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렇지 않아도 짙은 화장으로 물든 홍련 보살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이 사주는 말이지, 둘째가 저세상 가신 자네 남편을 대신하는 운이야! 가족을 평생 거두고 부양한단 말이지.”
“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연꽃 선녀님은 둘이 태어났을 때부터 상극이라 둘째가 첫째를 잡아먹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둘째가 너무 잘 되면 안 되니 바짝 눌러야 한다고….”
홍련 보살의 눈매가 순간 번뜩였다.
“연꽃 선녀님이 그러셨어?”
“그렇다니까요. 둘째가 훨훨 날수록 우리 정우는 더 고꾸라지게 되니까 이번 결혼도 시키면 안 된다고 하셨다고요.”
“부적 때문이구만.”
“네?”
들릴 듯 말 듯 한 중얼거림에 이경은이 반문했다.
“아냐. 아무것도.”
홍련 보살은 아차, 말실수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연꽃 선녀님이 옳게 보신 거야. 내 말은, 그때는 쌍둥이라 사주가 얽혀 있다 보니 그렇게 보이신 거란 소리지. 근데 그거 알아? 사람의 음양오행은 나이가 들면서 변해. 안 변하는 사람도 있지만 변하는 이들도 있어.”
“그럼 우리 애들 사주도 변했다는 건가요?”
“바로 그 말이야.”
홍련 보살은 책상을 다시 소리 나게 탁, 치면서 역술서를 빠르게 넘겼다. 그러고는 쌍둥이의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둘째는 아주 똑 부러지고 야무지지? 딸 말이야.”
“맞아요. 공부도 아주 잘했고 뭐든 알아서 척척 하는 아이예요.”
“얘는 날 때부터 귀운이 있네. 게다가 지금은 아주 물을 만났어. 금수쌍청(金水雙淸), 추수통원(秋水通源)의 길운이야. 노력하는 만큼 재능을 크게 꽃피우고 걸리는 거 없이 쭉 잘 될 상이지.”
“그럼 우리 정우는요? 네?”
이경은이 저도 모르게 바짝 다가앉았다. 예서야 원래 물가에 내놔도 알아서 잘 살아나갈 물건이다. 문제는 노상 속끓이는 우리 정우 아닌가 말이다.
“아들이 하는 일마다 안 되지?”
“글쎄,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연꽃 선녀님이….”
“내 보기엔 말이야.”
홍련 보살이 다시 부채를 집어 들고 허공에 펼쳤다.
“이름을 바꿔야 돼. 정우란 이름 자체는 좋지만 이 사주엔 안 어울려. 딸하곤 달리, 지금 아들은 귀문관살(鬼門關殺)이 있어! 이럴 때는 아예 잡귀신이 알아볼 수 없게끔 이름을 바꿔버리는 게 살길이야.”
“네? 이름을…요?”
“이름 바꿔서 술술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아주 많아. 얼마 전에 대선주자로 나온 전 당 대표인가 그 의원 말이야, 그 사람도 전에는 지지리도 안되다가 10년 전엔가 개명한 뒤부터는 승승장구하고 있잖아? 내 마침 성명학 전문이기도 하니 정식으로 의뢰를 하면, 첫째한테 딱 맞는 걸로 만들어 줄게. 그렇게 해.”
“하지만 갑자기 멀쩡한 이름을 바꾸라니….”
“거참 답답하네! 멀쩡한 이름이었으면 아들 신수가 지금껏 그리 깝깝했겠어? 멀쩡하지 않으니 그런 거 아니겠냐고. 애들 이름, 처음부터 제대로 전문가에게 안 맡기고 아무 데서나 대강 지었지? 사람은 말이지 이름이 옷보다 더 중요해. 제 사주에 안 맞는데 그저 이쁘고 번듯한 이름이라고 아무렇게나 붙였다간 큰일 난다고!”
“아, 알았어요. 그럼 다시 연락하고 올게요.”
이경은은 솔깃한 마음에 다시 방문일을 잡았다. 하지만 작명비가 만만치 않아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갑자기 한주혁이 떠오르며 그가 주고 간 서류철이 떠올랐다.
운이 바뀌었다고? 그래.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린 아니지. 사람 관상이랑 손금도 세월이 지나면서 바뀐다는데.
그동안 정우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이 없던 탓에 수년간 연꽃 선녀에게 찾아오지 못했다. 오늘 예정대로 연꽃 선녀를 만났다면. 그럼 그녀도 같은 말을 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를 어쩐담. 예서는 이미 마음을 접은 것 같은데.
반면 한주혁은 아무 문제 없다고 주장하며 기어이 결혼을 강행할 뜻을 내비쳤다. 그러니 정우를 위한 금전적인 지원까지 해주겠다 나선 것일 터였다. 하지만 절연을 해야 사위로서 돈을 주겠다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게다가 5년간 확실히 인연을 끊으면… 약국 건물까지 주겠다고 했었지. 정말일까? 그럼 우리 정우 졸업만 하고 한국 들어오면 가게라도 하나 차려줄 수 있을 텐데. 건물 관리를 맡기거나.
