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82)화 (83/124)

<82화>

“4년이란 시간이 짧지는 않았으니까 걱정될 만도 하….”

“그래, 4년. 적지 않은 시간이지. 네가 나 훔쳐보고 따라다녔던 것까지 포함하면 5년이지만.”

으르렁대듯 낮게 일갈하는 음색에, 예서가 다시 움찔 떨었다.

“그 시간을 그따위 편지 쪼가리 하나로 짓밟고, 이제 각자 제 갈 길 가자고?”

“…….”

“날 정말로 사랑하긴 했어?”

예서의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두 손이 저도 모르게 헐렁한 재킷 속 복부로 향했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멋대로 약혼을 깨고, 한 달 가까이 연락 두절에다 이렇게 잠적을 한다고?”

“네. 나는 선배, 정말 사랑했어요. 진심을 다해서….”

입만 열면 좋아한다, 사랑한다며 일방통행 같은 감정을 질리도록 내비쳤고 멀리서 눈만 마주쳐도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 대는 강아지처럼 굴었다. 아무리 상처 입고 눈물이 나도, 결국 그에게 늘 지고 들어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이기적이고 자기 본위에, 때로는 잔인하다 싶을 만큼 냉정하고 싸늘한 면들까지 사랑했기에.

그 모든 감내의 시간은 결국 도화선이 터질 만한, 어떤 강력한 계기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친에게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처럼.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더는 선배, 사랑하지 않아요.”

“…….”

“그걸 깨달은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눈에 훤히 보였어요. 약혼을 취소하고, 선배는 선배대로… 나는 나대로 제 갈 길 가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이 나온 거죠.”

씨발.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예서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침대 위를 제외하고는 욕을 입에 담지 않는 그였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는 그랬다.

“그럼 난 뭐가 되지? 민예서가 일방적으로 실컷 가지고 놀다 버린 장난감인가?”

“뭐라고요?”

예서가 침을 꼴깍 넘겼다. 복부를 조심스럽게 감싸던 것도 잠시,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힘이 바짝 들어갔다.

“오히려 그 반대죠. 선배가… 선배야말로 날….”

기가 막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녀를 힐난할 수 있을까. 정작 그녀를 장난감으로 여겼던 건 한주혁 자신이면서. 다른 사람 주긴 싫고 나 갖기는 아까워, 허울뿐인 관계의 테두리 안에만 가둬두곤 연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다른 면들까지도 한주혁을 이루는 부분으로 받아들인 것과는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미미한 감정 소모도 원치 않았고, 그의 내면은 단 한 번도 민예서를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지 않았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믿었던 것도 죄다 그녀의 오산이었다.

한주혁은 민예서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애시당초 민예서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게 그녀의 가장 큰 과오였다.

“선배야말로 날 사랑하지 않잖아요. 진심으로 사랑한 적,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예서는 목이 메어오는 걸 꾹 누르며 재차 말했다. 더 길게 얘기해봤자 서로에게 상처만 될 터였다.

“이런 얘기 더는 하고 싶지 않아요.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선배와 나, 둘 다 서로 마음이 없으니까 이제 깔끔하게….”

“최인하에게 갈아타기라도 한 거야? 자기한테 오래?”

한주혁의 입에서 하, 하고 헛웃음이 흘렀다. 입매는 웃고 있었지만 폭발 직전의 눈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예서가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숨을 크게 들썩거렸다.

당장이라도 부정하고 싶었지만 다른 가능성이 곧바로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래서 혹했어? 그 자식한테 가려고?”

“선배가 상관할 바 아니에요.”

그 대답에 한주혁의 눈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그가 오만하게 꼬고 있던 다리를 똑바로 펴고 짓씹듯 말했다.

“대답해. 잠적해 있는 동안에도 그 새끼와는 계속 연락해 왔잖아.”

“…….”

“내가 몰랐을 거라 생각하지 마.”

“…사람 일, 어떻게 알겠어요.”

소리 없이 심호흡을 했지만 자꾸만 빨라지는 심장 박동은 그대로였다. 차분함을 잃지 않고자 애썼지만 단전 위로 맞잡은 손의 떨림은 그대로였다.

“난 여기서 알아서 잘 지낼 거예요. 누구랑 어떻게 되든,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요. 그러니까 선배는 이만 가주세요. 다시는 만날 일 없기를 바랄….”

예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주혁이 눈 깜짝할 새 테이블을 돌아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어깨를 그악스럽게 잡히고 몸이 위로 들린 순간, 예서는 뒤늦은 후회감에 숨을 헐떡였다.

처음부터 그를 집 안으로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든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했어야….

“선배! 이러지 말….”

“그렇게 싫다면 나도 더 붙잡진 않겠어. 하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려고.”

한주혁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뒤로 젖히며 말을 이었다. 일견 고요하던 동공 가득 광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렇게 감정이 완전히 메말랐다면, 몸도 반응하지 않겠지. 안 그래?”

