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예서야.
“응. 인하 오빠.”
-별일 없이 잘 지내나 해서 전화해 봤어.
최인하는 여상한 어조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잠시 근황을 나눈 끝에 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주말에 삼촌 댁에 내려가려고 하거든. 봐서 금요일 저녁 퇴근하고 바로 갈까 해.
“아저씨 댁에 무슨 일 있으셔?”
-그런 건 아니지만….
잠깐의 틈이 생겼다. 예서의 심장이 불안으로 살짝 조여들었다.
-사실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나한테? 무슨 얘기?”
예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물으면서도 최인하가 부디 그 말만은 하지 않길 바랐다. 제발 다른 용건이길 빌었지만, 그 예상은 조금씩 빗나가고 있었다.
-가서 얘기할게. 토요일 오후에 시간 괜찮아?
예서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게 입을 뗐다.
“인하 오빠. 혹시… 오빠랑 나에 대한 얘기야?”
장례식에서도 애써 무지한 척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오는 연락의 간격이 점점 더 짧아지며,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까 예견하고 있던 차였다.
“오빠. 전화로 얘기하기 미안하지만 지금은… 누구와도 새로 시작할 생각이 없어.”
일부러 딱딱하게 얘기하느라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최인하의 호의를 생각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조금의 틈도 허용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미안해. 그동안 오빠에게 신세 진 것도 많고… 오빠 마음도 잘 알아. 그래서….”
그래서 더 받아줄 수가 없었다. 사랑이 때문에라도 당연히 그게 옳았다.
-아냐. 나야말로 미안해.
최인하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상심이 깃든 목소리였다.
-미안하다. 너 파혼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사실 성급함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예서는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안 그래도 힘든데 내가 부담을 줬어. 미안해.
“아냐, 오빠. 내가 미안해. 나중에 경현이 첫 휴가 나오면 오빠에게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그때 봐서….”
-그래, 그때 다 같이 보자. 더 신경 쓰지 말고… 늘 건강 유의하길 바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최인하는 그를 부르는 소리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종료하기 전에, 앞으로 정식 연재될 소설에 대한 응원도 잊지 않았다.
예서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선이 다시 배 쪽으로 향했다. 그때 최인하도 같이 만나게 될지 아직은 미지수였다. 하지만 경현은 확실히 보게 될 터였다.
많이 놀라겠지….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아이, 그리고 제 인생이었다.
***
예정보다 시장에 더 오래 있었다. 중간에 허기가 져서 떡볶이와 어묵꼬치까지 먹고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예서는 대추 사과와 단감을 품에 안아 들고 주택가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 어귀의 마을회관 앞 주차장에는 언제나처럼 차가 드문드문 세워져 있었다. 그중 한 차가 유달리 시선을 끌었다. 누가 새로 뽑은 차를 끌고 왔는지, 번쩍번쩍 빛나는 은회색 SUV가 서 있었다.
차에 대해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상당히 비싸고 고급스러운 차종 같았다. 예서는 손에 든 과일 꾸러미가 무거워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기시감이 들었다.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춰 섰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슷하긴 해도 달라. 선배 차는 검은색이잖아.
예서는 과일 팩을 다시 고쳐 안고 가장 막다른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맨 끝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기묘한 생각이 다시 불쑥 떠올랐다.
매쉬 타입의 커다란 라디에이터 패턴, 크리스탈 느낌이 나는 헤드램프, 독수리 날개처럼 생긴 문양…. 색깔만 다를 뿐 한주혁의 검은색 벤테이가와 비슷했다.
설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예서는 종이봉투를 품에 꼭 끌어안고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집에 가면 안 된다는 강렬한 직감에 소름이 돋았다.
어떡하지. 어디로 가야….
다시 대로변으로 향하는 순간, 골목 저편에 긴 그림자가 보였다. 뒤이어 건장한 체구가 순식간에 예서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
손에서 뭔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대추 사과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가득 메워왔다. 예서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상대를 올려다보는 두 눈은 경악에 가득 차 있었다.
“선배가 왜 여기에….”
한주혁은 말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짝 미간을 찡그린 얼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정장 차림에는 한 치의 허술함도 없다. 막 출근길에 나선 모습 같았다.
