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79)화 (80/124)

<79화>

한주혁은 단 몇 마디로 둘 사이의 관계를 놓아 버렸다. 먼저 돌아선 건 그녀였지만 결국 그렇게 만든 건 한주혁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가장 큰 환희와 절망, 그 상반된 두 감정을 교차시켜 가하며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수 있는지.

하지만 이제는 다 부질없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미 제 발로 그 관계에서 걸어 나왔고, 다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배가 꿈틀대는 미세한 감각에 예서가 선잠에서 깨어났다. 사랑이가 방금 움직인 것 같았다.

착각인가…?

예서는 부스스한 머리를 매만지며 노트북 앞에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켰다. 윗옷을 습관적으로 가슴까지 올리는 손끝이 둔했다. 아직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완만한 곡선조차 보이지 않는 배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사랑아. 엄마가 너무 열심히 일하다가 깜빡 졸았나 봐. 잠깐 모과차나 마시면서 쉬어야겠다.”

그녀는 옷을 내리며 엷게 웃었다. 오후 정기검진 전에 오늘치 분량을 다 뽑아 놓으려다 보니 조금 무리하긴 했다. 지난주 출판사에 정식 연재를 위한 수정본 할당량을 보낸 뒤 일주일은 푹 쉴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또 다른 이야기를 구상하느라 며칠째 책상 앞을 떠난 적이 없었다.

오늘은 위통도 거의 없었고 배가 당기는 복통도 없었다. 예서는 따뜻한 차를 타서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이웃 노부부가 살았던 구옥은 집안 곳곳에 고양이의 흔적이 가득해 낡아빠진 집은 한결 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군데군데 찢겨나간 벽지에다, 소파와 방석은 발톱에 해지고 닳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정감이 넘쳤다. 사람 사는 온기가 집 전체를 휘돌고 있어서, 그녀 혼자 머무는 곳인데도 삭막하진 않았다.

“사랑아, 우리도 나중에 고양이 키울까? 아니면 강아지?”

찻잔을 내려놓고 배를 부드럽게 둥글리듯 쓰다듬었다. 강아지, 고양이 둘 다 무척 좋아했지만 키워 본 적은 없었다. 엄마와 쌍둥이 오빠 정우는 털 알레르기가 있는 데다가 동물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너만 참 유별나게 털 달린 짐승을 좋아하더라. 돌아가신 니 아빠도 별로 관심 없으셨고, 우리 식구 다 질색하는데.

그녀만 돌연변이라는 듯 핀잔을 주던 엄마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도 반려동물이나 식물, 풀 한 포기, 그 어떤 생명체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긴 사람에게도 진실된 관심이 없었던 남자였다. 결혼이 예정된 여자에게까지.

벼려진 날에 심장이 베이는 것 같았다. 예서는 아픈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이제 내 가족은 우리 사랑이뿐이야.

사랑이는 그녀를 닮아 동물을 좋아할 것 같았다. 딸이든 아들이든 그저 건강하게만 태어나 주길 바랐다. 그럼 엄마로서 최선의 최선을 다할 결심이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못 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막 배 속에 들어섰을 뿐인데 이렇듯 강한 모성애를 느끼다니. 하지만 그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어쩌면, 세상이 다 그녀에게 등 돌리고 버려진 것 같은 현재의 상황 때문에 더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사랑아. 엄마는 네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 줄 거야.

아낌없이 애정을 퍼붓고, 예쁘고 좋은 걸 더 많이 보고 자랄 수 있도록 세상의 나쁜 것들로부터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어줄 것이다. 아이가 잘되기만을 소망하며 진심을 다해 행복을 빌어주고 힘닿는 데까지 돕고 싶었다. 그녀가 받지 못한 몫까지.

예서는 벽에 걸린 시계로 눈길을 주었다. 이제 슬슬 병원에 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는 노트북을 닫고 낡은 합판 책상 앞에 붙여둔 종이를 몇 초간 다시 훑어보았다.

새하얀 백지 위에는 화려한 핀블록과 하프그립, 핑거링과 사이드링으로 장식된 소드가 종류별로 다양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현대와 과거를 오가는 인물들의 전투씬에서 등장할 최첨단 무기들도 있었다. 막 새로 구상한 이야기를 위한 자료들이다.

-솔직히 수상이 되었다고 해도 진심으로 응원하진 않았을 거야. 편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난 소설이나 창작처럼 뜬구름 잡는 일에는 회의적이야. 그 직업군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너에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연달아 낙선하는 결과를 보면 더더욱.

심장이 다시 덜컥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따끔한 통증이 일어났다. 언제 떠올라도 무지근하니 아팠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그 시니컬하던 독설이 더는 아무 힘도 없게 될지. 아니, 언제쯤 뇌리에서 온전히 잊히게 될까.

예서는 스카프를 단단히 두르고 덜걱거리는 현관문을 열었다. 아직 10월 중순인데도 오늘따라 바람이 꽤 거셌다.

파란 슬라브 지붕을 얹은 벽돌집은 꽤 낡고 삭아 있었다. 바다 쪽에서 태풍이라도 불어오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담벼락과 외부는 그나마 하얗게 페인트칠을 새로 해서 추레하진 않았지만 안쪽은 세월의 더께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랑이와 단둘이 지낼 수 있는 유일한 거처이자 안락한 공간이었다. 아직 제세공과금을 제외한 상금이 들어오지 않아 통장 잔고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고모가 김해공항에서 내민 봉투를 그냥 받을걸, 뒤늦게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예서는 마음을 다잡고 집을 나섰다.