눈에서 튀어 오른 불꽃을 본 순간 예서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입술이 곧장 포개지며 닿은 차디찬 구순의 감촉에 이어, 무람없이 밀려드는 혀의 뜨거움에 등줄기가 바르르 떨렸다.

그를 밀어 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그녀를 더 힘주어 붙잡고 있었다. 처벅처벅, 젖은 소리가 귓바퀴를 휘돌며 입 안의 쓰라림이 더해만 갔다.

“으… 흐으….”

강제로 혀를 잡힌 가운데서도 배 속의 사랑이에게 온 신경이 미쳤다. 예서는 일부러 몸에서 힘을 빼고 그에게 순응하는 것처럼 반항을 멈췄다. 그러자 단단한 팔 힘이 느슨해지며, 여유 없이 맞붙은 복부의 압박감이 희미하게나마 덜해지기 시작했다.

혀가 그녀의 작은 설단을 제압해 한 바퀴 더 돌릴 때였다. 예서의 두 팔이 저도 모르게 그의 팔뚝을 그러쥐었다.

이 와중에도 키스에 반응한 다리 사이가 무지근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미칠 것 같았다.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과 수치심이 가슴을 꽉 채워 왔다.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게 무색할 만큼, 이런 사나운 키스에도 흥분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혀 아래, 입 안이 통째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예서는 아릿함 속에서 그의 혀가 제 것을 놓아주는 감각에 눈을 떴다.

“선배, 그…만! 흑!”

달뜬 숨결을 고를 새도 없었다. 다음 순간 예서는 바닥의 카펫에 깔려 있었다. 코트의 허리끈이 풀리고 스커트가 밀려 올라가며, 손바닥 가득 뜨거운 열기가 가장 내밀하고 예민한 속살에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아, 안…! 그만, 선배…!”

“잔뜩 젖었어. 안아달라 매달리던 예전이나 지금이나… 넌 똑같아.”

조롱기 섞인 독설이 거친 숨을 가르고 튀어나왔다.

“이런데 더는 감정이 없다고?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네가…?”

민예서가 나를?

그는 그녀가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이라도 한 것처럼 이 악물고 몸을 더 기울여왔다. 다시금 혀를 섞어오는 몸짓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또 다른 종류의 난폭함이 흘러넘쳤다. 혀가 빨리면 빨릴수록, 악착같이 이성을 놓지 않으려는 결심이 흐물흐물 녹는 것만 같았다.

“그만… 선, 선배… 제발… 흣!”

바르작대면 바르작댈수록 제 혀에 흡착해 탐하는 힘이 더 강해져만 갔다. 한주혁의 단단한 몸이 제 위에 겹쳐지며 하체가 맞붙었다.

예서가 몸을 크게 떨었다. 그의 흥분이 여실히 느껴졌다. 혀와 점막이 정신없이 뒤덮이는 동안에도, 배꼽 아래 단전을 뜨겁게 누르는 감각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안 돼, 사랑이… 사랑이가…!

한주혁의 커다란 손이 니트를 가슴 위까지 올리곤 한쪽 젖가슴을 꽉 그러쥐었다. 블라우스 위로 도드라진 살점을 잇새에 물고 힘을 주는 순간, 예서가 허리를 활처럼 휘고 고개를 젖혔다.

“아, 안 돼요! 그만… 하지 마요, 하지 말….”

철컥, 벨트 풀리는 소리에 예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리 사이는 흠뻑 젖은 지 오래였다. 그의 조롱대로, 옛날과 변함없이 그의 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아, 선….”

그러나 말릴 틈도 없었다. 한주혁은 늘 무심하고 냉정했던 평소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것 같았다.

그는 예서의 허리를 받치고 젖은 구멍 속으로 가열하게 파고들었다. 어떻게든 몸으로라도 예서가 제 것임을 확인하고 싶은 소유욕에, 그저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아! 선, 안… 흐윽….”

“난 그 좆같은 파혼에 응한 적 없어. 처음부터 쭉.”

삐걱거리는 마찰음, 씨근거리는 숨결과 예서의 비명 같은 교음을 꿰뚫고 사늘한 저음이 뒤를 이었다. 흥분으로 잔뜩 거칠어진 숨소리와 달리 어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동의한 적 없으니까.”

그의 것은 절반만 들어와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한주혁이 예서의 양쪽 발목을 그러쥐고 반대쪽으로 확 벌렸다. 예서가 위기감에 숨을 크게 뱉었다. 순식간에 치부가 죄다 드러난 수치심보다 사랑이가 잘못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훨씬 강했다.

“그, 그만- 안 돼! 아이가… 아이가 있어요!”

그녀의 골반을 들어 올려 더 깊숙이 들어가려던 한주혁의 움직임이 멈췄다. 예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힘껏 밀어 냈다. 상체를 똑바로 세우는 숨결이 거칠었다.

“제발요! 더는 하지 말아요. 아이가….”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예서가 다시 말했다. 끝까지 비밀로 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재빨리 복부를 가리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의 손이 더 빨랐다. 한주혁이 그녀의 양손을 저지하고 니트를 거칠게 들어 올려 배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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