이경은이 한숨을 들이쉬었다. 만약 홍련 보살 말대로, 애들 사주가 반대로 뒤집혔다면 굳이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예서가 정우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오히려 정우에겐 득 될 일만 한가득 아닌가.
순간, 폰 너머 예서의 싸늘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날 제 외할머니와 한 얘기를 다 들었다니 그렇게 태도가 바뀐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당연히 억울하고 기분 나쁠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원체 착하고 여린 아이니 잘 달래면 마음을 풀 터였다.
문제는 결혼인데…. 예서가 다시 한주혁이를 잡아야 하는데 어쩐다. 그래서 한주혁이 앞에서만 인연 끊은 척하고 돈이랑 건물 다 챙기면 안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를 위해 그게 최선일 것 같았다.
***
일주일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기집이 확실히 보인다는 의사의 말에 예서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초음파 사진을 받아보자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의사는 흑백사진 속 아주 작은 원형을 가리켜 보였다.
“아기집 모양이 동글동글 자리를 잘 잡았어요. 위치도 딱 한가운데 좋고요. 보자…. 아직 아기랑 난황은 안 보이니까 다음 검진일에 다시 찍어봐야겠네요.”
의사는 서울말을 열심히 쓰면서 방긋 웃어 보였다.
“네….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군요.”
“다음에 오면 확실히 보일 테니 염려 마세요. 앞으로 몸 관리에 특별히 더 유의하셔야 되는데, 곧 겨울이니까 몸 따뜻하게 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요, 임신 초기에 먹으면 좋은 것들도 프린트해서 드릴게요.”
소도시 병원이라 걱정한 게 무색할 만큼, 중년의 여의사는 사근사근 친절히 일러주었다.
-결혼할 사람이 있었는데… 파혼했어요. 그래도 아이는 저 혼자 낳아서 잘 키울 수 있거든요.
-그렇군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너무 걱정 마세요. 요즘은 한 부모 자녀 양육 지원도 잘 돼 있으니까요.
첫 방문을 했던 날, 혼자 올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야기했을 때도 의사는 담담히 응원해 주었다. 미혼 임부가 예전만큼 드물지 않기 때문일 터였다.
예서는 병원 1층으로 내려오는 내내, 초음파 사진을 소중한 보물처럼 품속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보길 반복했다. 볼수록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 다음 주면 사랑이가 보이겠지. 우리 사랑이. 다행이야, 이렇게 잘 자고 있어서.
그 순간 태아의 아빠가 떠올랐다. 1층 로비 거울 너머 웃고 있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르게 걷혀 갔다.
사랑이가 생긴 걸 알면 그는 어떤 얼굴을 할까. 이미 끝났는데 아이라니 당황해할까. 혹은 자신을 차갑게 볼 때의 그 무심한 표정일지도.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오만하게 뒤돌아서는 뒷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혹은 아이의 존재 자체를….
섬뜩한 상상에 몸서리가 쳐졌다. 순간, 다리 사이가 찌릿 아팠다.
상관없어. 사랑이는 내 아이고, 선배와는 아무 관계 없어.
제 결정으로 그와의 관계를 끊어냈고 스스로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랑이에 대해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설령 알게 된다 해도 무심한 듯 한마디 던지는 게 고작이겠지.
-우리 이미 끝났잖아. 잊었어?
그는 본래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타입이다. 제가 선을 넘지 않는 한 사귈 때는 뭐든 해 주려 나서고 다정했지만, 일단 마음이 떠나면 지독하게 냉랭해질 사람이었다. 만에 하나 사랑이의 존재를 훗날 알게 되어도 그녀의 요청에 응할지도 몰랐다.
뭔가를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는 조건으로, 이대로 사랑이와 둘이서 조용히 살게 해 달라고 하면 결국은 들어주지 않을까.
예서는 한주혁의 잔상을 간신히 뇌리에서 떨쳐낸 뒤 사진을 가방 깊이 집어넣었다.
***
며칠이 흐르고 바람도 쐴 겸 마을 도서관으로 향할 때였다. 책을 한 권 빌려 다시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멀리서 생경한 소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위로 향했다. 경비행기 두 대가 나란히 포물선을 그리며 흐린 겨울 하늘을 활주하고 있었다. 기체는 이윽고 자유무역 공단 구역 너머, 마산항 제 3부두 쪽으로 사라져갔다. 근처에 경비행기 이착륙장이 있었다.
지금까지 경비행기를 본 적은 손꼽을 정도였으나 봄에서 가을에 이르는 시기에는 드물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공단 쪽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 듯 꽤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예서는 멍하니 비행기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러다 시장이 길 건너 있다는 걸 떠올리고 발걸음을 멈췄다.
“아 참. 집에 과일이 없지.”
오랜만에 시장 구경도 하고 싶었다. 예서는 마음을 가볍게 추스르려 애쓰며 신호등 앞에 섰다. 기분 탓일까. 아까까지 몰아치던 때 이른 찬 바람이 잦아든 것 같았다.
시장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문자 알림음에 휴대폰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익숙한 발신자가 액정 위로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