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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76)화 (77/124)

<76화>

짐을 최대한 정리해 대문 밖에 내놓곤 경현을 기다릴 때였다. 낯선 중형차가 골목 어귀를 비집고 들어와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최인하가 내리자 예서가 눈을 크게 떴다.

“인하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

“어. 어차피 이번 주에 삼촌 댁에 갈 일이 있어서. 우리 외가도 창원이잖아. 마침 너 이사한다고 들어서 경현이랑 같이 도와주러 왔어.”

“뭐? 하지만… 보다시피 짐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가구도 다 집에 원래 있던 거라….”

“그래도 자잘한 짐이 꽤 많은데?”

최인하의 어깨 뒤로 경현의 중고차가 보였다. 그는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반가운 듯 소리쳤다.

“인하 형! 진짜 왔어요? 우와!”

그는 차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일손을 하나라도 덜게 생겼으니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반면 예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최인하와 그의 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마워, 오빠. 너무 고맙긴 한데… 회사는 어떻게 하고 왔어?”

아무리 아버지 회사라도 평일에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걸까. 아저씨는 아들이니 책잡히지 않으려면 오히려 직원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뭐라 하실 텐데.

“월차 냈으니까 걱정 마. 그리고 아까 그랬잖아. 어머니 심부름으로 삼촌 댁에 갈 일이 있다고. 그럼 일단 짐부터 싣자. 아, 경현아. 무거운 건 내 차에 집중적으로 실어.”

“OK. 누나는 저만치 물러나 있어. 둘이 알아서 할게.”

짐 싣는 작업은 순식간에 끝났다. 세 사람은 어느새 두 차에 나눠타고 영동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중간에 여주 휴게소에 들러 우동과 반미 샌드위치를 다 같이 먹을 때까지만 해도, 넉살 좋고 활달한 두 남자 덕분에 마음이 다소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보자 가슴이 다시 갑갑해졌다. 누군가의 얼굴이 다시금 뇌리를 가득 채우며 눈물이 울컥 터질 것 같았다. 화장실에 혼자만 있었다면 정말로 울어 버렸을 것이다.

정신 차려, 민예서. 갑자기 왜 이래.

어금니를 꽉 물고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다. 스스로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우울증 환자 같았다. 다시 아랫배가 아팠다. 스트레스성 복통이 전보다 더 잦아지고 있었다.

선배는 지금쯤 귀국했을까.

그럼 그 또한 제 의향을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받아들일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그렇게 각자의 궤도를 찾아가겠지.

선배는 선배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질 아픔을 감당하는 건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

열흘 만에 귀국한 주혁은 곧바로 한남동 집으로 향했다. 오롯이 혼자 있고 싶어 직원들을 일찌감치 퇴근시킨 실내는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고 완벽하게 고요했다. 너무 조용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열흘 전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침실에 들어갔다가 거실로 돌아 나왔다. 티테이블 위에는 그동안의 우편물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유 대리가 늘 서재 책상 위에 올려두곤 했는데 깜빡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이내 알았다.

우편물 맨 아래에 주혁 선배라고 적힌 종이가 깔려 있었다. 반으로 접힌 편지를 펼치자 민예서의 손글씨가 보였다. 눈에 익은 단정한 필체였다.

[주혁 선배.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어제 제 말 그대로예요. 선배와 저는 함께 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동안 잘 해줘서 정말 고마웠고 반지와 선물, 월셋집 보증금 모두 직접 가져다 놓을게요. 이런 식으로 끝내는 게 경우가 아니란 건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어른들께도 죄송하다고 잘 말씀드려 주세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식으로 찾아뵙고 사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야가 부옇게 흐렸다. 심장이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다 어느 순간 곤두박질친 것처럼, 아무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피가 거꾸로 솟다가 그대로 흐름을 멈춘 것만 같았다.

그는 편지를 집어 든 채 서재로 향했다. 예상대로 책상 위에는 커다란 상자와 익숙한 로고의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굳이 안을 보지도 않았다. 그동안 출장길에 사 온 것, 기념일 선물과 약혼반지, 여러 보석류와 블랙 카드가 눈에 선했다. 그 알량한 보증금도 은행에서 바로 수표로 바꿔 봉투에 가지런히 넣었겠지.

그게 민예서니까. 마지막까지 최대한 예를 갖추고 격식을 차리는 깔끔한 성격. 빌어먹을 계집애.

종이 쪼가리가 손바닥 안에서 처절하게 뭉개졌다. 민예서가 눈앞에 있었다면 편지 대신 그녀의 목이 틀어 잡힐 수도 있었다.

주혁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꽉 말아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폈다. 그러고는 엉망으로 구겨진 종이를 그대로 책상 위에 떨어뜨렸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려다 손을 멈췄다.

죄다 엉망으로 짓밟고, 망가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성질대로 했다가는 어떤 결과가 될지 불 보듯 뻔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끄트머리를 물고는 김 비서의 번호를 눌렀다.

-네, 본부장님.

“민예서는 지금 어딨죠? 아직 거기 있습니까.”

차분하게 연기를 내뿜는 두 눈에는 핏발이 서려 있었다. 어느 때보다 더 이성적이고 초연한 동공은 얼어붙은 호수 밑바닥 같았다.