병원행 버스가 다니는 정류장 앞, 초로의 편의점 여주인이 알은척을 했다. 예서는 엷게 웃으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이 추운데 어데 가노. 아, 병원?”

“네, 정기검진이 있어서요.”

“우짜노, 버스 방금 막 지나갔는디. 추운데 택시 타지. 마, 얼마 안 걸린다 아이가.”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바로 앞에서 경적이 울렸다. 초로의 남자가 뒤에 타라고 턱짓해 보였다.

“갱해이 사촌 누나 아이가. 병원 간다꼬? 마침 시장 쪽에 가는 길이니 타소, 마.”

“아… 그래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예서는 가게 주인에게도 꾸벅 인사해 보인 뒤 철물점 주인 차에 올랐다. 남부의 소도시 이웃들은 무뚝뚝했지만 정감이 넘쳤다. 아무래도 돌아가신 할머니의 손녀이자 고모 민자영의 조카이기 때문일 터였다.

“갱해이 가는 군대서 잘 있나 모르것네.”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난주에도 통화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지 않대요.”

“제대하고 오면 이제 그 아도 서울에서 취직을 하든가 미국으로 도로 가든가 하겄구만. 하기사 젊은 아가 여기 있어 봐야 뭐 하겄노. 큰 데 나가서 일해야 안되겄나. 우리 집 보리문디 글마도 졸업하고 서울 간다고 벌써부터 노래 부르고 자빠졌다 아이가. 쯧.”

“네….”

예서는 남자의 말에 엷게 웃었다. 보리문디라 칭하는 대학생 딸이 철물점 주인 부부의 금지옥엽 막내딸임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공항에서 고모가 건넨 말이 떠올랐다.

-휴대폰 번호 새로 바꾼 거, 엄마에겐 알렸니?

-아뇨, 아직…. 외할머니께는 알려드렸어요.

-그래, 조금 쉬다가 마음 좀 풀리면 네 엄마에게 연락해. 당장 화해하긴 어렵다 해도 딸이 어디 사는지는 알아야지. 무슨 일로 그렇게 크게 틀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러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마음이 없었다. 고모에게 속속들이 다 말할 순 없었지만, 정말로 개의치 않을 거란 사실을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었다. 정우보다 잘되지 않는 한, 모친은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쓰라림이 가슴에 퍼져나갈 때쯤 차는 시장 맞은편의 병원 건물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예서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는 여의사와 잠시 얘기를 나누고 다시 초음파 검사실로 들어섰다.

***

이경은은 시외버스를 한참 타고 도착한 외곽 읍내에서 다시 택시를 잡았다. 10년 전만 해도 소위 방석집, 꽃마차 집이 즐비하던 지역은 최근 재개발이 시동을 걸면서 여기저기 공사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참, 격세지감이라더니. 그렇게 허름하던 여기도 이렇게 변하네.”

택시는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 오래된 집들이 드문드문 자리한 동네로 들어섰다. 찢어진 천막과 낡은 집들을 지나 다다른 언덕 위에는 3층짜리 번듯한 집이 자리해 있었다.

언뜻 봐서는 주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숙박시설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커다란 대문에는 신당이라 짐작될 만한 한자어와 붉은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어머. 그새 리모델링 했나 봐? 외관이 새집처럼 아주 달라졌는데?”

택시에서 내려 초인종을 누르자 눈에 익은 초로의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주었다. 오래전부터 신당의 살림을 관리하는 일꾼이었다. 그녀는 이경은을 1층 방문객용 응접실에 안내하며 뜻밖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네? 연꽃 선녀님이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시라고요? 어쩌다가….”

“풍을 맞으셔서 말이에요. 선녀님도 이제 나이가 있으시니 여기저기 편찮으실 때가 됐지요. 그래도 신어머니가 끝까지 보살펴 주실 것이니 곧 회복해서 돌아오실 겁니다.”

“풍이라면, 뇌졸중 수술을 하신 거예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럼 전화로 예약할 때 그 얘기는 왜 안 하셨어요? 그럼 퇴원하시고 좋아지면 왔을 텐데.”

“선녀님께서 거둬서 키워오신 다른 애기 무당님이 계세요. 홍련 보살님인데 아주 신통해서 단골손님들이 점점 늘고 있답니다. 이왕 오신 김에 오늘은 홍련 보살님을 뵙고 가시는 게 어떠실까요.”

“네? 하지만….”

“복채는 특별히 약사님만 할인가를 적용시켜 드릴게요.”

여자는 다른 쪽 응접실에서 대기 중인 손님들이 들을세라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경은은 결국 20분 뒤 홍련 보살과 마주 앉았다. 어딘가 연꽃 선녀와 닮은 생김새에 나이도 많아봤자 20대 중후반일 것 같았다.

이경은은 예전부터 연꽃 선녀가 쭉 말해왔던 쌍둥이의 운세, 그리고 최근 자신에게 닥친 선택의 기로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무슨 소리야? 그 반댄데.”

무속인은 둘의 사주를 한참 보더니 탁상을 소리 나게 내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