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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75)화 (76/124)

<75화>

정우와 사촌 동생 경현까지 다 같이 마당에서 놀 때였다. 정우가 툇마루 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엎는 바람에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닭을 푹 끓인 육수를 잠시 식힌다고 올려둔 것이었다.

예서가 툇마루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정우는 그 위에 올라가 펄쩍펄쩍 뛰었고 결국 육수의 반은 경현의 정강이에, 반은 땅바닥에 버리고 말았다. 마당은 한순간 울음바다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현은 병원으로 실려 가 화상 치료를 받았다. 정우는 어디 도망갔는지 저녁때가 될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작 혼이 난 건 아무 잘못도 없는 그녀였다. 뺨을 꼬집히고, 등짝을 세게 얻어맞고, 저녁 먹을 때까지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반성해야 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고모가 뒤늦게 그녀를 발견하고 일으켜 세울 때도 지금처럼 다리가 저려서 마비된 양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 아니, 와 아무 잘못도 없는 예서를 벌세우고 있노! 예서, 인나봐라. 왜. 다리 저려 안 움직이나. 이래 코에 침 발라봐라.

늘 서울말만 쓰던 고모는 거짓말처럼 시골집 울타리 안에서는 정감 있는 사투리로 돌변했다. 똑같은 말투라도, 그녀를 대하던 할머니와 고모의 어조는 너무도 달랐다. 그나마 고모 덕분에 그 서럽고 억울했던 기억들이 빠르게 퇴색되었을 것이다.

“예서야, 괜찮아?”

“응, 다리가…. 하하… 흐… 흐흑….”

웃음은 어느새 울음으로 변해 있었다. 최인하는 그녀를 부축해 복도 끝의 벤치에 앉혔다. 주위를 지나던 사람 중 예서의 흐느낌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은 없었다. 그들 모두 눈물과 한탄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곳 한가운데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예서는 최인하가 다시 가져온 새 냅킨에 코를 묻고 울음을 추슬렀다. 최인하는 그 옆에 앉아 그녀가 뭐라 말하기 전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사회인이 되어서일까, 확실히 학교 때보다 더 차분하고 듬직해진 것 같았다.

“괜찮아? 좀 진정이 됐어?”

예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초 후, 목을 가다듬고 감사의 말을 건넸다.

“고마워, 오빠.”

“그런 말 하지 마. 너랑 나 사이에.”

최인하는 한숨을 삼키며 목덜미를 느리게 긁었다.

“우리 여전히 오빠, 동생 하는 사이잖아. 몇 년 공백이 있긴 했어도. 네 소식 가끔씩 건너 건너 들었고…. 이번에 공모전 당선된 것도 축하해. 어제 동환이 통해서 들었어. 조만간 귀국하는 현주랑 새은이, 채린이, 다 모여서 축하 파티도 열어줄 거라던….”

그가 아차, 혀를 찼다.

“이거 비밀인데…. 미안하다. 못 들은 걸로 해주라.”

“응, 그럴게. 걱정하지 마.”

예서가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피식 웃었다. 갑자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학교 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소는 씁쓸한 침묵으로 변했다. 예서가 다시 운을 떼었다.

“나, 주혁 선배랑 파혼했어.”

아까 복도 끝에서 들었을 것 같았다. 어차피 그녀의 근황을 간간이 듣고 있었다면, 한주혁과 사귀다 약혼까지 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4년 전 그녀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노라고 그의 고백을 거절했을 때, 그 상대가 한주혁이란 것도 학교에 소문이 퍼진 만큼 이미 오래전에 유추했겠지.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하지만 이유가 뭔지 묻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서가 다시 정적을 깨뜨렸다.

“주혁 선배를… 정말 좋아했어. 내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해.

그 말만은 차마 내보낼 수 없었다. 소리 내서 말해 버리면 도저히 체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는 완전히 내려놓고 버려야 할 미련 덩어리가 꾹꾹 눌러놓은 심장 밖으로 튀어나와, 다시 일상을 뒤흔들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다 끝났어.”

“…….”

“예전에 어떤 영화에서 봤는데… 연인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묻더라.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그때 상대방 여자가 그랬어. 사랑하니까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서로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아무리 사랑해도 잘 안될 게 뻔하니까 이별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게 머리와 가슴으로 모두 잘 보이니까 더는 함께 할 수 없다고.”

그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비록 허구 속 가상 인물의 꾸며진 대사일 뿐이라도, 뼛속 깊이 새겨질 듯 절감되는 말이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반드시 이어질 수는… 없는 것 같아.”

다시 눈물이 차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서야.”

최인하가 무겁게 입을 열 때였다. 복도 건너편에서 그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경현이 보였다. 예서는 재빨리 눈물을 마저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오빠. 오랜만에 만나서 오빠 얘기는 하나도 못 듣고…. 이따 얘기하자.”

“그래. 난 잠깐만 바람 좀 쐬고 들어올게.”