***

달이 바뀌자 일교차가 부쩍 커졌다. 야트막한 건물 사이사이. 나무며 잎새마다 가을빛이 만연해 있었다.

생리일이  지난 걸 깨달았을 때는 서울에서 내려온 공모전 플랫폼 담당자와 미팅을 마쳤을 때였다. 정확히는 김해공항 리무진 버스 터미널 앞에서 담당자를 배웅하고 돌아섰을 때였다.

생리 주기가 원래 불규칙적인 걸 감안해도 시간이 꽤 된 것 같았다. 아랫배와 음부 쪽에 통증이 일며 배가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복통에 속이 메슥거리는 증상까지 더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이상해. 요즘 잠도 부쩍 많아지고…. 몸이 자꾸 피곤한 것 같은데.

시내에 나온 김에 시가지의 대형종합병원에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병원에 도착해 보니 대기 인원이 너무 많아서 당일 진료를 보기엔 어려웠다. 예약하고 다시 오거나 동네 여성병원을 방문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다행히 집으로 가는 내내 속은 편안해져 있었다. 그때만 해도, 최근 극심했던 스트레스로 생리 불순 질환이 악화된 거라고만 여겼다.

***

이경은은 약사 가운 차림으로 제조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카운터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직원이 다소 격앙된 어조로 남자 손님의 내방을 알려줄 때만 해도 도매 업체 영업 사원일 거라 생각했다.

“한 본부장…?”

하지만 전혀 뜻밖의 방문객이 와 있었다. 어찌나 크고 건장한 체격인지 좁은 약국 안이 순식간에 꽉 차게 느껴졌다. 한주혁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비서로 보이는 또 다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잠시 얘기 괜찮으실까요.”

깍듯이 예를 갖춘 어조였지만 어딘가 숨길 수 없는 독선이 엿보였다. 속을 읽을 수 없는 눈빛, 차분한 가면 너머 잘 벼려진 칼날이 번득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자네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어쩐 일이야? 예서도 없는데….”

긴장감을 숨기려다 보니 말이 더 무뚝뚝하게 나왔다. 한주혁은 떨떠름한 이경은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아예 문을 닫으시고 30분… 아니, 30분도 길군요. 20분 정도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문을 닫으라고? 그럴 필요까지는….”

“얘기가 끝나고 나면 심란하실 것 같아서요. 뭣하면 제가 지금 진열된 약은 다 사겠습니다.”

“심란할 거라고? 무슨 얘기길래….”

게다가 약을 다 사겠다니, 지금 누구한테 돈지랄을 하겠다는 거야? 재벌 집 아들이면 단가?

“지금 여기 있는 약을 다 사겠다고? 하, 원 참.”

이경은이 싸늘하게 웃었다. 정중한 척 어딘가 불손한 눈빛이었던 첫 만남 때도 그랬지만, 정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기껏해야 정우와 세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무슨 열 몇 살은 더 위인 것처럼….

그제야 한주혁을 향해 내내 품었던, 어렴풋한 거부감과 질투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정우와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벌써 굴지의 대기업 본부장이라니? 그저 운이 좋아 재벌 집에 태어난 금수저인 주제에- 처음부터 그런 편견을 품고 같잖다고 생각했었다. 작년에 예서와 셋이서 만나기 직전까지는 그랬다.

막상 제 눈으로 보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에 더 배알이 꼴렸다. 딸이 데려온 약혼자는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 미국에 있는 정우를 생각하니 위가 쓰릴 것처럼 배가 아팠다.

저 애에 비하면 우리 정우는….

금쪽같은 제 아들은 아직도 미국에서 대학 졸업도 못 하고 몇 년째 영어도 지지부진해, 등록금에 생활비에다 튜터 비용으로 등골을 빼먹고 있었다. 자신감도 없고 소심하기 짝이 없어, 낯선 사람 앞에서는 우물쭈물 말까지 더듬는 아들이다. 그런 정우에 비하면 한주혁은 말 한 마디, 동작 하나하나가 어른스럽고 품위가 넘쳤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차원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미칠 듯 질투가 났다. 만남 이후, 그의 비범함과 수완을 둘러싼 항간의 소문을 접했을 때는 더더욱.

예서도 덩달아 미웠다. 적당히 잘난 사람이면 몰라, 제 오빠 기죽으라고 어디서 저런 사람을 꼬여냈단 말인가. 주제도 모르고. 송충이는 그저 솔잎을 먹어야 하는데 어디 저런 집안의 남자를 약혼자랍시고 데려와서….

역시 연꽃 선녀님 말이 맞다니까. 저런 인물을 사위로 들여 봐, 예서는 더 떵떵거리며 기가 살 거고 우리 정우만 박복하니 쭈그러지게 될 거야. 대단한 집안이랍시고 콩고물 떨어지는 걸 바라는 것보다는….

그보다는 역시 예서와 깨지고 혼담이 없던 일로 되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돈도 좋고, 콩고물도 욕심이 났지만 정우의 안위가 뭣보다 우선이었다. 정우가 잘못되면 돈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 정우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키고 끝까지 책임질 거야.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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