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웃기지 마.
냉랭하고 싸늘했던 비소가 뇌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제 몸을 거칠게 끌어당겼던 억센 손의 감촉, 젖은 숲 냄새 같은 체취 또한.
-넌 어디도 못 가.
예서는 진료실을 나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렇게 하면 몸 안 가득 들어와 움직이던 익숙한 열기, 늘 그랬듯 고통부터 앞섰던 흥분과 쾌락의 기억을 지울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이었구나. 어딘가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정신없이 그녀 안으로 파고들어 뒤흔들었던 때. 그녀가 편지로 확실한 이별을 고하기 직전 가졌던 관계가 이렇게 귀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앞이 캄캄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는 동안 가방 안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예서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부재중 통화를 확인했다. 그중에는 서울에서 막 도착한 손님도 있었다.
***
산부인과 아래층 카페에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도 잠시, 예서는 차오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보였다. 한참을 흐느낀 끝에 손수건에 가려진 눈가며 코가 붉게 젖어 있었다. 조수민은 그녀 옆으로 옮겨 앉아 한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저 한숨만 푹푹 나왔다.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고 친척 사무실에서 한참 자리를 잡던 중, 모처럼 밀린 휴가를 써서 얼굴 보러 여기까지 내려왔건만.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인지.
아니지. 날벼락은 무슨 날벼락. 생명 자체는 소중한 법인데…. 차라리 잘 된 거 아닌가? 이걸 기회로 둘이 다시 잘 될 수도 있잖아.
염려에 차 있던 수민의 눈이 반짝였다. 가족과 잠시 거리를 두는 건 그녀도 백 번 동의했다. 그동안 약국에서 일하는 내내 이 약사의 아들 편애가 지나치다 생각해 오긴 했었다. 그녀도 오빠들 위주인 집에서 태어나 자라 자식 차별엔 이골이 나 있는데도 이 약사의 경우는 괴이할 정도로 심했다.
그런데 그게 다른 것도 아니고 무속인의 점괘 때문이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세상에,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무속인의 말을 믿고 하나는 금지옥엽 오냐오냐, 다른 하나는 그렇게 구박을 해? 그것도 이렇게 착하고 나무랄 데 없는 딸을. 진짜 정나미 떨어진다.
욕이 입술 위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예서의 모친인지라 소리 내서 욕을 내뱉을 순 없었다.
아무튼 저 같으면 그런 엄마, 그따위 가족과는 절연해서 다신 상종하지 않을 터였다. 보란 듯이 한주혁과 잘돼서 떵떵거리며 살아야지! 아니, 잠깐. 한주혁이랑 끝냈다고 했었지.
“초음파도 확인했어?”
수민은 예서의 눈물이 잦아들 때쯤 운을 뗐다. 예서는 코를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 주쯤 보일 거래요. 아직 좀 일러서….”
“그렇구나. 나도 임신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니….”
그리고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약혼자한텐 아직 연락 안 했지?”
“네, 연락 안 할 거예요.”
“…….”
“이제 완전히 끝난 사이니까. 선배도 받아들이고 더는 연락이 없으니까요.”
“뭐? 그럼 아이는! 애는 어떻게….”
“저 혼자 키울 수 있어요.”
예서는 손수건을 아래로 내리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언니를 기다리는 내내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길은 없어요.”
다른 방법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이미 생긴 아이를 낳아서 최선을 다해 잘 키우는 것, 그 외의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과 염려는 있었다.
어릴 적부터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옛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럼 그녀는 처음부터 자격 상실이 아닐까, 부모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않을지 미리부터 자괴감에 한참을 시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녀가 받지 못한 것만큼 더 많이 사랑하고 애정을 듬뿍 줄 자신이 있었다. 비록 엄마에겐 천덕꾸러기였지만 아빠와의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으니까.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쌍둥이를 똑같이 대하고 사랑했다. 그녀에게 베푼 애정은 지금도 가슴 한쪽에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추억은 처음 한주혁을 좋아하게 된 배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일 맛있고 좋은 건 다 그녀에게 몰아주고 많이 먹으라고 챙겨주던 모습, 그 다정하고 세심한 면모 위로 어린 시절 아빠의 얼굴이 겹칠 때가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잘 키울 거예요. 최대한 아빠의 빈자리를 느낄 수 없게….”
“그래. 사회가 변해서 요즘 비혼모도 많아지고, 너도 이제 정식으로 데뷔해서 돈 걱정도 없을 거니까. 하지만….”
수민은 잠깐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어떡할 거야? 무슨 아침 드라마 같은 얘긴 안 하고 싶지만, 보통 집안이 아니잖아. 쭉 모르고 살면 모를까,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리가….”
