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77)화 (78/124)

<77화>

이경은이 대답이 없자 한주혁은 무감하게 그녀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그럼 동의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김 비서, 여기 진열된 약 전부….”

“아니, 됐네! 돈 자랑 하러 온 걸 아닐 테고. 그런데 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뭐 있긴 한가? 둘이 헤어졌다며. 그래서 상견례도 갈 필요 없다고 예서가 지난달에….”

“그런 일 없습니다.”

한주혁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어른에 대한 예우는 꼬박꼬박 붙이는 존칭에만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헤어질 일, 없습니다.”

“뭐? 하지만 예서는….”

“그 일 때문에 뵙자고 온 겁니다. 어떡할까요. 여기서 이대로 계속 말씀드려도 됩니까?”

그가 구석에 뻘쭘하니 서 있는 직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시선이 마주치자 펄쩍 뛸 듯 뒤로 물러섰다. 이경은은 혀를 차곤 문 너머를 턱짓해 보였다.

“그럼 시간도 없고 하니 옆에 카페로 가지.”

“그러시죠. 먼저 가 있을 테니 10분 후에 오십시오.”

한주혁은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더 거만하고 오연한 몸짓으로 약국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제야 직원이 휴우,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닌 척 잔뜩 굳어 있던 이경은의 어깨도 눈에 띄게 이완되어 있었다.

***

이경은은 제조하던 약을 마무리 짓고 15분쯤 지났을 때 카페로 건너갔다. 그제야 한주혁이 10분 후에 오라던 이유를 깨달았다.

카페는 주인도, 손님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문에는 ‘금일 내부 사정으로 일찍 문을 닫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손글씨로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는 찻잔 두 개가 놓인 한가운데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한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꼿꼿이 등을 폈다. 하지만 고개를 다시 숙이거나, 치켜올린 턱을 내리진 않았다. 실내가 너무 고요해 숨소리마저 들릴 지경이었다.

맞은편에 앉는 이경은의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우와 비교하며 품었던 뒤틀린 질투심이 이제는 조금 다른 감정으로 변모해 있었다.

만약 연꽃 선녀님의 점괘만 아니었다면…. 아니, 정우와 예서가 서로 바뀌기만 했더라도. 예서가 좀 처지고, 우리 정우가 예서만큼만 됐더라면. 적어도 이 남자의 반만이라도 잘 났으면 내가 이런 마음을 품을 이유도 없을 텐데.

아쉽고 아까운 마음도 못내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만한 사윗감을 못 마땅해하고 반대할 이유가 하등 없으니까. 하지만 정우를 생각하면 역시 엮이지 않는 편이 낫다.

“예서가 요즘 안 좋은 일이 있어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을 뿐 저희 결혼,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상견례 날짜는 다시 연락드릴 거고요.”

“글쎄, 내 보기에 예서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은데.”

단둘이 되자 한층 더 오만해진 눈빛에 이경은이 내심 당황했다. 그 당혹감을 숨기느라 말이 더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둘이 아주 크게 싸운 모양인데 혹시 예서가 어딨는지 물어보러 온 건가? 만약 그렇다면 알려주긴 곤란해.”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의 입가에 비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찰나였지만, 상대방에게 무례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의 시간은 되었다.

“예서 어딨는지 여쭤보러 온 게 아닙니다. 남에게 구차하게 정보를 구걸할 입장은 아니라서요.”

이경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미 알고 있단 소린가? 설마, 다시 합칠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예서, 알고 보면 고집이 보통 센 애가 아니니 되돌리긴 어려울 거야. 참을성이 보통이 아닌 애라 잘 견디는 만큼 한번 틀어지면 뒤도 안 돌아보는 면이 있거든.”

“잘 아시는군요. 그걸 아시는 분이 딸에게 그래 오셨습니까?”

“뭐…?”

이경은이 이맛살을 구겼다. 딸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고운 선, 균형 잡힌 이목구비가 한순간 보기 싫은 주름으로 변했다.

“자네, 지금 나한테 뭐라고 그랬나?”

이 불손한 태도는 대체 뭐지? 예비 장모한테. 아니, 어차피 둘이 다시 이어지진 않을 테니 장모가 될 일은 없겠지만.

“예서가 지금 왜 힘들어하는지- 당분간 집과 연락을 끊기를 원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시는군요.”

그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는 웃음기와 여유 모두 싹 가셔 있었다. 주혁은 예서를 통해 알게 된, 이경은의 맹신에 대해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해 읊었다. 굳이 세세하게 풀 필요도, 가치도 없었다.

그가 말을 다 마쳤을 때 이경은은 입을 떡 벌린 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설마 민예서가 그 대화를 죄다 들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차라리 민정우가 들었으면 모를까.

“그, 그건….”

“그래서 뵈러 왔습니다. 정중히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주혁은 경악해 마지않는 이경은의 웅얼거림을 단번에 자르고 제 용건을 말했다.

“예서와 인연 끊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어차피 그렇게 믿으실 바에는 아예 교류 없이 안 보고 사는 게 낫다고 봅니다. 민정우와 멀리 떨어뜨려 놓을 겸.”

