 예전처럼 돌아갈 길은 없었다.
“수상 결과 정정된 걸 봤어.”
몸을 일으키려던 예서가 흠칫 떨었다.
“이왕 좋은 성과를 냈으니까 원하는 대로 해. 말리지 않아.”
“…….”
“뭐가 문제였든, 다시 얘기해서 개선할 수 있는 건 개선하고 최대한 맞춰가며 조율하면 돼. 결혼해도 이런 갈등, 삐걱거리는 일은 얼마든지 있겠지. 그럴 때마다 끝내자고 할 거야?”
예서가 입술을 다시 꼭 물었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숨쉬기도 벅찼다.
“선배. 봐요. 지금 선배는… 뭐가 문제였는지도 모르고 있잖아요.”
“예서야.”
“선배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요. 아무것도.”
흐느낌이 자꾸만 비어져 나왔다. 예서는 이 악물고 다시 일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다리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선배는 내 남편도 아니고 법적인 구속력이 없어요. 날 강제로 어떻게 할 수 없단 뜻이에요. 난 더 할 얘기도 없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아이는 나 혼자 낳아 잘 키울 거니까 그냥 모른 척 가세요. 제발.”
“모른 척 가라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게요. 원한다면, 아이 문제로 엮일 일 없을 거란 각서도 쓸 거고요. 그러니까 선배도 법적인 권리나 다른 건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고….”
“네 배 속에 든 게 뭐건, 내 것이기도 해. 그런데 내게 아무 권리도 없다고?”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우리 집 어른들이 알게 되면. 과연 그 아이를 순순히 내버려 두실까?”
한주혁의 저음이 점점 더 신랄하게 변해갔다.
“아니, 어르신들하곤 상관없어. 네가 끝까지 내 권리를 무시한다면, 장담하는데 나부터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친권, 양육권 모두 내 쪽으로 끌어올 거니까.”
그는 모든 것에 늘 무심했고 일 외에 어떤 것에도 집착을 내비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정말로 원하는 것이나 뜻하는 바가 생겼을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 목표물 중 하나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손에 쥐었을 때는 그뿐이었다. 정식으로 교제하기 전까지는 늘 그녀 혼자 애타 했고, 막상 연인이 되었을 때도 그는 그녀를 물고기처럼 방치할 때가 많았다. 잡아둔 물고기에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표현에 딱 들어맞을 때가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면모도 언젠가부터 조금씩 사라지며, 최근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거란 믿음과 희망에 둘러싸여 매일이 행복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결국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뒤틀림을 본 이상, 더는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다. 남은 건 아이를 걸고넘어지려는 그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돌려보내는 것, 그 하나뿐이었다.
“그러지 말아요.”
최대한 떨림을 숨기고, 차갑고 단호하게 말하려 애썼다. 하지만 애쓰면 애쓸수록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선배는 선배 인생 살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소송도 불사할 자신 있어? 너 하기에 따라 애 크는 거 평생 못 볼지도 몰라.”
예서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저런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난 이 아이 엄마예요! 어떻게….”
“그래. 그리고 난 아빠지.”
그가 차갑게 받아쳤다.
“그렇게 싫다면 더는 붙잡지 않겠어. 하지만 아이는 달라.”
예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때 깨달았다. 어떤 말로 설득하든 한주혁은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기어이 서울로 다시 끌고 가 제 뜻대로 상황을 몰고 갈 터였다.
차라리 사랑이를 그에게 주겠다고 할까. 낳으면 선배에게 보낼 테니까 이대로 내버려 두라고… 아니, 소용없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이다. 그는 약혼 전부터, 그녀가 뭘 가장 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 가슴 깊이 자리한 제일 큰 소망, 그 염원을 얼마나 수없이 말해 왔던가. 두 사람의 아이, 좋은 부모, 행복한 가정, 그에 얼마나 커다란 가치를 두어 왔는지 그는 무수히 들어 왔었다.
시간을 벌어야 돼.
다시 멀리 떠나거나, 법적으로 방어할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절실히 필요했다. 예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사랑이… 아이 태명이에요. 사랑이는 선배 아이예요. 선배에게도 아빠로서의 권리가 있죠. 맞아요.”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리하게 번뜩이는 두 눈에 의혹이 퍼즐 조각처럼 떠 있었다.
“그럼 지금 당장 서울로 가. 네가 원하는 거면 뭐든 다 들어줄 테니까 일단 가자고.”
내가 원하는 건 선배로부터 영원히 벗어나 나만의 인생을 사는 거예요.
예서가 참지 못하고 속내를 내뱉을 뻔했다. 아이가 그녀 곁에 와 줬으니까 이제 단둘만의 가정을 이뤄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인데, 왜 그걸 모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