예서의 등에 차디찬 벽이 와 닿았다. 어느새 상대방을 피해 이웃집 담벼락까지 물러나 있었지만 한주혁은 전혀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였다.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차갑게 가라앉은 음색은 고저가 없었다. 시원스럽게 드러난 이마와 곧게 뻗은 콧대, 시선만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듯한 눈은 어두운 우물 같았다. 평소처럼 한 톨의 감정도 느낄 수 없던 눈에 조금씩 감정이 실리며, 예서의 호흡을 조금씩 조여왔다.
“멋대로 약혼을 깨고 번호까지 바꾸더니. 고작 도망친 곳이 여기였어?”
차분해서 더 섬뜩한 목소리였다. 그는 평소에도 늘 그랬다. 자신이 그러고자 마음만 먹으면 주변의 공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럴 의도가 없을 때조차 주위 사람을 바짝 긴장시키는 위압감 덩어리인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날 선 심기를 드러낼 때는 오죽할까.
“도망친 거 아니에요.”
“그래, 정정하지. 여기 숨어 있었어?”
“멋대로 깬 거 아니잖아요. 나는 파혼하고 싶다고 충분히 내 의사를 밝혔고, 편지도 남겼어요.”
“…….”
“번호를 바꾸기 전까지 시간이 있었는데도 연락이 없었던 건, 선배도 내 의사를 결국 받아들이고 우리 파혼에 동의한 거 아니었나요?”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만큼 겁에 질려 있기도 했지만, 배 속의 사랑이에게 생각이 미친 까닭이었다. 의사는 임신 초기에는 유산의 위험이 크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다. 이런 상태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면 태아에게 좋을 게 하나 없을 것이다.
한주혁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난폭하진 않았지만 미묘하게 신경질적인 몸짓이었다.
그는 지금 끓어오르는 내면의 동요를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지극히 초연해 보였지만 예서의 눈에는 그 들썩임이 보였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싫어요.”
거부의 대답이 절로 튀어나왔다.
“돌아가세요.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세요.”
예서는 울 듯한 시선을 내리깔고 애써 말을 이었다.
“우린 이미 끝났어요.”
“…네 멋대로? 너 혼자서 끝났다고 하면 끝나는 거야?”
그때 샛길 쪽에서 사람들의 기척이 들렸다. 일행으로 보이는 남녀는 그들 쪽을 힐긋 보곤 반대쪽 골목으로 사라져 갔다. 어딘가 석연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여자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한주혁이 한숨을 내쉬곤 재차 말했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아뇨.”
“들어가. 좋게 말할 때.”
냉랭한 목소리에 예서가 고개를 들었다. 흐릿해진 동공 사이로 낯설고도 익숙한 그가 보였다. 완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건 경험상 알고도 남았다.
한주혁은 예나 지금이나 나쁜 자식이긴 했지만 적어도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쓰레기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의 엄청난 힘을 실감했던 건 침대 위뿐이었지만, 지금은 강제로라도 질질 끌고 갈 것만 같았다.
“10분. 그 이상은 안 돼요.”
다시 확실히 쐐기를 박는 시간은 10분이면 족했다. 대체 왜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예서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대문을 향했다. 뒤늦게 떨어뜨린 과일이 생각나 다시 돌아선 순간, 흠칫 놀랐다. 한주혁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과일 봉지를 한 손에 가볍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열쇠로 대문을 열고 안쪽 현관문 앞에 섰다. 다른 쪽 열쇠를 꽂고 문고리를 당기는 손끝이 덜덜 떨려 왔다.
어떻게 신을 벗고 들어가 소파에 앉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재킷을 벗지 말아야겠다는 경각심만은 또렷했다. 아직 티도 나지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해요. 뭘 더 원하는지.”
“…뭐?”
차분하다 못해 서늘한 말투가 낯선 듯, 한주혁이 다시 미간을 좁혔다.
“각서라도 써 드릴까요? SG그룹 차기 후계자와의 과거…. 그 어떤 사생활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 같은 거요. 뒤탈이 걱정돼서 온 거라면 얼마든지….”
“민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