“…….”

“예서와 완전히 연락 끊고 남처럼 지내 주시죠. 외람된 말씀이지만, 예서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존재는 그 아이에게 상처 외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뭐라고? 아니, 가족도 아닌 자네가 뭔데… 무슨 권리로….”

“남편 될 사람으로서의 권리입니다. 앞으로는 제가 예서의 유일한 가족이 될 테니까요.”

“…….”

“상견례 없이 저희 식구끼리만 조용히 식을 올리기로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그는 옆자리에 놓여 있던 서류철을 집어 들어 이경은의 앞에 놓았다.

“사위로서 마지막 예는 지키겠습니다.”

이경은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로 입만 뻐끔거리며 서류철을 내려다보았다. 빚 상환 및 전반적인 유학 비용 관련 자료들이었다.

“예서와 절연하는 데 동의하시면 앞으로 민정우의 유학비 모두 제 선에서 지원해 드리지요. 그동안 유학 뒷바라지하느라 생긴 대출, 빚, 모든 채무도 상환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정우의 유학비란 말에 잠시나마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앞으로 5년 동안 그 약속을 지키시면 현재 제 소유인 약국 건물도 약사님 명의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이경은의 눈이 좀 더 커졌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건물주에게 재개발 프리미엄 시세보다 훨씬 더 얹어주고 매수를 한 게 보름도 채 되지 않았다. 민예서가 편지만 남겨둔 채 지방으로 내려가자마자 바로 취한 조치 중 하나였다.

“그럼 잘 생각해보시고 제 비서에게 연락 주십시오.”

서류 맨 앞장에 명함이 꽂혀 있었다. 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얼떨떨하니 앉아 있는 이경은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자, 잠깐만!”

돌아서기 직전 이경은이 다급하게 그를 소리쳐 부르며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내 딸인데 인연을 끊으라니? 그럼 아예 연락도 하지 말고, 만나지도 말고, 서로 나 몰라라 살라는 건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네가 왜 그런 말을….”

“그럼 민정우가 잘못돼도 괜찮습니까? 돌아가신 예서 아버지처럼.”

“뭐라고…?”

이경은이 숨을 들이켜며 파르르 떨었다. 그런 가정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지 않으시겠죠, 당연히.”

그러니 쌍둥이 중 하나만 바라보고 사세요. 그 무속인이 했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말이죠.

그는 남은 말을 눈빛으로 충분히 전달하고 돌아서서 카페를 나왔다. 오늘을 끝으로, 다시는 마주할 날이 없기를 바랐다. 좆같은 천륜이랍시고 다시 민예서에게 접근하는 날에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대기 중인 차에 올랐을 때 픽, 비소가 터져 나왔다.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가증스러운 새끼. 비열한 자식.

다른 진실은 일부러 한 마디 언질조차 하지 않았다. 민예서가 그와 결별하길 원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다는 말은 토씨 하나 꺼내지 않은 것이다.

상관없었다. 지금은 민예서의 은둔, 다시 미뤄진 결혼에의 귀책 사유가 필요했다. 그의 몫까지 뒤집어쓸 귀책 사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차가 독서당로를 지나 집 쪽으로 꺾어질 때였다. 막 게이트를 통과하는 박성준의 차가 보였다. 같은 부지에 사는 여자친구 집에 들른 모양이었다.

주차장에 다다랐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박성준이었다. 주혁이 그대로 차를 몰고 지나치는 걸 본 모양이었다. 성가셔서 받지 않자 벨은 계속 울렸다. 그는 차 안에서 내리지 않은 채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왜 못 본 척 지나치고 그러냐, 서운하게.

“미리 말해두는데 들어올 생각 마. 이틀 밤 꼬박 새워서 너 상대할 정신 없어.”

-어쩐지! 일에 미친 한 본부장님께서 왜 훤할 때 들어오나 했다. 다른 게 아니라….

“넌 일 안 해? 아직 아웃된 건 아닐 테고.”

-나 오늘 새벽부터 외근 나갔다 이제 온 거거든? 너만큼은 아니라도 나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고. 그 얘기만 하려고 전화한 거야. 예서한테 축하한다고 전해 줘! 내가 직접 전화하려고 했는데 계속 꺼져 있더라고. 별일 없이 잘 지내는 거지? 식은 언제쯤….

“뭐…?”

주혁은 전화를 끊으려던 손을 멈췄다.

“축하라니. 무슨 축하?”

-무슨 축하긴 무슨 축하야. 당연히 공모전 수상한 거지! 이제 작가로 꽃길만 걸을 거 아니냐고.

“…….”

-왜 말이 없어? 설마 몰랐을 린 없고.

“끊어.”

주혁은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고는 공모전 홈페이지를 화면에 띄웠다. 3주 전에는 없었던 공지 사항을 빠르게 훑고, 정정된 수상 내역으로 시선을 내렸다. 예서의 필명과 작품명이 우수상 부문에 새로 떠 있었다.

주혁은 화면을 담담히 내려다보았다. 일견 아무런 동요도 엿보이지 않는 눈이었지만 절대 무감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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