그는 예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곤 문밖으로 나섰다. 그러다 다시 돌아서서 예서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그녀의 상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해 질 녘의 지중해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북쪽의 텔아비브 포트부터 그 아래 올드자파 구역까지 쭉 이어진 해변은 매초 석양빛에 물들어 색깔을 달리하고 있었다.

주혁은 라운지 창가에 걸터앉아 그 적요함을 잠시 즐겼다. 30분 뒤에는 백부와 도심으로 이동해 현지 정부 주관 벤처 캐피탈 인베스터 써밋 디너 리셉션이라는, 이름도 거창한 만찬에 잠시 얼굴을 비출 예정이었다.

SDK와의 계약을 애써 성사시킨 후에도 한가로울 틈이 없었다. 현지 기업가들은 협상하기에 매우 까다롭고 버거운 상대였다. 비즈니스 정신이 철저하고 시원시원하면서도, 언제든 구두 협의를 뒤집고 이쪽에 불리한 패를 내놓을 여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잔잔한 파도와 부드러워 보이는 모래사장을 한참 눈에 담다 알림음에 휴대폰을 열었다. 민예서의 근황을 담은 사진과 보고서가 전송되어 있었다. 요양원에 면한 병원의 빈소, 강옥순의 장례식 현장과 상복 차림의 민예서가 하나씩 시야를 채웠다.

하나로 질끈 묶은 긴 머리, 화장기 없이 투명한 얼굴과 목이 화면 너머로도 부러질 듯 가냘파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환희와 쓰라림, 둘 다 가슴에 번졌다. 그렇지 않아도 공모전 탈락에다 그의 직설적인 언사로 상심이 클 텐데 장례식에까지 가 있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굳이 갈 필요도 없는 곳에는 왜 가서 고생인지.

화면을 하나씩 넘기던 손이 어딘가에서 멎었다. 민예서의 양옆으로 남자 둘이 보였다. 앞서가는 한 명은 그녀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누군가와 얘기 중인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전혀 반갑지 않은 낯짝이다.

주혁은 최인하의 옆얼굴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스스로에게 묻듯 불쾌한 눈매였다. 눈빛은 서늘하다 못해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었다.

***

이틀 뒤 삼일장을 마치고 유품까지 다 정리된 후, 고모 가족과 인근 식당에 나란히 앉았을 때였다. 예서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고모, 저… 할머니 댁 말인데요, 거기 사시던 분들이 지난달에 이사 가시고 쭉 비어 있다고 하셨죠. 혹시 제가 몇 달만 거기서 지낼 수 있을까요? 내년 3월까지만이라도….”

강옥순이 요양원에 들어가기까지 살았던 구옥은 그녀가 어린 시절 방학마다 왔었던 집은 아니었다. 연락이 끊긴 사이 조모는 고모가 제 명의로 구해 준 집으로 옮겨 살았고, 요양원에 있는 동안은 동네 지인에게 세를 주고 있던 모양이었다.

“거기 살겠다고? 너 서울 집은 어떡해?”

“어차피 내년 초 만기라서 새집 알아보기 전에 당분간 조용히 지내고 싶어서요. 소설 정식 연재도 준비해야 되고….”

“어? 예서, 너 곧 결혼한다고 안 했… 아야!”

고모부가 국밥을 뜨면서 끼어들다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고모가 식탁 아래서 그의 허벅지를 꼬집고 있었다. 경현도 아버지, 고기 더 드세요! 제 몫의 머리 고기를 부친의 밥 위에 올려주며 화제를 전환하려 애썼다. 고모부는 아직 그녀의 파혼에 대해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너무 오래돼서 살기 불편할 텐데. 어차피 재개발 얘기가 나오고 있어서 비워두려 했다만…. 그럼 너 편할 때까지 그냥 지내렴. 불편한 거 없이 살 수 있게 동네 어르신들께 부탁해둘게.”

“감사해요, 고모. 그럼 세는 고모 계좌….”

“세는 무슨? 네가 돈이 어딨니. 아직 공모전 상금도 안 받았고 제대로 된 수입은 한참 뒤에나 나온다며. 그냥 있어.”

고모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결국 걱정만 더했다.

“지내다 불편하면 언제든 그냥 나오고. 응? 우린 며칠 뒤 들어가야 되는데 너랑 경현이가 걱정이다.”

“에이, 엄마. 난 걱정할 게 뭐 있어. 1년 반 그냥 맘 비우고 체력 단련한다 생각하면 되지. 쉬면서 예서 누나 소설이나 읽어야겠다. 우리 사촌 누나라고 막 자랑해야지!”

경현의 너스레에 그나마 어둡던 분위기가 조금 밝아지는 듯했다. 식사가 끝나고 고모부가 계산을 하는 동안, 예서는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지그시 눌렀다. 원래 있었던 월경 불순에 더해 요즘은 복통이 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연이은 충격과 상심, 극심한 스트레스 탓이려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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