뭣보다 사람 자체가 보통이 아니니. 솔직히 말하면, 그날 카페에서 처음 봤을 때 진짜 무서웠어.
수민은 그 말은 가까스로 삼켰다. 어디까지나 제 느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예서와 마주 보고 환한 미소를 짓기 직전, 제 시선과 마주쳤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었다. 심장이 얼어붙는다는 느낌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특별히 험악한 눈초리도 아니고 조금 날카로웠을 뿐인데도 그랬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쌔한 뭔가가 있었다.
이런 말 하면 내가 미친년 같지만… 날 질투하는 눈빛이었다고 해야 되나.
수민은 예서의 손을 꼭 잡고 토닥이며 실소를 삼켰다. 그녀가 남자도 아니고, 같은 여자인데 무슨 질투를 할까 싶었는데도 그랬다. 엄청난 소유욕이 느껴졌달까.
“예서야. 네가 왜 그렇게까지 마음을 먹게 됐는지 이해는 돼. 충분히 되지만….”
그래도 어느 한쪽의 마음이 식어서 파혼하는 것도 아니니 아기가 생긴 이상 다시 합치는 게… 아냐. 너무 위험한 남자잖아. 아니, 그래도 예서에게만은 끔찍하고 돈도 엄청 많고 어마어마한 집안인데다가 얼굴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일단 시간을 좀 갖고 다시 생각해 봐. 응?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여자 혼자 아이 키우면서 사는 게 보통 일이겠어?”
게다가 엄마나 가족에게 기대고 의지할 수도 없는데.
“괜찮아요.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그… 소설에 대한 것도 처음에는 반대했다지만 결국은 널 응원해주지 않을까? 나만 해도 처음엔 뜬금없이 무슨 웹소설? 그것도 웬 판타지? 그랬지만 지금은 완전 네 팬이 됐잖아.”
“…….”
“그러니까 한 본부장도 분명히….”
“언니.”
예서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한 차례 오열을 토해내고 나니 조금은 진정된 얼굴이었다.
“선배랑 나는 이제 끝났어요. 완전히.”
담담한 어조가 다시 이어졌다.
“이제는 아무 감정도 없어졌어요, 정말로. 내가 왜 그렇게 선배밖에 보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목을 매고 매달리고 사랑했을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수민은 말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 덤덤해서 오히려 더 안타깝게 들렸지만, 깊이 와닿지는 않았다. 아무 감정도 없어진 게 아니라 없어졌다고 자꾸만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건 아닐까.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언니. 오자마자 붙잡고 울어대서 힘들었죠…. 이제 밥 먹으러 가요. 먼 길 와서 배고플 텐데….”
“너 먹고 싶은 데로 가자. 지금 딱 떠오르는 게 뭐야?”
“전 괜찮아요. 아직 입덧도 안 하는 것 같으니까….”
“나야 다 잘 먹으니까 현지인인 네가 정해. 난 뭐든 오케이.”
잠시 후 두 사람은 감자탕과 묵은지 뼈다귀 찜으로 유명한 맛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앞날은 막막했지만 수민이 함께 있어 줘서 마음속 무겁던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았다. 속을 다 드러내고 의논할 상대가 지금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
주혁은 화상 미팅을 끝내고 김 비서가 보낸 파일을 확인했다. 여성병원으로 향하는 민예서의 뒷모습, 한참 뒤 옛 약국 직원과 식당에 마주 앉는 민예서의 옆얼굴이 차례대로 화면에 떠 있었다. 그는 지체 않고 김 비서의 번호를 눌렀다.
“병원은 무슨 일로 간 건지 알아봤습니까.”
-저희 그룹 의료재단이라면 진료 내역에 바로 액세스할 수 있습니다만, 타지의 개인 병원은 환자의 개인 정보상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한 시간만 기다려 주시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됐어요. 그럴 필요까진 없고….”
전부터 있던 생리 불순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빨간 앞치마를 가슴에 두르고 엷게 미소 짓는 화면 속 얼굴을 주시했다.
한참 울어 눈이 빨개진 데다 조금 수척해 보이긴 했지만, 어디 안 좋은 데가 있었다면 이렇게 웃을 것 같지는 않았다. 조수민 앞에서 펑펑 울었던 건,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던 탓이겠지.
주혁은 시선을 거두고 두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 없이도 환하게 웃는 얼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호감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괴로움에 우는 꼴을 보길 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네 곁에 아무도 없다면. 완전히 혈혈단신, 고독하게 버려진 새처럼 그 타지에서 청승맞게 처박혀 있다면 어떨지.
그럼 이 좆같은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